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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09화 (209/230)

“일단 외부 파견 중인 성기사와 사제들을 불러 모으세요. 어차피 저번에 제대로 데여서 한동안은 사교도 놈들도 몸을 사릴 테니까요.”

“음. 확실히 요즘 발견한 모든 사교도 지부가 흔적만 남아있긴 했습니다. 대대적인 철수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겠지요.”

“네. 그렇다고 포기할 놈들도 아니니, 아마 힘을 모아 한 번에 덮쳐오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 타겟이 저희가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지요.”

“…….”

내 말을 잘 들어줄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정말 군말 없이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당장 내 여인들도 뭔가 묻고 싶은 게 많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그런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알바오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신앙은 맹목적이기에 신앙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신전의 알현실…?”

“예에. 가장 정의로운 광명님과 가까운 장소 중 하나지요. 만약 누군가 감히 주의 이름을 빌려 망령된 소리를 한다면…어떤 형태로나마 천벌이 떨어질 정도입니다.”

“…안 떨어졌으니까 괜찮은 거 맞죠?”

“물론이지요. 아마 광명께서도 일리 있는 말이라 여기신 걸 겁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어우. 여기서는 뭐 말할 때 좀 조심해야겠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성직자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알바오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부탁도 있다고 하셨죠. 뭐든 말씀해주시지요. 정의로운 광명께 부끄럽지 않은 선에서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아, 별건 아니고 헬레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에? 어? 아?”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에 입을 헤 벌리고 있던 헬레나가 자기 이름이 불리자 당황한 목소리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성녀 후보가 아닌, 성녀로 추천드리고 싶어서요. 내일 예배당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정의로운 광명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다.

그거 말고도 문의할 게 많고.

내일 하루 예배당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알현실에서 나왔다.

알바오르와 길버트는 파견 나간 사제들의 복귀에 관해 나눌 이야기가 있는 건지 알현실에 남았고.

대신 헬레나가 우리를 귀빈실로 안내해주기로 했다.

궁금한 게 많지만 차마 여기서 물을 수는 없다는 걸까. 아까부터 연신 입을 오물거리는 이리스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흐에엑!”

“후우….”

어째서일까 이리스가 파닥거리는 모습이나 빼액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울상이 된 이리스가 쪼르르 엘리샤에게 달려가 안기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앞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검은 수녀복. 하지만 이 정도로는 숨길 수 없다는 듯 굴곡진 엉덩이.

걸음걸음마다 슬쩍 내비치는 옆트임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간다.

…페이랑 수녀복 플레이했을 때가 생각나네.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떨쳐내고는 힘이 쪽 빠졌는지 비틀거리며 걷는 헬레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저기, 헬레나 님?”

“예에? 무슨 일이신가요 형제님?”

평소 같은 목소리로 화답하긴 하지만 어째 안색이 창백하다.

“아뇨. 그. 괜찮으신가 싶어서요.”

“으음…솔직히 괜찮지는 않네요.”

헬레나가 애매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제가 이상한 착각을 한 것도 부끄러운데, 갑자기 형제님께선 성녀 후보인 저도 몰랐던 기밀을 술술 말씀하셨지요. 거기에 마지막에는 저를 성녀로 추천하겠다고 하시기까지…솔직히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아하? 그럴 수 있죠.”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인물끼리 설정 추측하느라 스포 섞인 대화를 나누는 걸 뉴비가 들어버린 느낌 아닌가.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헬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얀델 형제님께서는 메달리온의 대가로 같은 파티에 들어와 달라 하셨지요?”

“그렇죠. 아무래도 지금은 마법사밖에 없으니 사제가 필요했거든요.”

“다른 실력 있는 분들도 많을 텐데 굳이 저를 콕 찝으신 건…처음부터 저를 성녀로 만들 생각이셨나 보네요. 어쩌면 제게 접근하신 것도….”

“그건….”

순간 할 말을 잃고 머뭇대자 헬레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앗. 조금 전은 너무 형제님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버렸네요. 사실은 그 반대랍니다. 과연 제가 성녀라는 자리에 어울리는지 자신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거든요. …최근 들어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말이지요.”

“이런저런 일이라면 역시 자꾸 저를 피하시던 그건가요?”

“으읏…네.”

