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던전의 위험성은 웨이브형이라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가끔 몰려있던 몬스터가 한 번에 던전에 갇힌 경우에 만들어지는 유형.
다른 던전에 비하면 몬스터 하나하나의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개체수는 몇 배나 되며.
던전에 누군가 입장하는 즉시 눈치채고 일제히 공격해 온다.
하지만 여긴 범위 공격과 대량 살상이라면 도가 튼 마법사 파티.
아무리 머리수가 많아도 수준 이하의 상대라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껏 배운 것들을 시험해보기 딱 좋은 움직이는 표적 같은 것들이지.
검붉은 파도가 되어 다가오는 슬라임들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었다.
“뒤쪽은 저희보다 강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눈앞의 적에만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돌진은 언제 하면 되는지요?”
“저 마법사예요. 돌진 같은 건 안 합니다.”
“아앗, 그랬죠…죄송합니다….”
티나 날 정도로 시무룩해진 헬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법사치고 칼질은 자주 했던 것 같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은 이오나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얀델 학생! 얀델 학생! 어차피 나랑 이리스가 지켜보고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날뛰어도 괜찮아! 그리고…이번에 나한테 배운 걸 시험해 보기 딱 좋은 환경이잖아?”
“허?”
확실히. 이 녀석들은 움직임도 비교적 굼뜨고, 공격력도 내 실드를 뚫을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지금은 헬레나의 신성술 보조까지 받고 있잖은가.
웨이브 마지막에 나오는 초대형 슬라임이 아닌 이상 위험할 일은 없다.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도 중급 마법 몇 번 써보고 난 뒤에 해볼게요.”
“응응. 그것도 실전 경험이 필요하긴 했지. 어차피 몬스터는 많으니까 편할 대로 해!”
어깨를 으쓱이며 헬레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됐으니 멀리서 마법 몇 번 쏜 뒤에는 같이 돌진하죠.”
“…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벌써부터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이 상당히 기대되는 모양이다.
순수하다면 순순한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아직도 통통 튀어오는 중인 슬라임을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기왕이면 안 써본 마법을 쓰는 게 좋겠지.
두근.
마력을 끌어올리자 자연스레 반응하는 심장. 내게만 들리는 묵직한 박동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진다.
대기 중의 마나가 호응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폭군의 숨결. 휘몰아치는 맹위. 난도질하는 예리함. 청컨데 내게 재액을 내려주소서.』”
우우웅-
입에서 튀어나온 말 하나하나가 선언이 되며 세상에 새겨진다.
체내의 마력과 대기의 마력이 한데 뒤섞이며, 내 의지에 담긴 형상을 취한다.
이미지화하는 것은 소용돌이치는 칼바람.
“『샤프니스 허리케인.』”
시동어를 읊은 뒤에도 잠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잔뜩 흥분했던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돌연 슬라임 무리의 중앙부가 불쑥 솟아올랐다.
후우웅-
그리고 평온했던 바람이 순식간에 거칠어지며 솟아오른 부위를 향해 집약되기 시작했다.
슬라임 몇 마리를 들썩이게 할 뿐이던 바람은 주변의 바람을 집어삼키며 점점 몸집을 부풀려갔다.
산들바람은 돌개바람으로, 돌개바람은 칼바람으로.
그리고 칼바람은 회오리치며 작은 폭풍이 되었다.
콰아아아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알 수 있는 무시무시한 위용.
일대의 모든 슬라임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닿는 모든 것을 잘게 갈아버리는 무자비한 마법이 펼쳐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지는 광경에 울컥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래. 이게 마법이지.
시바 이게 마법이라고….
한 번에 적을 쓸어버리는 이 느낌을 위해 마법사를 키우는 거란 말이다.
지금껏 써온 하급 마법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원소 조합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에 감동하는 것도 잠시.
어째서인지 옆에 있던 헬레나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헬레나 사제님.”
“휴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란 말이지.
콰아아-
저 멀리에서부터 용솟음치는 회오리. 일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며, 닿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마법인 샤프니스 허리케인이다.
마치 낙서 가득한 공책에 지우개를 문대듯, 빽빽하게 모여있던 슬라임을 지워버리는 듯한 광경에 절로 속이 시원해진다.
그래…이게 마법이지.
은근슬쩍 스태프를 겨누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려 했으나.
“…형제님?”
귀신같이 눈치챈 헬레나 때문에 다시 팔을 내려야 했다.
“어이구…오늘따라 왜 이리 팔이 아프지….”
“제가 힐을 걸어드리겠습니다.”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헬레나가 물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음…아뇨. 저는 조금 준비할 게 있어서 먼저 가세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걸리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따라오시지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헬레나. 묵직한 메이스를 한 손에. 다른 손에는 두꺼운 성서를 든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타다닷.
하나로 땋은 금발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펑퍼짐하던 수녀복은 풍압 덕에 몸에 딱 달라붙는다. 그리고.
몸에 두른 신성술을 믿고 그대로 슬라임 무리에 몸을 들이박았다.
콰앙!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요란한 굉음. 그렇게 슬라임 사이에 파고든 헬레나가 메이스를 휘두르자.
퍼엉!
이번엔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단번에 터져나가는 슬라임들.
분명 물리 공격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놈들이건만, 그 이상의 힘에 분쇄 당하는 느낌이다.
중심부에서 빛나는 핵은 메이스에 직접 닿지도 않았음에도 풍압에 부서지고 있었고.
그야말로 압도적인 유린.
원래 이 시점의 헬레나가 이렇게 강했던가…?
아무리 슬라임 상대라도 너무 잘 싸우는 것 같은데.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슬라임 체액에 젖은 헬레나가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그걸로 됐지.
