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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00화 (200/230)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가린 헬레나가 멈칫한다. …이 반응은 조금 상처인데.

애써 시무룩함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이 근방에 던전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순간 딱딱하게 굳은 헬레나의 얼굴이 확 가까워지며 자세한 정보를 요구해왔다.

“어느 쪽으로 가면 되죠? 규모는? 저희끼리 공략이 가능한지요? 아, 타입은 어떻게 되나요? 근처에 사교도들은 있나요? 정보가 부족하다면 가까운 교회에서 지원군을 부를까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잠깐. 잠시만요. 너무 빠르잖습니까. 천천히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앗…제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형제님.”

그리 말하고는 허리춤에 달린 메이스를 쓰다듬으며 심호흡하는 헬레나.

점차 가라앉는 호흡이 정상보다 조금 느려지자,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교단의 지원이 필요하신가요?”

“아뇨. 저희끼리 해결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럼 어서 가죠. 위치는 어디인지요?”

“잠시만요.”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지도를 꺼내, 손가락으로 한 지점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이쯤입니다. 좀 더 길 따라가다 보면 작은 폭포가 나오니, 거기서부터 조사해보죠.”

“알겠습니다. 그리 마부에게 전달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마부가 있는 창문 쪽으로 향하는 헬레나.

내가 뭐라 말 걸어야 할지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다.

“으음…헬레나 사제님? 제가 말 꺼내놓고 뭐라 하긴 좀 그런데, 믿어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정의로운 광명께서 형제님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큰 가호를 내렸을 리 없으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제가 지금껏 지켜봐 온 형제님을 믿습니다. 사생활은 둘째 치고, 이런 일로 장난치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감…사합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믿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좀 멋쩍네.

***

“이오나 쥬금.”

“아니, 왜 이렇게 빌빌거리세요 교수님.”

말했던 대로 폭포 앞에 멈춰 선 마차. 하나둘 바깥으로 나가서 던전 탐색의 준비를 하는데, 오직 이오나만이 축 늘어져 내게 몸을 기대온다.

“으앙 쥬금!”

“저야 시원해서 좋긴 한데….”

이오나 특유의 서늘한 체온을 느끼던 도중. 밀착해있던 이오나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있잖아 있잖아. 그거 하자. 그거.”

“그게 뭔데요…?”

“그건 그거지! 조금 아프지만 금세 기분 좋아지는 거!”

“설명만 들으면 누가 오해하기 딱 좋겠네! 흡혈 말씀하시는 거죠? 잠시만요.”

매일 아침마다 조금씩 마시는 게 일과가 됐는데 오늘치는 아직이었다.

이오나가 힘쓸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그래도 일단 던전에 가는 거니 든든히 먹여야지.

상의를 살짝 잡아당기며 이오나를 향해 목을 내밀었다.

“잘 먹을게 잘 먹을게!”

으득.

단번에 내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는 꿀꺽꿀꺽 피를 삼키는 이오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열락을 억누르며 이오나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단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치 피를 마신 이오나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스윽 입가를 닦았다.

“후…이게 야스지.”

“야스가 아니라 식사겠죠.”

피식 웃으며 목덜미의 상처를 잠시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물었다.

그 모습을 본 헬레나가 황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형제님? 방금 그건 혹시….”

“지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해가 떠 있다면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낫더라고요.”

“아아…!”

헬레나 본인에게도 태양신의 가호로 얻은 재생력이 있겠지만…나는 가호의 랭크가 한 단계 높기도 하고, 만신의 가호로 한 번 더 뻥튀기된 상태다.

방금 건 헬레나에게도 신기했나 보네.

어깨를 으쓱이고는 눈앞의 폭포를 바라보았다.

높이는 한 3m쯤 되려나. 유량도 그리 대단치 않고, 밑에 고인 연못도 상당히 얕다.

그나마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물이 굉장히 맑다는 점이려나?

하지만 이렇다 할 공해가 없는 에우렐리아 대륙이다 보니, 이마저도 찾으려면 얼마든 찾을 수 있는 수준이다.