무엇을 떠올린 건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그런 헬레나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헬레나 님을 성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광명님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정의로운 광명께서….”

“네. 성녀는 신의 사도잖아요.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며, 대변인이자 분신. 그리고 첫 번째 딸이기도 한 자리.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결국 결정은 정의로운 광명께서 하십니다.”

뭐, 헬레나라면 아무 문제 없이 성녀로 내정되겠지만.

광명 교단에는 헬레나 이외에도 성녀 후보가 2명 더 있다. H&A에서는 선택지에 따라 그들을 성녀로 만들 수도 있었고.

하지만 나머지 둘과 헬레나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그 둘은 개별 에피소드를 거쳐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준 뒤에야, 일종의 깨달음을 얻어 성녀로서의 자질을 가지게 된다.

반면 헬레나는 처음부터 성녀의 자질을 충족하고 있다.

신의 사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도, 신성력의 양도, 깊은 신앙도 아니다.

이 셋도 중요하긴 하지만, 사도가 되면 신과 직접 이어지기에 알아서 따라오니까.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고방식이 유사한지다.

초월적 존재와 정신이 이어지는 것이니 여기에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거든.

이를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각 교단의 신은 이미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친절하게 글로 남겨주지 않았나.

교리.

모시는 신의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걸 넘어, 본인의 사고방식 자체가 교리에 가까워져야 한다.

내가 그래서 사도직을 받지 않으려 했던 거다.

안 맞는다고 정신이 붕괴한다거나 그런 건 없지만, 머릿속에 24시간 잔소리하는 사람이 들어앉는 꼴이니까.

여생을 반강제로 정의로운 광명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건 좀 아니지.

무엇보다 특성 자체가 마법사 테크라 성자로 갈아타면 능력이 되려 애매해지는 것도 있고.

하지만 헬레나를 보라.

사교도나 몬스터만 보면 반쯤 정신줄을 놓고 달려드는 그 배틀 정키스러운 모습을! 악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를!

지금이야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게 됐다지만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자제하는 이유도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조지기 위해서 아닌가.

정의로운 광명의 교인이 하나같이 나사 빠지고 악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나, 헬레나만큼 진심인 사람은 없다.

그렇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후보 둘이 스스로 각성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헬레나는 무난하게 성녀 자리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의로운 광명에게 성녀 자리를 확답받더라도 정작 내려줄 힘이 없다는 점이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쪽에서도 나름 생각해둔 것이 있지만.

속으로 이래저래 계획을 되새기는 사이. 진지한 얼굴로 “정의로운 광명님의 뜻….” 이라고 중얼거리던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그러네요. 어울리고 말고는 판단하는 건 저희 주님이지 제가 아니지요.”

“바로 그거에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도 걱정하지도 마시고 그냥 내일 같이 예배당 한 번 다녀오면 됩니다.”

“네!”

그제야 헬레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있었다지만, 헬레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조금 걱정됐는데.

보아하니 괜찮을 것 같네.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도 잠시.

헬레나가 걸음걸이를 조금 늦추더니 우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안내하기로 해놓고 너무 말없이 길만 걸었죠? 지금부터라도 이 대신전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드리려는데 괜찮으실런지요?”

“당연히 괜찮죠.”

“나, 나도…좀 궁금한 게 많았어.”

“좋아! 좋아! 오늘은 내가 가르치는 쪽이 아니라 배우는 쪽이 되어볼까?”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많아 보이는 카를라, 엘리샤, 이리스와 달리 그저 경직된 분위기가 불편했던 페이가 냉큼 승낙했고.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때때로 감탄하던 이오나도 반색하며 헬레나의 옆에 딱 붙었다.

순간 흠칫한 헬레나였으나, 이오나의 적극적인 태도가 싫진 않은지 부드럽게 웃으며 회랑의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운 그림을 가리켰다.

“대충 예상은 하셨겠지만, 이 회랑에 그려진 그림은 신들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묘사한 것들입니다. 본래는 어떻게 정의로운 광명님이 사람들과 처음 만나고 교단에 세워지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만, 대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악신과 사교도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위에 덧칠했다고 합니다.”

“응응. 그럴 것 같았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개 보였거든. 예를 들면 저기! 저거 정의로운 광명님이랑 추악한 번성의 사도를 찢어버릴 때의 장면이지? 나도 저기서 싸워봐서 잘 알아! 뱀파이어는 성욕이 일반적인 형태와 조금 달라서 추악한 번성을 상대하기 딱 좋거든!”

