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가 멈췄다. 대신전에 도착했다.
***
“크으윽! 태양이…태양이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강하게 내리쬐는 뙤약볕에 과장되게 손을 허우적거리는 이오나.
“아무렇지도 않은 거 다 아니까 장난치지 마세요 교수님.”
“아냐! 아냐! 장난이 아니라, 태양 빛이 너무 강해서 이걸 직통으로 맞았다가는….”
“맞았다가는?”
“피부가 전부 타버렷…!”
“…….”
이럴 줄 알았어.
한숨을 푸욱 내쉬며 페이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 건지 마찬가지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내 건넨다.
출발하기 전에 넉넉히 만들어뒀던 선크림.
가만히 이쪽을 향해 얼굴을 내민 이오나에게 슥슥 발라주자, 그제야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친다.
“이오나 부활!”
“와아아….”
영혼없는 박수를 쳐주자 이런저런 기묘한 포즈를 취하며 즐기는 이오나.
이리스는 그 모습에 혀를 쯧쯧 차며 엘리샤의 풍성한 롤빵 머리를 양산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둘 다 거기서 거기 같은 상황.
고생하는 엘리샤의 머리 위에 손을 모아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전 쪽에서 마중이 나왔다.
백발이 듬성듬성 섞인 머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름. 전체적으로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얼굴이지만…몸은 건장하기 그지없다.
2m에 가까운 키. 떡 벌어진 어깨. 넉넉한 사제복 너머로도 선명히 드러나는 세기말 패자 같은 근육.
누가 머리만 합성한 것 같은 노인의 기괴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압도당한 순간.
노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해맑게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태양이 그대의 앞날을 비춰주기를. 환영합니다 얀델 형제님! 그리고 페이 자매님과 이오나 교수님도 잘 오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히에에에….”
“반가워 반가워!”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페이에 이르러서는 그냥 쫄았는지 스윽 내 뒤에 몸을 숨겼다.
오직 이오나만이 방긋방긋 웃으며 마주 인사했을 뿐.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는지 머쓱하게 코를 긁적인 노인이 이번엔 헬레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헬레나. …잠깐 사이에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역시 아카데미에 보내길 잘한 것 같구나.”
“길버트 추기경님도 오랜만이에요. 전부 주님의 덕분이니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겸손한 자세로 부끄러워하는 헬레나.
저 사람이 길버트였구나. 초면의 임펙트가 너무 강해 순간 누군가 싶었네.
길버트는 헬레나 루트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헬레나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헬레나의 자질을 알아보고 본단에 보냈으며, 그 뒤로도 후원자가 되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었다.
아무리 헬레나의 자질이 뛰어나다 해도 만약 길버트가 없었다면 성녀 후보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질만 있을 뿐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는 못한 상태. 그게 지금의 헬레나다.
당장 전투 중에 과하게 흥분한다는 문제도 완전히 고치진 못했고.
참고로 길버트는 어느 루트로 가건 가장 앞장서서 싸우다 죽는 비운의 캐릭터다.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포지션의 캐릭이 으레 그러하듯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느낌.
길버트의 죽음 이후 헬레나가 무너지거나, 다시 일어나는 것으로 루트가 갈리는데….
역시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좋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것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헬레나와 근황을 나누던 길버트가 무언가 깨달은 듯 아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제 소개가 너무 늦었군요. 길버트라고 합니다. 추기경직을 맡고 있는 덕에 감사하게도 이리 귀빈을 모실 수 있게 됐지요. 헬레나. 너는 이만 가서 쉬어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안내할 테니.”
“알겠습니다 추기경님. 여러분들도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만 가보….”
“잠깐.”
아직도 제대로 내 쪽을 바라보지 못하는 헬레나를 멈춰 세웠다.
왜 이렇게 나를 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헬레나는 귀중한 파티원 후보.
안정성이 부족한 극딜형 마법사 파티에 탱과 힐을 맡아줄 소중한 인재란 말이다.