즉, 굳이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만한 가치가 없는 장소라는 소리.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금세 이상한 부분을 알아챌 수 있다.

쏴아아-

딱 듣기 좋은 정도로 시끄러운 폭포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형상이 조금 특이하다.

중간쯤에서 부자연스럽게 휘어지는 물길이 마치 커튼 너머로 여인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비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약간의 왜곡이지만, 한번 눈치채면 헷갈릴 수 없는 확실한 이상 현상.

던전 입구의 게이트가 일으키는 일그러짐이 그 원인이다. 하필 여인처럼 보이는 건 단순한 우연이고.

대부분의 던전이 그러하듯 이곳 또한 연계 퀘스트를 통해서 찾아내는 곳이다.

이 길을 자주 돌아다니는 행상인과 용병 사이에 떠도는 소문인 폭포 속 여인에 관한 퀘스트를 깨야 하는데….

눈썰미가 좋은 유저는 폭포의 그래픽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선행 퀘스트 없이 던전을 발견하기도 했다.

던전의 난이도가 낮아서 다행이다. 만약 어려운 곳이었다면, 뉴비들에게는 즉사 트랩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을 테니까.

이제는 꽤 그리워진 옛날 기억을 떠올리며 손을 뻗었다.

“저기. 중앙을 한번 살펴보시겠어요 헬레나 사제님?.”

“…확실히. 이제 보니 좀 이상하군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사실 다른 여인들에게는 사전에 어디에 있고, 어떤 던전인지 미리 설명해뒀기에 여기서 가장 긴장한 사람은 헬레나다.

그런 헬레나에게 방긋 웃어주며 옆에서 알짱거리던 이리스와 이오나를 기습적으로 잡아당겼다.

“주, 주인이여?”

“으응? 얀델 학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둘.

“보세요. 여긴 상위 마법사가 둘이나 있어요. 저기에 뭐가 있건 위험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 대충 눈치챈 이리스가 납작한 가슴을 쭉 펴며, 짐짓 믿음직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엣흠. 주인 말대로네. 갑자기 초 거대 형 몬스터라도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문제 될 건 없네.”

“맞아 맞아. 그리고 얀델 학생이 말했잖아? 우리끼리라도 괜찮다고. 그럼 그런 거겠지!”

뒤이어 이오나도 그리 말했지만 어째 헬레나의 표정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슬쩍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헬레나 사제님…? 괜찮으신가요?”

“앗, 네에. 저는 괜찮습니다. 긴장했다거나 겁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형제님. 그저….”

“그저?”

“이제부터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박멸시킬 생각을 하니, 떨림이 멈추질 않는 것뿐이니까요.”

“…….”

그리 말하는 헬레나의 목소리는 약간 촉촉했으며, 얼굴은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금색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흥분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재차 다짐했다.

절대 정의로운 광명의 사도는 하지 말아야지.

평생을 저런 사람들 사이에서, 저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진 않으니까.

이리스와 이오나의 도움을 받아 단번에 날아서 도착한 폭포 중턱.

엘리샤가 물길을 가르자 그 너머에 숨어있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헬레나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던전을 공략해보기는 처음입니다 형제님.”

“그런가요? 정의로운 광명의 사제시니 많이 싸워보셨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예에. 많이 죽여보긴 했습니다만, 전부 일전에 함께했던 실습 던전처럼 관리되는 던전이었습니다.”

“아하?”

던전은 돈이 된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던전은 해당 영지의 주인이 관리하며, 내부에서 몬스터 소재나 희귀 자원을 채취해 수익을 올린다.

그런 안이한 마음가짐 덕에 나중에 사교도들이 일제히 던전을 폭주시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지만….

아무튼 지금의 던전은 광산이나 다름없는 취급이다.

당연히 이런 던전은 공략해서 클리어하면 안 된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너구리의 배를 가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잖은가.

정말 위험한 던전이 아닌 이상, 영주 측에서 일정 이상 깊숙한 곳에는 출입하지 못하게 관리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헬레나가 공략자를 모집하는 위험한 던전에 들어갈 실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뭐, 던전 공략이라고 해도 별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아니,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아앗…차분하게…네. 알고 있습니다.”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는 헬레나.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이리스와 이오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들어가죠.”

