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기나긴 회랑을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간 끝에,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
“아아…멀리서부터 주님의 빛이 느껴졌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정의로운 광명님을 모시는 첫 번째 종. 알바오르라고 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상석에서 내려와 자기소개를 하는 노인.
알바오르는 얼굴만 늙었지 몸은 어지간한 젊은이보다 대단한 길버트와 달리, 작고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교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A+랭크의 가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알바오르의 안에서 무언가 강렬한 반짝임이 느껴진다.
다른 성직자들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 교황이라서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알바오르 개인의 특징?
게임에서는 그냥 전형적인 약해 보이지만 사실 제일 위험한 노인 캐릭터라는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알겠네. 약해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외견뿐.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는 자신을 전혀 숨기고 있지 않다.
여차하면 저 반짝임은 대량의 신성력이 되어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기적이 되리라.
가장 호전적이라는 정의로운 광명의 교황다운 모습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이내, 웃으며 알바오르의 인사에 화답했다.
“환영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네요.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세요,”
“무얼. 요즘 시대에는 교황이라 해봤자 결국 추기경 중에서 선출된 임시직. 대전쟁 이전의 진짜와는 다르지요. 실제로 주의 총애를 받고 계신 분께 존대를 듣는 제가 더 부담스럽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런지….”
“…그냥 이대로 하죠.”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알바오르.
아무리 그래도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반말은 조금 저항감이 있단 말이지.
길버트는 그 거대한 몸집 때문인지 지긋한 연상이라는 느낌은 안 들었지만.
아무튼 페이와 이오나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알바오르는 뒤이어 길버트와 헬레나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초부터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를 보내려는 알바오르.
“이거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실 텐데 너무 귀찮게 하는 게 아닐까 싶군요. 귀빈실을 준비해뒀으니 자유롭게 사용해주십시오. 시간이야 다음에 또 내면 되지요.”
“감사합니다. 다만 그 전에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와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으음? 이 늙은이와 말입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자, 어서 앉으시길.”
본래 앉아있던 상석이 아닌, 그 앞에 배치된 원탁의 한 자리를 잡아 앉는 알바오르.
나 또한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예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정의로운 광명 교단 지키기 계획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교도들이 광명 교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거야 언제나 있던 일이지요.”
“조금 더 정확히는 정의로운 광명 님의 타천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사교도들이 광명 교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거야 언제나 있던 일이지요.”
“조금 더 정확히는 정의로운 광명 님의 타천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이마를 찌푸리며 허리를 꼿꼿이 펴는 알바오르. 길버트 또한 경직된 표정으로 그의 뒤를 지키고 섰다.
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타천墮天.
하늘에서 떨어지다. 몰락하다. 타락하다…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좋다.
중요한 건 신은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누군가의 악의로 얼마든 변질될 수 있다는 것.
타천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마 극소수의 관계자뿐이리라. H&A에서도 후반부에 실제로 타천이 일어난 뒤에야 알 수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니, 우선 가볍게 설명하고 가죠.”
“널리 알려져서 좋을 일은 없습니다만…지금은 필요한 일이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알바오르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리고, 내 여인들과 헬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이 세계에는 다섯의 선신과 일곱의 악신이 있다.
선신 측에는.
정의로운 광명.
피어오르는 새싹.
순환하는 생명.
부딪히는 강철.
자유로운 숨결.
악신 측에는.
혼탁한 합일.
추악한 번성.
들끓는 고요.
편협한 찬탈.
무모한 포효.
굽이진 여유.
고고한 군림.
이렇게 각 신들이 서로 선과 악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세상. 그것이 에우렐리아 대륙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르륵 신명을 늘어놓고 보면 문득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게 되지 않는가?
우선 선신 측의 신은 참 복잡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정의로운 광명 - 빛
피어오르는 새싹 - 땅
순환하는 생명 - 생물
부딪히는 강철 - 불
자유로운 숨결 - 바람
이게 가장 기본적인 분류지만, 그 외에도 선신들은 다양한 영역을 관장한다.
