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떨어진 수풀에 웬 물웅덩이가 고여있었다.
응? 비는 안 왔는데….
뭐, 숲이니까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겠지. 대충 이슬이 고이는 스팟이라거나 밑에 지하수가 흐른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페이를 받쳐 든 엉덩이를 다시 고쳐잡는데.
“으응…어? 후, 배님?”
이제 막 잠에서 깬 페이가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 어깨에 걸쳐진 페이의 볼에 볼을 맞대고 가볍게 부볐다.
“일어났어요 페이 선배?”
“으에에…일어났어. 일어났으니까 그마안…눈을 못 뜨겠잖아.”
“오. 그거 좋네요. 앞이 안 보이면 제가 평생 이렇게 페이 선배를 업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조금 소름 돋긴 하지만 순간 솔깃한 내가 너무 밉다아.”
한숨을 푹 내쉬는 페이의 모습에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없는 숲길에 울려 퍼지는 둘의 웃음소리. 마치 세상에 나와 페이 단둘만 있는 기분이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랑도 이런 시간을 갖는 게 좋겠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 걸까. 이번에는 페이 쪽에서 내게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속삭였다.
“뭔가 좋네. …후배님도 그래?”
“당연하죠.”
“헤, 헤에. 조금 의외네. 후배님은 이런 거에 익숙하니 조금 감동이 덜할 줄 알았어.”
“…….”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목을 꼭 끌어안은 팔. 안심했다는 듯 작게 내쉬는 한숨.
이거 참.
페이를 받치고 있던 손으로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페이 선배?”
“뭐를?”
“전 아마 페이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페이 선배를 좋아할 거예요.”
“…헙!”
“애초에 어제 그렇게 격하게 즐겨놓고 갑자기 불안해하는 게 어딨어요?”
조금 서운하다는 듯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자 페이가 허둥대며 파닥거렸다.
“아니, 저기…그게….”
“흑흑…저만 진심이었던 건가요?”
“아, 아니야!”
슬쩍 우는 시늉을 하자 귓가에 대고 빼액 소리를 지르는 페이. 그리고는 자기도 큰 소리를 낸 거에 놀랐는지 스스로의 입을 텁! 틀어막는다.
뒤이어 한참을 우물거리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런 게 아니라…후배님은………잖아.”
“네?”
너무 작아 제대로 안 들려 되묻자,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페이.
이내 부끄러움과 기쁨. 그리고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치만. 후배님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직접 말해준 건 처음이잖아?”
“아.”
그러네? 생각해보니 페이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있잖아 후배님.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그, 첫 경험 때 했던 말 말이야.”
“음…제 아이를 낳겠다는 이야기요?”
“아, 아니! 그거보다 조금 앞에 했던 말!”
“농담이에요. 물론 기억하고 있죠. 페이 선배를 좋아해달라고 했었죠.”
“응. 그리고 후배님은 대답 대신….”
“키스했었죠.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요?”
“으응. 그건 아냐. 하지만 뭐랄까. 말로 듣고 싶었달까. 그쪽이 조금 더 안심된달까. 아아! 나도 내가 뭐라는지 모르겠네. 미안 후배님…나 조금 귀찮은 여자 같았지?”
“페이 선배는 언제나 귀찮은 여자였어요.”
“너무해….”
의심 많고, 소심하고,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음침하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고.
심지어 조금만 늦으면 자살해버리기까지.
만약 내가 후원으로 목줄을 틀어쥐지 않았다면 페이랑 친해지는 데만 한참은 걸렸을 거다.
“하지만 전 그런 귀찮은 페이 선배가 좋아요.”
H&A에서 봤던 스스로를 갈고 닦아 빛나던 페이는 물론.
지금 내 등 뒤에 매달려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페이 또한.
“정말 많이 좋아해요.”
“…….”
아니. 기껏 부끄러움을 참고 말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라니.
괜히 심통이 나서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고 고개를 슬쩍 돌렸으나.
“앗. 그. 우와앗. 어, 얼굴 보지마아….”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페이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알았어요. 얼굴 안 볼 테니까 빨리 대답이나 들려주세요.”
“…대답?”
“네. 저는 좋아한다고 했는데, 페이 선배는 뭔가 저한테 할 말 없나요?”
“으읏.”
잠시 입술을 우물대던 끝에 천천히 입을 여는 페이.
“나…도. 응. 나도 후배님 많이 좋아해. 아마 후배님이 날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허어?”
이걸 이렇게 받아칠 줄이야.
그저 헛웃음만 지으며 아무 말도 못하자, 페이가 그런 내 얼굴을 콕콕 찌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후배님. 방금 좋아해 한마디로 풀어지다니, 이제 보니 좀 편리한 여자 같은데? 같은 생각 했지.”
“아뇨. 근데 지금 같은 점이 좀 귀찮다는 생각은 했네요.”
“너무해!”
“하지만 페이 선배는 이런 제가 좋은 거죠? 연하 후배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것도 즐기고 있는 거 다 보여요.”
“읏…!”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츠러드는 페이. 그 모습에 낄낄대며 저 멀리에 보이는 마차의 방향을 확인했다.
밤과 낮의 인상이 다르길래,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기억하고 있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왔는데.
다행히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거의 다 왔네요. 간단한 변명용 시나리오라도 생각해둘까요?”
“응? 그냥 말해도 괜찮지 않아? 다들 조금 아쉬워하거나 부러워하겠지만, 별말 없을걸? 오히려 숨기는 거에 더 상처받을 것 같은데.”
“아, 다른 여자들에게는 제가 따로 말해둘 거예요. …수녀복은 아직 더 있으니까요.”
“힉!”
어제의 일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젖어 드는 페이의 하반신.
