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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02화 (202/230)

뒤에서 헬레나가 잇소리를 냈지만, 한쪽 귀로 흘려내며 슬라임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

“으음.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러게 그러게. 저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이리스와 이오나의 말에 페이가 눈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무슨 장난이라도 치듯 하급 마법을 연사하며 개구쟁이처럼 웃는 얀델.

원래도 자신보다 어렸지만, 그보다도 더 앳된 소년처럼 보이는 미소에 페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그러네요. 후배님은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나 봐요….”

무언가에 홀린 듯, 혹은 감탄한 듯한 페이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던 걸까.

이제 막 중급 마법 하나를 날려 조금 여유가 생긴 카를라와 엘리샤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사이좋게 하하 호호 웃으며 슬라임을 갈아버리는 얀델와 헬레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주인님이랑 놀다니…부러워라….”

“그래도 계획대로 잘 돼 가는 것 같으니 다행이죠.”

입술을 삐쭉 내민 카를라와. 자신의 롤빵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담담히 끄덕이는 엘리샤.

유독 침착한 엘리샤의 반응에 카를라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뭐, 뭔가요 그 표정은. 귀여운 척해도 당신 같은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거든요?! …뭣보다 카를라 당신도 얀델에게 대충 사정을 들었잖아요?”

“주인님이 헬레나 사제님과 친해지려 일부러 어울려줄 거란 말은 들었지만…저건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즐기고 계시는 것 같잖아.”

“…어머?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평소의 수상함이나 위압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산뜻한 미소.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듯한 모습에 엘리샤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맨날 자기를 정의로운 광명의 신자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라고 하더니 이게 뭔지….”

누가 봐도 헬레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만끽하고 있지 않은가.

“굳이 저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라? 어라? 그러면 설마 헬레나 학생도….”

엘리샤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나머지 네명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건 아니에요.””””

“으응? 그, 그래?”

당황한 이오나에게 이리스가 평탄한 가슴을 쭉 내밀며 단언했다.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겠네. 주인은 몰락하지 않으면, 자기 여인으로 들이지 않는 남자라네!”

아무렴. 설마 선신 교단 중에서도 가장 강성한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안 생기겠지?

이리스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적당한 핸디캡을 두니, 헬레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팽팽한 접전을 즐기던 도중.

맹목적으로 달려들기만 하던 슬라임이 일제히 멈칫했다.

즐거운 시간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지. 이제 시작인가.

개체수가 일정 이상으로 줄어들자 위기감을 느낀 슬라임이 하나로 뭉쳐 들었다.

꾸물꾸물.

나나 헬레나가 아닌 서로에게 달려들며 몸집을 부풀리는 녀석들.

“형제님?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는지요? 합체하는 틈을 타 공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로망 없는…아니, 지금 공격하면 더 귀찮아집니다. 저 안쪽을 자세히 봐보세요.”

단순히 체액만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검붉은 핵까지 서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 합일이 완료되질 않아서 각각 별개의 슬라임이 붙어있는 꼴이에요. 지금 공격해봤자 덩치가 약간 작아질 뿐이지 죽이진 못할걸요?”

“그런…눈앞에서 악신이 먹다 뱉은 가래 덩어리 같은 놈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헬레나. 어차피 합체한다 해도 거대 슬라임이 될 뿐이니 쓰러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그럼에도 저렇게 아쉬워하는 건, 본인 말대로 눈앞에 몬스터를 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리라.

한숨만 푹푹 내쉬는 헬레나의 모습에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뭐…저희가 뭘 하든 가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니, 광역 마법으로 한 번에 날려버리면 그만이긴 해요.”

“허어엇! 형제님! 어서 마법을…! 크고 아름다운 마법을 저 부산물 덩어리에게 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제가 내기에서 이기는 건 확정인데 괜찮으세요?”

“내기보다 몬스터를 죽이는 게 더 중요하지요!”

슬라임의 체액으로 끈적해진 헬레나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온다.

음…학기 초였다면 덩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그만이라며 닥돌했을 텐데.

역시 실력도, 자제심도 내가 아는 이맘때의 헬레나보다 많이 성장했다.

역시 H&A 때와 달리 실습 던전에서 한번 습격을 겪었기 때문인 걸까?

자극받으면 더 노력하는 타입이긴 했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다는 듯 움찔거리는 헬레나에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겠어요. 아, 방금 말해놓고 좀 그렇긴 한데…역시 이 녀석은 내기 정산에서 카운트하지 말죠. 그쪽이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요.”

나만 잡을 수 있으니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 아닌가. 이런 건 공정하게 해야지.

짧게 잡았던 스태프를 다시 길게 고쳐잡고 치켜들었다.

슬쩍 카를라 쪽을 보니 진작에 정리를 끝내고 노닥거리고 있더라. 즉, 이 녀석을 쓰러뜨리면 그걸로 클리어란 소리.

마지막이니 조금 성대하게 터뜨리는 것도 좋겠지.

두근.

지금껏 제한하고 있던 마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리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

이에 호응하듯 주변의 마력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의로운 분노. 고결한 선의. 그대는 저 하늘의 태양과도 같으니.』”

헬레나가 좋아할 법한 광속성 마법. 심지어 주문도 일부러 종교적인 색채를 살짝 섞었다.

이거라면 분명 헬레나의 마음에도 쏙 들 터.

막대한 마력이 움직이며 자연스레 나를 중심으로 바람이 회오리친다. 흩날리는 옷자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는 최대한 멋있는 목소리로 내가 아는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를 읊조렸다.

“『빛이 있으라. 샤이닝 저지먼트.』”

시동어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슬라임의 위로 빛의 실선이 반짝이며 명멸한다. 그리고.