피식 웃으며 슬슬 이쪽에서도 끼어들 준비를 했다.
“스읍….”
한껏 들이마신 공기. 부풀어 오른 폐. 그 가운데에 위치한 심장에 정신을 집중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두근.
코어에서 뿜어진 마력이 마나 회로로 뻗어나가는 대신 무겁게 가라앉는다.
바로 밑에 있는 심장을 향해 고이는 마력. 그렇게 심장이 완전히 마력에 물들고 심장을 지나는 피에 마력이 깃들 무렵.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흐르는 불꽃. 꺼지지 않는 용광로. 순환하라 블러드 포스.”
화아악!
시동어를 읊는 것과 동시에 피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장을 시작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열기가 전신을 가득 채우자, 들끓기 시작하는 활력.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터라 신체 능력 중에서도 지구력만 강화된 상태.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본 스탯 자체가 훌쩍 성장한 데다가, 헬레나의 버프도 받지 않았는가.
거기에 상대는 기껏해야 슬라임. 지금도 오버 스펙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목을 좌우로 가볍게 꺾어 풀어준 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 그럼 가볼까.”
가볍게 땅을 박찼는데도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
점점 가까워지는 슬라임 무리를 보며 일단 스태프를 겨누었다.
어디 보자…무슨 마법이 좋을까.
화력이 강한 마법을 제외하면 역시 연사력이 좋은 마법이려나?
헬레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으니 가급적 광속성 마법으로 써야지.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게 하나 있었다.
스태프를 짧게 고쳐잡고 재차 마력을 끌어올렸다.
“빛이여. 가장 어두운 곳까지 비추는 빛이여. 끊임없이 꿰뚫으라. 광탄 연사.”
우웅.
짧은 공명음과 함게 스태프 위로 솟아오르는 구체의 빛.
다만 평범한 광탄처럼 한 번에 여러 개가 난잡하게 늘어선 것이 아니라, 순번을 기다리듯 반듯하게 일자로 정렬해있다.
마법이 등급 별로 나뉘어있긴 하지만, 딱 잘라 어느 등급이라 하기에 애매한 마법도 꽤 많다.
광탄 연사 또한 그중 하나.
누군가 평범한 하급 마법인 광탄을 단발성 마법에서 지속성 마법으로 개량한 것으로.
술자가 시전을 취소하기 전까지 자동으로 마나를 뽑아내 광탄을 발사하는 마법이다.
위력은 그저 하급 마법을 여럿 날릴 뿐이지만, 자동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난이도는 중급 마법보다 조금 못한 수준.
그렇기에 학문적으로라면 모를까 실전성은 떨어지는 마법이나….
H&A의 할 일 없는 고인물들은 이걸로 자체 컨텐츠를 만들어냈다.
“판타지 RPG에서 FPS라니. 이건 못 참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슬라임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그대로 발사한다.
슈웅…파앙!
빠르게 날아간 광탄이 조준한 슬라임의 핵을 지져버리는 것은 물론, 그대로 체액을 단번에 증발시킨다.
예상보다 강한 위력. 태양신의 가호가 성장해서 그런 거겠지. 10% 강화와 25% 강화에는 그만한 차이가 있으니까.
물론, 쏘는 맛이 있어서 지금은 오히려 좋지만.
“흐읍!”
숨을 잠시 멈추고 빠르게 광탄 3발을 쏘아낸다.
팡! 팡! 팡!
2발은 핵을 정확히 관통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조금 빗맞았다.
잽싸게 달려가 노출된 핵을 단검으로 찌르고는 지면 채로 슬라임을 으깨버리는 중인 헬레나의 옆에 섰다.
“광명 맙소사! 형제님! 대체 그 마법은 뭡니까! 너무 멋있습니다!”
“…허어. 이 간지를 알아주시는 겁니까 헬레나 님?”
“예에! 물론이지요. 하나씩 조준해서 몰려오는 몬스터를 맞추는 게 참 재밌을 것 같습니다.”
“크으…그렇죠! 이게 평범한 마법이랑은 또 다른 맛이 있거든요?”
좀비 게임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큰 거 한방도 좋지만, 마구 쏴 재끼는 것도 시원하단 말이지.
이후로도 주변의 슬라임을 닥치는 대로 터뜨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내가 자랑하고 헬레나가 부러워하는 내용이었지만.
…좀 재밌네 이거.
언제나 열세에 몰린 채로 싸워야 했던 최근의 전투와는 달리, 압도적 우위에 서서 하는 싸움이다.
말 그대로 사냥에 가까운 전투. 흥미 위주의 마법. 거기에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상대까지.
위험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이 즐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지구에서 게임 하던 그 느낌 그대로 말이다.
팡! 팡! 팡!
같은 장소를 연달아 사격해 길을 만들고는, 발치의 슬라임을 잘근잘근 밟고 있던 헬레나에게 제안했다.
“헬레나 님.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내기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연사 속도는 적당히 조절할 테니까요.”
“그건…재밌겠네요! 좋습니다 형제님. 그나저나 내기라면 거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그러네요. 제가 이기면 본단에 가서도 헬레나 님이 저희를 안내해주시겠어요?”
“좋습니다. 대신 제가 이기면 형제님은 앞으로 본단에 도착할 때까지 저랑 같이 예배드리는 겁니다?”
“엇.”
그거 좀 귀찮아 보이는데.
하지만 뭐…이기면 그만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그리 말하고는 기습적으로 뛰쳐나가며 사방에 광탄을 흩뿌렸다.
“아앗! 비겁합니다 형제님! 갑자기 혼자 달려 나가시다니!”
“비겁한 게 아니라 전략적인 거죠! 그럼 먼저 갑니다!”
“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