정신 차리라는 의미를 담아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찰싹!
“갑자기 젖으시면 어떻게 해요.”
“그으…어제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수녀복이 야한 옷으로 느껴져서….”
“그래도 지금은 진정하세요. 나중에 더 하면 되잖아요?”
“응…아, 그래서 조금 전의 이야기는 뭐였어? 누구한테 변명하려고?”
“그야 헬레나 수녀님이죠. 항상 아침 기도 하느라 일찍 일어나시니 저희가 없는 건 진작에 깨달으셨을 거예요.”
“아하?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 진짜 수녀님에게 수녀복 코스프레 섹스를 했다니.”
“그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말하기 그렇죠?”
한차례 서로 키득대고서야 입을 열었다.
“완전 거짓말을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적당히 밤 산책을 다녀왔다고 하자. 대충 둘러대면 대충 눈치채시겠지.”
“네. 그럼 그렇게 가죠.”
어차피 나랑 페이가 어떤 사이인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일전에 집중 치료실에서 비슷한 오해가 있기도 했고.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페이와 입을 맞추고 도착한 마차.
우선은 아직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있지 못하는 페이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 뒤에는 부럽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다른 여인들을 달래고, 겸사겸사 이오나에게 오늘치의 피도 먹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침 기도를 끝낸 헬레나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주, 주여? 어째서? 어찌하여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정의로운 광명의 심볼인 태양 형태의 조각 앞에서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헬레나.
그녀의 손에 들린 메달리온이 깜빡이며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저 멀리의 누군가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일 없었다.
메달리온의 반짝임도, 헬레나의 당황도. 전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 메달리온은 본래의 빛을 되찾았으며, 헬레나는 정의로운 광명의 존재감을 다시 느끼며 안심했으니까.
뭐, 헬레나는 아직 성녀가 아닌 성녀 후보고.
정의로운 광명도 무리해서 나한테 힘을 퍼준 것 같으니 골골대고 있을 수도 있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미묘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대충 그리 흘려넘긴 지 며칠.
드디어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우렐리아 대륙의 최동단. 태양이 떠오르는 장소. 가장 밝은 땅. 신이 잠든 성지.
그렇다.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본단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여기가….”
“직접 와보는 건 처음이야 카를라?”
“네. 아무래도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니까요.”
입을 헤 벌리고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카를라.
하긴. 풍경이 좀 멋있긴 해.
높이 솟아오른 절벽과 그 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 지금은 이미 태양이 중천에 떴지만, 새벽이 되면 가장 가까이에서 해돋이 장면을 볼 수 있으리라.
“저…사교도의 딸이라고 막 공격당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아니. 풍경에 감탄한 게 아니라 그런 생각에 불안해하던 거야?”
어이가 없어 한숨을 푹 내쉬던 것도 잠시. 최근 들어 제법 카를라와 친해진 헬레나가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걱정 마시길. 기껏해야 조금 꺼리는 정도랍니다. 무엇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얀델 형제님의 노예이니 함부로 대하는 이도 없을 테지요.”
“주인님의…헤헤. 그럼 다행이네요.”
확 풀어진 얼굴로 헤실 대며 내게 기대오는 카를라.
하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기. 헬레나 사제님?”
“그거 아시나요? 지금은 대신전은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답니다. 지금처럼 태양이 완전히 떠있는 시간에는 하얗게 빛나지만, 막 떠오를 때는 주홍빛이 되거든요.”
“오…신기하네요. 그나저나 조금 할 말이 있습니다만….”
“아, 여기엔 이오나 교수님과 같은 뱀파이어들이 많이 살고 있답니다. 과거 대전쟁 시기에 인류의 편에 선 대가로 태양의 가호를 받아 낮에도 생활할 수 있게 된 분들이 많잖습니까? 그분들 중 일부는 고맙게도 함께 정의로운 광명님을 모시기로 하셨지요.”
“그렇군요. 빛에 이끌리는 건 생물의 본능 같은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헬레나 사제님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몇 가지 있는….”
“그, 그러고 보니 제가 이걸 말씀 못 드렸네요! 여기가 수인 왕국인 크라시우스의 영토에 속하는 곳이긴 하지만, 대신전과 그 주변의 도시는 다른 교단의 본단처럼 자치를 약속받았답니다. 정식 명칭은 솔라리스 광명 교황령. 조금 길죠?”
“저기이…헬레나 님? 들리시나요?”
“크라시우스의 법보다 교단의 계율이 우선시 되는 곳이니 그 부분은 유념해 주시길. 물론, 교리를 잘 모르는 분에게까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아까부터 의도적으로 내 말을 못 들은 척하는 헬레나. 심지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뭐가 잘못된 건지, 던전을 클리어한 이후로 헬레나와의 사이가 이전보다 서먹해졌다.
아직 원인도 제대로 모르겠지만…이젠 본단에 도착했으니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굳게 마음을 다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헬레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오늘의 기도를 하러 가겠습니다!”
“헬레나 사제님?!”
그리고 내가 앉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호다닥 멀어지는 헬레나.
그 뒷모습을 향해 뻗은 손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멍하니 멈춰 섰다.
살짝 의기소침해진 채로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 카를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카를라아…내가 뭐 잘못했나?”
“으음. 주인님은 아무런 잘못 없으세요. …교단의 신물을 넘겨주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신 것 말고는요.”
“왜? 그거 좀 멋있지 않았어?”
“……주인님은 언제나 멋있으세요!”
어째서인지 일전의 페이랑 비슷한 표정을 짓던 카를라가, 이내 억지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를 얼버무리듯 조심스레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뭐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카를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를 헤집는 감촉이 마음에 들어 그냥 조용히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카를라 테라피를 만끽한 끝에.
덜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