이대로 사이가 어긋나게 놔둘 수는 없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헬레나의 팔뚝을 단단히 붙잡았다.
“힉!”
치한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겁하는 모습에 조금 상처받았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
“헬레나 사제님. 요즘 저를 자꾸 피하시는데…그래도 저번에 했던 약속은 기억하시죠?”
“야, 약속이라 하심은 설마….”
“네. 그 설마예요.”
“아아! 이, 이런 곳에서…그것도 길버트 님이 보고 계시는데…!”
힘이 풀린 건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털썩 주저앉는 헬레나.
황급히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지탱해주었다. 그리고는 당당히 내 권리를 요구했다.
“약속대로 본단에서의 안내도 헬레나 님이 해주시죠.”
오들오들 떨던 헬레나가 금색 눈동자를 멍하니 떴다.
“…예?”
내가 헬레나의 팔을 잡는 순간부터 심각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길버트도 덩달아 멍한 표정을 지었고.
“…허?”
오직 내 여인들만이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왜 너희만 알아.
나도 알려줘!
사람은 살다 보면 가치관이 흔들리는 때가 있다.
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허접이 아닐까?
가슴은 머리보다 커야 하는 법. 하지만 이리스는 야해.
5,000자 정도는 10시간 안에 쓰고도 남지. …남는 거 맞지?
오리너구리는 오리랑 너구리랑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살다 보면 수많은 자기 의심이 피어오르고, 그렇게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내게는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내가…눈치가 없어?”
“뭐, 주인님은 사정이 사정이니까요. 그렇지 엘리샤?”
“예에. 사교성을 기를 여건이 부족했을 뿐이랍니다. 이젠 저희가 있으니 괜찮겠죠.”
“그으…후배님? 같이 힘내자?”
어색하게 웃으며 위로하는 카를라, 엘리샤, 페이.
이것만으로도 마음이 쓰라리거늘, 장생종 듀오에 이르러서는 진심으로 나를 불쌍해하고 있다.
“주인이여…이, 이제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는 게 어떻겠는가? 이래 보여도 전 마탑주 아닌가. 대외 활동에는 제법 자신이 있네.”
“있잖아. 있잖아. 2학기부터는 마법 수업 말고 교양 수업도 들어볼래? 교수 권한으로 조금 정도는 편의를 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구.”
날…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아아아악!!!
대충 사정은 알겠다. 나를 평생 드래곤 레어에 처박혀 각종 정보와, 싸우는 법만 배우다 몇 년 전에 처음 세상으로 나온 소년 정도로 보고 있다는 거겠지.
실제로 그런 설정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이래 보여도 제대로 초중고를 나와 대학까지 다니고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3년 된 응애가 아니란 말이다!
…어라? 그런데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더라?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게임만 했던 것 같은데.
“…….”
갑자기 몰려오는 짙은 회의감.
말없이 이리스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주인이여? 설마…!”
경악하는 이리스를 꽉 붙잡고, 그대로 위아래로 흔들며 높다 높다를 해주었다.
“노, 놓아주시게! 밖에서 이런…이런 건 좋지 않네!”
한참을 바동거리는 이리스였으나 계속해서 비행기를 태워주자, 언제나 그러하듯 체념하고 축 늘어졌다.
흔들흔들.
힘없이 까딱거리는 이리스의 팔다리를 보며 힐링하기도 잠시.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길. 벽면부터 시작해 천장까지 빼곡히 채운 성화聖畵. 그리고 곳곳에 깃든 짙은 신성력까지.
단순히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상처는 아물고, 전신에 활력이 넘쳐날 것 같은 느낌.
그렇다. 여기가 바로 대신전 내부에 있는 알현실로 이어지는 회랑.
우리는 지금 길버트와 헬레나의 안내를 받으며 교황을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정작 길버트와 헬레나는 길 안내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지만.
“흐으아앙! 길버트 아저씨!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 거죠?! 고개를…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너무 부끄러워…!”