정의로운 광명이 빛뿐만 아니라 태양의 상징이며, 하늘의 주인으로 취급받듯이.
피어오르는 새싹이 풍요의 신으로 불린다거나, 순환하는 생명은 치유의 신, 부딪히는 강철은 대장장이의 신, 자유로운 숨결은 여행의 신으로 불리는 식으로 확장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반면 악신은 칠죄종에 관련된 한정적인 영역을 관장할 뿐이고.
이유는 간단하다. 선신들은 고대로부터 인류와 함께하던 존재.
인류의 기술과 관념이 발전하며 각 신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됐으니, 자연스레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악신은 기껏해야 300여년 전에 쳐들어온 외계의 존재라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신은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어. 하지만,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는 사람의 신앙을 필요로 하며, 그 신앙에 담긴 바람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도 해.”
그렇다. 신의 근본은 변하지 않아도, 덧칠 정도는 얼마든 할 수 있으리라.
여기까지 들은 이리스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리스는 어디까지나 노예의 신분. 차마 우리끼리 있을 때처럼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이오나의 어깨만 콩콩 두드린다.
평소라면 한차례 이리스를 놀렸을 이오나지만, 지금은 본인도 궁금한 게 많은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있잖아.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얀델 학생은 정의로운 광명님이 악신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네. 그게 타천이에요.”
“하지만 그 정의로운 광명께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오나.
하기야. 정의로운 광명은 가장 호전적이고, 악신을 혐오하기로 유명한 신이니까.
“다만 그 혐오가 악신을 넘어 에우렐리아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
“타천이니 힘을 덧씌우니 어렵게 말하지만…간단히 정리하면 미치게 만든다는 소리거든요. 이 경우에는 정의로운 광명님의 호전성과 악에 대한 혐오를 폭주시키는 느낌이려나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8번째 악신. 포학한 위광僞光.
기존의 경건한 신도는 전부 죽거나 미쳐버리고, 남는 것은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증오뿐.
검은 빛을 뿜어대며 시야의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한 사자와, 광신도의 모습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1회차 시절에 든든한 동료라고 생각했다가 뒤통수 맞았을 때는 정말….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마 교황 성하나 길버트 추기경님은 아시겠지만…타천은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이에요. 에이 설마 하고 넘길 일은 아니라는 소리죠.”
“정말이야 얀델 학생? 이래 보여도 난 직접 신들의 전쟁에 참여했었어.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걸?”
“그야 기밀 중의 기밀이었으니까요. 아마 성직자 중에는 고참 추기경급. 그리고 외부에서는 직계 황족이나 왕족 정도는 돼야 알고 있는 정보일 거예요.”
“……흐음 흐음. 확실히 당시의 나는 개인행동을 더 선호했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네.”
그런 걸 넌 왜 알고 있는데? 라고 말하는 듯한 이오나의 시선을 적당히 흘려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악신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죠. 그래야 이해하기 편할 테니.”
H&A를 플레이하던 시절. 당시의 내게 악신은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한 점이 많은 존재였다.
신들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도 이상하다.
1. 미친 대마법사의 실험 실패로 차원이 찢어졌다.
2. 찢어진 차원 너머로 외계의 신들이 침략해왔다.
3. 기존의 신들과 전쟁을 일으켜 거의 승리했으나, 용사에게 허를 찔려 봉인 당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느낌이겠지.
그런데 생각해 보라. 아무리 차원 장벽의 틈을 타고 넘어왔다지만, 강림하자마자 전쟁을 일으킬 정도라고? 심지어 우세를 점하기까지?
