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제 부탁 몇 개만 들어주세요. 그런 조건으로 드리는 거예요.”
“자,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형제님? 부탁이라니 대체 무얼….”
“에잇.”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헬레나의 목에 메달리온을 걸어 주었다.
“자! 이제 드렸으니까 약속한 겁니다?”
“……!!”
캬! 방금 좀 멋있지 않았나?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헬레나는 지인에게 옥 장판을 수십 박스를 강매당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혼자 책상 앞에서 무언가 끄적이는 페이. 그 옆에 의자를 딱 붙이고 앉아서는 작게 투덜거렸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어요.”
“어, 어? 배합 순서는 이게 맞을 텐데…아! 비율에 여유가 없구나? 이래선 약간의 오차에도 실패하겠네. 달빛 가루를 추가해서 반응성을 줄여야…어라? 그럼 처음부터 다시 레시피를 수정해야….”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페이.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그것이 조금 괘씸해 책상 위에 올려진 페이의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며 물었다.
“페이 선배는 제가 더 중요해요? 아니면 일이 더 중요해요?”
“꺄악! 그, 그야 당연히 후배님이지! …흐헷. 이 질문 직접 들어보니 좀 좋네.”
조금 전의 질문에 무슨 로망이라도 있었는지 히죽거리는 페이. 책상에 반쯤 엎드리듯 누워 그런 페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무튼. 제가 조금 전에 말했던 뭔가 잘못됐다는 건 레시피 쪽이 아니에요. 저걸 말하는 거죠.”
고개를 까딱이며 마차의 중앙 부분을 가리켰다.
무슨 공감대라도 형성한 건지 사이좋게 차와 과자를 나눠 마시는 여성진들.
분명 사교도와 관련됐다며 카를라와 엘리샤, 이리스를 꺼리던 헬레나도 같이 섞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만.
“저렇게 사이 좋아졌으면서 왜 저랑은 이전보다 더 어색해진 거죠? 던전에서 좀 멋있었던 것 같은데….”
“아하하…후배님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잘생기고. 돈 많고. 능력 있고. 신의 사랑을 받는 완벽한 남자?”
“…응. 후배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째서인지 페이가 미묘한 표정으로 엎드려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뭔데.
몬가몬가한 기분이라 나 또한 눈앞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살짝 얼굴이 붉어진 페이가 돌연 고개를 숙이고는 작게 속삭였다.
“저기…후배님? 헬레나 사제님과 친해지고 싶은데 잘 안 되서 조금 우울한 거지?”
“우울까진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느낌이죠.”
“그럼. 있잖아. 그게….”
한참을 망설이고서야 말을 잇는 페이.
“헬레나 님은 아니지만, 다른 사제님이랑 친해지는 건 어때?”
“네? 아뇨, 다른 사람은 의미가 없는…읍?”
이제 와서 헬레나만큼 잠재력 있는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려던 순간.
페이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고는,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예를 들면…사제복을 입은 나라던가?”
“헛.”
그러고 보니 사제복을 받아두기만 하고 아직 써먹지 못하고 있었지.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일까. 페이가 내 귀를 입술로 꾹꾹 문대며 연신 유혹해온다.
“후배님도 많이 쌓였잖아?”
“그렇긴 하죠.”
“마침 나도 그런데.”
“…….”
마차에 탄 뒤로는 헬레나의 눈치가 보여 제대로 한 적이 없었지.
아무리 이 마차가 빠르다고 해도 대륙의 중앙에 있는 아카데미와, 동쪽 끝에 있는 광명 교단 본단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이제 며칠 뒤면 도착이지만…그 며칠을 과연 참을 수 있을까.
그냥 오늘 몰래 페이랑 해버릴까?
한쪽으로 기우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페이.
“고해성사…하자?”
“!!!”
그 말이 결정타였다.
인벤토리에서 수녀복을 꺼내 스윽 책상 밑으로 건네자, 페이가 잽싸게 받아들어 자신의 아공간에 집어넣는다.
그제서야 떨어지는 페이의 얼굴.
촉촉한 입술이 휘어지며 특유의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후힛. 오랜만의 독점이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았어.”
“…오늘 다 해보죠.”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
광명 교단이 보내준 마차는 움직이는 집이나 다름없다. 그렇다 보니 굳이 노숙을 피하는 일도 없고.
마차 내부가 어지간한 여관보다 훨씬 좋은데 더해, 온갖 편의용 마도구까지 준비되어 있잖은가.
그런 이유로 오늘도 적당한 가도 주변에 마차를 세우고 밤을 지새우던 도중.
곤히 잠들어있는 일행이 깨지 않도록 숨도 잠시 멈추고, 살금살금 걸어서 마차 밖으로 나왔다.
“후우….”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에 들어차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열리는 마차 문.
끼이익.
“많이 기다렸어 후배님?”
“다들 잠들 때까지 좀 기다리긴 했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는 페이.
그런 페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에이. 뭘 또 시무룩해지고 그러세요. 요즘 페이 선배에게 신경 못 썼으니, 가끔 이런 것도 좋잖아요?”
“응…고마워.”
살포시 미소 짓는 페이.
저번은 이오나, 그 전은 카를라와 엘리샤, 그 전전은 이리스.
페이와 같이 있는 시간은 많았어도 오붓한 시간을 보낸 지는 꽤 오래됐었네.
“일단 좀 걸을까요?”