“아니. 그. 오해 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 헬레나 너도 알 거 다 아는 나이니 그리 착각할 수도 있지.”
“역시 그렇죠?! 얀델 형제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지만 사생활이 좀 그렇잖아요!”
“좀 그렇다니….”
슬쩍 이쪽의 눈치를 보는 길버트.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헬레나를 달래기 시작한다.
“확실히 좀 그럴지도 모르지만, 전부 합법의 테두리잖니. 애초부터 헬레나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거란다.”
“그건…네. 그러네요. 얀델 형제님은 문란하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시니. 헌데 조금 전의 약속이 내기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 메달리온의 대가로는 무슨 부탁을 하실지….”
“으음? 그건……허억!”
헬레나가 만지작대는 메달리온을 보고 눈을 부릅뜨는 길버트.
근육 덩어리 거한이 저러니까 좀 무섭다.
속으로 움찔한 사이. 앞서가던 길버트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물었다.
“얀델 님!”
“엇, 네.”
“신물을 하나 더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하나 더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오는 길에 던전을 하나 클리어해, 그 보상으로 얻은 겁니다.”
“오는 길에…던전을…?”
길가다 금괴를 주웠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는 길버트.
하기야. 던전이란 게 발견하고 싶다고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대충 얼버무리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까요. 마침 전력도 충분하다 싶어서 그대로 클리어해 버렸죠. 메달리온이야 저희가 쓰기도 애매하고, 척 봐도 정의로운 광명 님의 신물 같아 헬레나 사제님에게 넘긴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나중에 부탁 몇 개 들어달라고 했지만요.”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레 이쪽의 의향을 묻는 길버트. 이젠 안다. 내게 호감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왜 이리 경계하는 건지.
내가 메달리온을 빌미 삼아 헬레나에게 엄한 짓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거겠지.
…솔직히 좀 땡기긴 하지만 내가 헬레나에게 원하는 건 좀 다른 부분이다.
은근슬쩍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헬레나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파티에 들어와달라고 할 생각이었죠.”
“파티 말씀이신지요.”
“네. 같이 던전을 공략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교도 토벌도 같이하는 그런 파티요.”
“허어….”
멍하니 눈을 꿈뻑이던 길버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실로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현실적으로 힘들지 않겠습니까? 헬레나의 자질은 분명 뛰어나지만…저도 들은 것이 있어 압니다. 얀델 님의 수준을 따라갈 정도는 아닐 겁니다.”
“지금은 그렇겠죠. 하지만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다 보면 금방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힘을 회복한 정의로운 광명께서 헬레나 님을 조금 더 아끼게 될지도 모르고요.”
“으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워지는 길버트의 눈.
헬레나가 성녀 후보라는 사실은 일단 비밀이다. 교단의 고위 간부…대주교나 추기경쯤 되는 인물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한 수준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
그런데 내가 헬레나를 성녀로 만들겠다는 말을 꺼냈으니 경계할 수밖….
“이런. 생각해보니 당연히 아시는 일이겠군요. 제 생각이 짧아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뻔했습니다.”
“네?”
갑자기 고개를 꾸벅이는 길버트. 이내 다 안다는 듯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태양에 가까우신 분이라면 헬레나의 자질을 눈치채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시죠. 광명께서는…헬레나를 택하신 겁니까?”
“어…그건 아니지만 한번 부탁은 드려보려고요. 최근 사교도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잖아요? 미리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누가 좋을지 고민하며 질질 끌 시간은 없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군요?”
“자세한 건 알현실에서 교황님을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인지라.”
“허어…알겠습니다. 그럼 우선은 안내에 집중하지요.”
조금 굳은 표정으로 다시 앞장서 걷는 길버트.
헬레나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네? 네? 거리면서 두리번거렸고.
내 일행들은 사전에 뭔가 말한 건 없지만, 얼추 짐작은 가는지 조용히 내 뒤를 지켰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착각한 게 부끄러워 발을 동동 구르던 헬레나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조용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