천천히 가까워지는 게이트. 푸른 입자의 소용돌이 같은 곳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풍경이 뒤틀리더니 그대로 일변한다.

분명 몇 미터 떠 있는 공중이었건만, 발바닥에 선명히 닿는 대지의 감촉. 시끄러운 폭포 소리도, 물이 부서져 피부에 차게 달라붙는 감각도 사라졌다.

그 대신이라는 듯, 눈 앞에 펼쳐진 탁 트인 초원.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장애물이 없는 지형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스레 무기를 꺼내는 여인들. 나 또한 단검과 철제 스태프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예상대로네. 타입은 웨이브형. 몬스터는 슬라임. 평범한 산성 슬라임이지만 나중에는 서로 합체하니까 조심해.”

“네! 주인님!”

“이쪽은 맡겨주시길.”

고개를 끄덕이며 싸울 준비를 하는 카를라와 엘리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 생각한 걸까. 이리스와 이오나는 느긋하게 중앙에 버티고 섰다.

전투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끼어들지 않으리라.

전투력이 떨어지는 페이는 그 둘 사이에 숨어서 작게 손을 흔드는 중이고.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갖추는 우리의 모습에 헬레나가 당황스럽다는 눈을 깜빡였다.

“저어…형제님? 혹시 이 던전에 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직접 와본 건 처음입니다. 저도 정보로만 알고 있던 거라…아, 헬레나 사제님은 제 옆에 서주세요. 이제 곧 몬스터가 몰려올 겁니다.”

“앗, 네.”

그래도 던전이라 그런지 말은 잘 듣는 헬레나가 내 옆에 서서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이 단순히 손질을 잘했다기보다는 무언가 특별한 힘이 깃든 느낌이다.

어쩐지 기도할 때도 메이스를 들고 다니더니…매일 축성하고 있었나 보다.

메이스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가볍게 어깨를 푼 헬레나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보라면…역시 응시하는 아일라를 쓰러뜨린 뒤에 형제님을 데려간 분들인지요?”

“음…그 자리에는 광명 교단 분들이 지원군으로 오셨으니 헬레나 님도 대충 아시겠죠. 맞습니다. 거기서 얻은 정보입니다.”

“자꾸 캐묻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형제님에 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마음에 그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서로 좀 친해지자고 방학 때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거잖아요?”

“후후. 그것도 그러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하고…지금은 우선 버프부터 걸어 드리겠습니다.”

슬금슬금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점액 덩어리를 노려보며 헬레나가 기도문을 읊었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빛. 던전 실습 때보다는 성장한 것인지 개인 버프가 아닌 광범위 하게 펼쳐지는 단체 버프다.

“오….”

우선은 평범한 신체 강화인가. 여기에 마법이나 오러를 이용해 중첩 강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성술의 장점이기도 하다.

신성술은 말이 신체 강화지, 근본적으로는 신이 대신 힘 써주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꾸르륵. 꾸륵.

초원…이었던 땅에서 슬슬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슬라임들.

인간을 닮은 것, 짐승을 닮은 것, 단순한 덩어리 같은 것.

제각각 다른 형태를 취한 슬라임이었으나, 저들에게도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바로 반투명한 몸체 어딘가에 검붉은 핵이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놈들의 핵이 빛나며 체액도 검붉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헬레나의 두 번째 버프가 발동되었다.

“…주의 성채가 이곳에 임하리라!”

전신을 휘감는 은은한 광휘. 물리 공격을 흡수하는 데 특화된 버프인 빛의 성채다.

이렇다 할 마법적 능력이 없는 일반 슬라임 상대로는 이게 최고긴 하지.

몸이 산성이면 뭐하나. 직접 몸을 부딪쳐야 하는 데다가, 가진 힘이 그리 강하지도 않은 것을.

콩! 콩! 콩!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슬라임들.

크기는 기껏해야 무릎까지 오는 정도려나. 정도 이상의 물리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긴 해도, 저 정도로 작으면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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