“그러자. …소리가 안 들리는 곳까지는 가야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페이는 혼자 키득이며 내게 몸을 기대왔다.
상체에 눌리는 페이의 옆 가슴. 그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며 가도에서 살짝 벗어났다.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길을 벗어나자마자 펼쳐진 숲속을 닮은 풍경.
“요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세요 페이 선배?”
“어? 별일이네. 후배님이 그런 것도 물어보고.”
“그야 뭐…저번 결투 이후로 잘 다니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요즘 이런저런 일이 있었잖아요?”
“하긴. 아카데미 전체에 내가 후배님의 여자친구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후배님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으니까.”
“사고라뇨. 다 필요한 일이었다고요.”
“하지만 내겐 사고나 다름없어. 죽을 뻔했잖아?”
그리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긴 한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페이가 자신의 어깨에 두른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긴다.
말랑.
내 손등에 자신의 볼을 부비적대며 말을 잇는 페이.
“그래도 괜찮아. 아무튼 무사히 돌아왔잖아? 덕분에 요즘 들어 나한테 말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더라구.”
“혹시….”
“응. 나한테 후배님을 소개시켜 달라는 사람들이야. 물론, 전부 거절했어. 후배님의 포션을 만들 수 있는 건 나뿐인걸?”
약간 으스대는 듯한 어조.
연금학부니까 포션을 만들어주는 식으로 커넥션을 만들려고 하는 거구먼?
“흐헤…후배님 덕분에 아카데미 생활이 훨씬 편해졌어.”
“오? 혹시 친구라도 생겼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시당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받지는 않아.”
“…….”
뭐랄까. 조금 서글픈데.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챈 페이가 내 손에서 고개를 떼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요즘 사는 게 즐겁다? 후배님도 있고, 후배님 덕에 친해진 동지들도 있잖아.”
“동지요?”
“응. 후배님에게 목줄을 잡힌 동지 말이야.”
자신의 목을 톡톡 두드리더니, 스윽 내 품에서 빠져나가는 페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근처의 큼직한 나무 뒤에 샤샥 숨어버린다.
“페이 선배?”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얼굴과 눌려서 삐져나온 가슴을 빼꼼 내미는 페이.
“이쯤이면 됐겠지. 갈아입을 테니까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후배님.”
“갈아입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안 돼! 그럼 재미가 없잖아?”
“흠. 좋아요. 그 대신 옷만 입은 게 아니라 진짜 사제가 된 것처럼 연기 해주셔야 합니다?”
“…후배님 정말 이런 거에는 진심이구나? 알았어. 한번 노력해볼게.”
감탄과 질림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나무 뒤로 완전히 몸을 숨긴다.
사락. 사라락.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천와 살이 스치는 소리.
생각해 보니 코스프레 같은 건 처음 아닌가?
그리 생각하자 지금 들여오는 소리만으로도, 전신에 흥분과 기대가 차오른다.
페이가 연기하는 수녀는 어떤 느낌일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하며 기다리는 것도 잠시.
“후배님. 거기 있어?”
“네. 여기 있어요.”
“그으…다 갈아입어서 불러봤어. 이제 나갈게?”
약간의 머뭇거림. 곧이어 나무 뒤쪽에서 작은 인영이 폴짝 튀어나왔다.
쭐렁.
가장 먼저 보이는 흔들림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페이의 전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선 머리. 나름 단정하게 보일 생각인지 부스스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정리했다.
앞머리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는지 검은 눈동자의 절반만을 가리고 있었지만.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이 달아오른 피부와 우물거리는 입가.
그 밑을 지나자 목까지 가리는 기다란 옷깃과…어째 평소보다 더 강조된 것 같은 가슴팍이 보였다.
품이 넉넉한 수녀복이건만 페이의 가슴은 그 정도로도 숨길 수 없다는 듯,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올라있었다.
하물며 신축성을 위해서인지 전체적으로 검은 수녀복이었으나, 가슴만큼은 하얀색의 다른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뭐지. 분명 크기 조절 마법이 걸려있다고 했는데….
아, 그건가. 옷 전체의 사이즈가 변할 뿐이지 특정 부위의 사이즈만 변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
수상할 정도로 강조된 가슴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몸에 착 달라붙어 배꼽의 윤곽이 드러난 복부. 그리고 활동성을 위한 옆트임 너머로 비치는 새하얀 맨다리.
경건해야 할 수녀복이나, 어딜 둘러봐도 야한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페이 선배. 이거 원래 안에 뭐 입는 거 아니에요?”
“으응. 그렇긴 한데…어차피 벗을 거잖아? 그래서 그냥 속옷도 안 입었어. 볼래?”
수녀복을 살짝 들추자, 틈새 사이로 보일랑말랑한 페이의 속살.
그 모습에 이성이 반쯤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페이의 뒤에 있는 나무에 손을 짚었다.
쾅!
“힉!”
갑작스런 벽쿵에 놀란 페이가 움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밤중에. 그것도 이런 인적이 드문 곳으로 불러내시다니. 무슨 생각이시죠 페이 사제님?”
“아?”
내가 바로 역할극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페이가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흐흠. 오, 오늘은 그게…얀델 후배…형제님의 평소 행실에 대해 한 마디 해주려고 부른 거야!”
본래의 말투가 반쯤 뒤섞인 기묘한 말투. 이쪽을 힐끔힐끔 올려다보는 페이의 눈빛을 보고 확신했다.
이거 적당히 하기는 힘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