선신들이 아직도 강림은 물론 사도 임명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적인 존재는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막대한 힘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쳐들어오자마자 기존의 신들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일곱이나 차원 장벽의 틈으로 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차원 장벽을 아예 부숴버리고 쳐들어왔으면 모를까 틈새로 슬쩍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쳐들어오자마자 전쟁을 일으킨 것까지야 그렇다 치자. 무언가 자기들만 아는 우회로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데 갑자기 솟아난 사교도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지능이 미미한 몬스터까지 신도로 삼았으며.
분명 외계의 존재라고 했건만, 어째서 칠죄종 같은 인간 기준의 악성을 담당하는 거지?
무엇보다 담당한 칠죄종도 이상하다.
혼탁한 합일 - 식욕
추악한 번성 - 성욕
들끓는 고요 - 나태
편협한 찬탈 - 질투
무모한 포효 - 분노
굽이진 여유 - 나태
고고한 군림 - 오만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금방 수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나태가 중복되어있다.
이러한 자잘한 것들이 겹치고 겹쳐 플레이 내내 의문만을 안겨주었던 악신.
당연히 직접 그들과 싸우던 대전쟁 당시의 사람들도 악신의 정체에 대해 연구를 거듭했고, 어찌어찌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악신은 강력한 정신 오염 능력이 있어.”
칠죄종만을 담당하는 이유?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면 부정적인 감정밖에 안 나와서 그런 거다.
그렇기에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여지가 없다. 모든 신도들이 하나의 극단적 충동에 시달릴 테니.
일전의 아일라가 그러하듯, 사교도들의 계급이 높아질수록 감정이 개조되어가는 것도 그래서다.
“차원 틈새로 쳐들어온 것도 아마 본인의 힘을 최대한 깎아내서 비집고 들어온 거겠지.”
강한 채로 침입한 게 아니다. 들어올 때는 약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힘을 회복했을 뿐이다.
정신 오염을 통해 주변의 인간을 빠르게 세뇌하고, 이를 통해 신앙을 수급할 수 있다.
심지어 순수한 신앙이 아닌 본능을 기반으로 한 삐뚤어진 신앙이라 몬스터 상대로도 수급이 가능했고.
신이 힘을 키우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앙. 악신이 우세를 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나태가 둘인 이유는 간단해. 들끓는 고요가 바다의 신으로 칭송받던 솟구치는 파랑波浪을 타천시킨 거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형제 신이거나, 존재감 없는 들끓는 고요가 종속된 하위 신이라 여기는 것 같지만…실제로는 그 반대다.
편협한 찬탈과 힘을 합친 들끓는 고요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고, 인어는 멸종한 뒤. 솟구치는 파랑을 따르는 신도들을 오염시키고, 신력을 오염시키고, 그렇게 약해진 신을 오염시킨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굽이진 여유다.
눈앞에서 가장 아끼는 종족이 몰살당하고, 신도들이 미쳐가는 모습을 보며 느낀 무력감을 나태로 왜곡시킨 것.
참고로 정의로운 광명이 타천해 태어나는 포학한 위광은 분노로 오염된 악신이다.
“신들이 직접 지상을 거닐던 시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불가능한 건 아니야. 아니,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무조건 일어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 다행히 이에 눈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았겠지. 그래서 천천히 정의로운 광명 교단과 친해지려 했던 거고.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정의로운 광명이 가호를 퍼준 덕에 광명 교단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얻었다.
무엇보다 내겐 지금까지의 실적이 있으며, 들끓는 고요의 스파이짓과 악신 교단의 연합 또한 전부 나로 인해 밝혀진 상태.
대전쟁이 끝나고 지리멸렬하게 쪼개져 봉인 당한 탓에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한다 여겼던 악신 교단이 서로 협력한다면?
아무리 광명 교단의 전투력이 대단하다지만, 홀로 모든 악신 교단을 막을 수는 없다.
아직 악신은 강림하지 못하지만, 정신 오염 능력만이라도 구현할 수 있다면…그땐 정말로 타천 당하는 거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바오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저희가 어떻게 하시길 바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