“아, 그건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항상 흡혈욕에 시달렸던 터라 정신계 공격에도 내성이 있고, 성욕을 자극해도 피만 마시면 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짝짝짝! 정답이야! 전장에 넘치는 게 피니까 사실상 고위 사교도 수준의 권능에는 면역이라고 봐야 해! 뭐…사도급이 되니까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바람에 흡혈욕이 폭주할 뻔했지만.”

“그때 등장한 게 바로 정의로운 광명님이셨죠.”

입으로 짝짝짝 소리를 내며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이오나와 자랑스레 팔을 번쩍 들어 그림의 한구석을 가리키는 헬레나.

이제 보니 이오나의 말대로 흡혈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백색의 사자.

포효 한 번에 잡다한 적들을 전부 제압하고, 몇 번의 투닥거림 끝에 간단히 추악한 번성의 사도로 보이는 인큐버스의 날개를 뜯어낸다.

그렇게 지상에 추락한 이후에는 일방적인 유린 끝에 인큐버스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일단 성화니 나름의 과장이 들어갔겠지만…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정의로운 광명은 유독 강한 신이고, 추악한 번성은 직접 전투에는 약한 신이니까.

거기에 신과 사도라는 격차까지 주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당시의 장면을 상상하며 헬레나의 설명을 듣던 도중.

“어?”

성화의 한구석에 그려진 무언가를 보고 잠시 멈추어 섰다.

“아코…왜 그러시나요 주인님?”

내 뒤를 따라 걷다 등에 부딪힌 카를라가 자신의 코를 어루만지며 되묻길래,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곳을 가리켰다.

유독 짙은 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형의 몬스터들을 꼬챙이로 꿰어내는 여인.

“저거 이오나 교수님 아냐?”

“오…듣고 보니 확실히 닮은 것 같네요.”

내 손끝이 향한 곳을 힐끔 바라본 헬레나가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겁니다. 이오나 교수님은 당시에도 유명한 분이셨으니.”

“헤헤…봤어? 봤어? 내가 이 정도야 얀델 학생!”

기묘한 포즈를 취하며 눈을 반짝이는 이오나. 어서 칭찬 내지는 찬양을 해달라는 것 같지만….

내가 놀란 포인트는 조금 다르다.

“와…이렇게 보니 이오나 교수님 진짜 나이 많으셨네요. 하긴 372살이면 반올림해서 400살이니 이런데 기록되기도 하는 거겠죠.”

“…그쪽이야?!”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놀람을 표하는 이오나.

이후에도 이리스와 이오나를 찾아본다거나, 큐레이터가 된 헬레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대신전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에야 귀빈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처음으로 이 세계의 신과 접할 시간이 찾아왔다.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정의로운 광명과 접할 시간이 찾아왔다.

에우렐리아 대륙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만나는 초월적 존재.

다만 아직 신들은 자신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각자의 성소에 틀어박혀 휴식에 전념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물며 정의로운 광명은 자신에게 힘을 퍼주느라 그나마 모았던 힘도 소모했을 터.

어쩌면 오래 대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본인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대신전 예배당이라고 해도 신탁을 내릴 때마다 힘이 소모될 테니까.

그러니 해야 할 말을 미리 정리해뒀다.

어제 끼적인 메모장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아침도 안 드시고요 주인님?”

“…원래 아침 기도는 밥 먹기 전에 하는 거야.”

눈을 부비며 하품하는 카를라. 나도 모르게 반박이 튀어나온다.

절대 기대돼서 못 참겠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야 지구에서는 본 적 없는 실존하는 신이고, 심지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 만나는 초월적 존재인 데다가, 어쩌면 내 빙의에 관해 무언가 알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들뜨지 않았다…!

“흐아암. 소풍이 기대돼서 잠 못 자는 어린애도 아니고….”

“떽! 엘리샤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리고 주인님은 저런 면이 귀여운 거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와 엘리샤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문을 열었다.

***

전날에 미리 헬레나에게 예배당의 위치를 안내받은 덕에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시 봐도 화려하네.”

“다른 어디도 아니고 메인 예배당이니 당연한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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