화아아아아——!!

그 실선을 따라 솟아오르는 거대한 빛의 기둥.

던전 전체가 밝아진 것 같은 압도적인 광량에 헬레나의 입이 떡 벌어진다.

음.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사실…샤이닝 저지먼트는 그닥 자주 쓰이는 마법이 아니다.

위력도 좋고, 빛 속성이라는 그 자체로 여러 전장에서 상성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마나 소모가 너무 크거든.

어느 정도냐면 같은 중급 빛 마법인 스타 라이트 레인의 약 2.5배나 되는 마나를 소모한다.

스타 라이트 레인이 잡몹 처리에 특화된 마법이라 비교적 마력을 적게 잡아먹는다지만, 그래도 2.5배는 너무했지.

하지만 이 마법에도 장점은 있었으니. 바로 대규모 전투에서 샤이닝 저지먼트로 선빵을 날리면 아군의 사기가 확 증가한다는 점이다.

대충 빛이 함께하는 기분이 든다니 뭐니 하는 설정이었는데…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네.

그냥 오지게 멋있다는 뜻이잖아.

헬레나의 옆에서 같이 헤벌레 입 벌리고 빛의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내가 만든 마법이고, 태양신의 가호로 25%의 보너스를 받았다는 걸 알지만…그럼에도 경외심이 차오르는 광경.

내가 강해지긴 했구나.

이제 막 중위 마법사에 올라 사용하는 중급 마법이 이 정도라니.

여기에 원소 조합까지 섞으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이런 기분 좋은 상상은 우리 앞에 던전 클리어를 알리는 게이트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됐다.

***

띠링!

“응?”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뒤. 아직 빛무리의 형태로 둥둥 떠다니는 보상을 건드리지도 않았건만 알림이 떠올랐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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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클리어!】

당신은 꽁꽁 숨겨져있던 던전을 클리어 했습니다!

실로 바람직한 행보!

정의로운 광명이 당신의 주문을 듣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기뻐합니다.

다른 신들이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당신을 축복합니다.

특성: 만신의 가호(B)가 약간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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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가.

던전을 클리어하거나 사교도를 토벌하는 식으로 조금씩 성장시킬 수 있는 성장형 가호.

이런 별거 아닌 던전 하나로는 이렇다 할 성장도 없겠지.

허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금씩 클리어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장하겠지.

이번에도 정의로운 광명이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지금은 던전의 보상이다. 여기 보상은 난이도에 비해 꽤 괜찮은 아이템이거든.

선행 퀘스트가 귀찮아서 그런 거려나?

“읏차.”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빛 덩어리에 손을 뻗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허공에서 만져지는 단단한 느낌.

천천히 사그라드는 빛이 완전히 꺼지자, 내 손에는 큼직한 메달리온이 하나 잡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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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하는 사자 메달리온】

포효하는 사자 형태로 조각된 큼직한 메달리온.

오랜 시간 방치되어 본래의 광휘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다.

닿은 이를 안심시키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옅은 핏자국은 누구의 흔적일까.

기억하라.

가장 절박한 순간. 사람은 무언가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설령 그것이 닿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신성력 충전 가능(현재 잔량 1%)

-체력이 5% 미만으로 떨어졌을 경우, 자동으로 충전된 신성력을 소모하여 착용자 치유

-신성력 효율 10% 상승

-일주일에 한 번. 충전되어있는 모든 신성력을 단번에 방출하여 신성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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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가 성기사나 전투 사제였으면 빛나는 사자 단검만큼이나 초반에 애용했을 성능.

생존력을 보조해주는 건 물론, 성직자에게 부족한 공격력을 신성 폭발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잘 만들어진 장비다.

아쉽게도 나중에 가면 포션 살 돈도 충분해지고, 성직자답게 치유 신성술에 능해져 효용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신성 폭발은 쓸만하지만…신성력 충전 한도가 애매해 어느 순간 부터는 잘 써먹지 않게 되더라.

뭐, 무기도 아닌 장신구니 중반까지는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다.

신성력 효율을 올려주는 장비 자체가 워낙 귀하기도 하고.

내 기억 속 모습과 성능 그대로인 메달리온의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아? 아아…?”

몸을 벌벌 떨면서 내 손에 들린 메달리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헬레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것도 정의로운 광명의 신물 중 하나거든.

“혀, 형제님? 이건….”

“드릴게요.”

“…네?”

내가 자신에게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헬레나.

이 메달리온이 괜찮은 장비인 건 사실이나, 우리에겐 전혀 쓸모없는 장비다.

회복? 포션이 넘쳐나는데 굳이? 신성 폭발? 화력은 마법이 최고 아니겠는가.

조금 전에 말했던 비효율 구간에 돌입한 터라 굳이 탐낼 필요 없는 장비다.

무엇보다 신성력 충전식인데 이걸 매번 충전하러 누군가에게 부탁하러 가는 것도 귀찮고, 신성력 효율도 마법사만 있는 우리에겐 의미 없는 옵션이다.

어찌 됐건 신물이긴 하니 이걸 거래 대상으로 쓰면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서 뭔가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누구?

정의로운 광명의 예비 사도(아님).

교단과의 우호도는 이미 최대치다. 어지간한 부탁은 그냥 들어줄 텐데 굳이 신물로 거래까지 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이 메달리온을 잘 사용할 수 있고, 언젠가 파티원으로 모집하기 위해 점찍어둔 헬레나에게 주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나한테 박힌 안 좋은 이미지도 겸사겸사 뭉갤 수 있으면 더 좋고.

“아, 으, 어어…제가. 그게.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그치만 신물…으아….”

“뭘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세요. 그냥 주는 거 아니거든요?”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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