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윽.
허무하게 허공을 가로지른 내 손 위로 이리스의 자그마한 손이 겹쳐진다.
“…이해하네.”
동지를 보는 듯한 따뜻한 미소였다.
“아니, 이해하지 말고 해결책을 달라고.”
그리고 이리스 너는 실제로 자주 응애 거리니까 자업자득이잖아.
“그러니까…저보고 다른 여자를 꼬실 방법을 알려 달라는 건가요 당신?”
이오나에게 한창 시달린 후. 엘리샤에게 상담을 요청했더니, 이런 날 선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냥 헬레나 사제님과 나 사이에 쌓인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물어본 거잖아.”
“딱히 오해랄 것도 없지 않나요? 전부 사실인 것을.”
“그렇긴 한데….”
코스프레 야스용으로 수녀복을 달라고 한다거나, 교내에서 몰래 야스 한다거나, 이젠 노예를 가스라이팅 해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든다거나.
전부 사실 비스무리한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 이대로는 좀 그렇잖아.”
“글쎄요. 저는 지금이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누가 봐도 인간 말종인데?”
“하지만 누구보다도 짙은 가호를 받고 있죠. 이만한 결점도 없었다면, 지금쯤 찰싹 달라붙어 당신을 숭배하고 있었을걸요?”
“가능성이…있어!”
신이 실존하는 세상답게, 대부분의 성직자는 광신도다. 그리고 정의로운 광명의 신도는 그중에서도 한층 더 맛이 간 사람들만 모였고.
그런데 떡하니 눈앞에 모시는 신의 사도(예비)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난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정의로운 광명 교단을 집어삼킬 수 있다.
사도직을 수락하면 아예 교황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대로는 안 돼.”
“흐응. 뭐, 도와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 전에 우선…아시죠?”
“당연하지.”
쪽.
가볍게 엘리샤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런데 어째 엘리샤의 표정이 미묘하다.
“…이거 아냐?”
“저한테 배울 차례라는 말을 하려 했답니다? 저도 얀델 당신에게 물어볼 게 많기도 하고요.”
“…….”
평소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엘리샤였으나, 내가 중위 마법사에 오른 뒤로는 한층 더 열을 내고 있었다.
특히 중위 마법을 처음 쓸 때의 감각이나 이미지에 관해 많이 물어보는데…H&A때 질리게 본 이펙트라 뇌리에 선명히 박혀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결국 추상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었고, 그 탓에 엘리샤는 틈만 나면 나를 불러 이것저것 캐묻는 게 요즘 일상이다.
“흠흠. 알고 있었어. 그냥 해보고 싶어서 한 거야.”
“어머?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걸로 치죠.”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키득이는 엘리샤.
괜한 뻘쭘함에 뒤통수만 긁적이고 있자니, 엘리샤의 파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래서? 어느 쪽부터 먼저 하시겠나요?”
“으음…영창 단축부터 순서대로 하자.”
“그러죠.”
자신이 걸터앉은 침대 옆을 툭툭 두드리는 엘리샤.
카를라는 이오나와 함께 얀델 육성 계획인가 뭔가를 세우는 중이고, 이리스는 페이와 함께 인챈트와 연금술의 교집합에 관해 토론하는 중이다.
헬레나는 자신의 메이스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그 솜씨가 몇 년은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 용병마냥 능숙하기 그지없다.
이게 성직자…?
아무튼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나와 엘리샤만 따로 노는 상황.
엘리샤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창 무언가 메모하던 수첩을 집어넣고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말하는 걸 잊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당신.”
“뭐가?”
“저를 배려해서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줬잖아요? 영창 단축이 제 전문 분야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스승님이나 이오나 교수님에게 비할 바는 아니니까요.”
“으음.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네.”
“에?”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샤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와닿는 여리여리한 목덜미의 감촉. 그 중앙에 새겨진 노예각인을 가볍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
“분명 이리스랑 이오나가 훨씬 잘 가르쳐주겠지. 하지만 그건 엘리샤 네가 추구하는 방식과는 다르잖아?”
“그야 뭐…그렇죠?”
목울대를 제압당한 탓인지 조금 뻣뻣한 자세로 긍정하는 엘리샤.
“카를라야 영창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늘려서 위력을 높이는 쪽을 선호하겠죠.”
“응. 실제로 내가 카를라에게 배우는 대부분이 화력을 높이는 방법이야.”
“스승님은 정석적인 영창 단축을 선호하세요. 엘리멘투스 코어의 원소 그림자를 더욱 짙게 각인시킨다거나, 반복된 사용으로 이미지를 명확히 새긴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엘프 기준으로 정석이긴 하지.”
“이오나 교수님은…뱀파이어이기에 가능한 방식이죠. 영창을 생략하느라 위력을 포기했건만, 이를 다시 혈마법으로 증폭시키니까요.”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로 전투력을 한단계 높게 봐야 할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저는….”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정도는 아닌지 정작 자신의 차례가 되자,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는 엘리샤.
그런 엘리샤의 목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끌어올려 턱을 받쳐 올렸다.
강제로 시선을 마주한 채, 엘리샤가 했어야 하는 말을 대신했다.
“엘리샤 너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길을 추구하고 있지. 마법과 마법의 연계를 극한까지 추구하고 있어. 영창 단축은 그 중간 단계에 불과하고.”
“당신…어떻게 그걸…?”
눈을 땡그랗게 뜬 엘리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미 엘리샤의 완성형을 알고 있으니까.
아무렴. H&A의 타이틀 마법사인데 당연히 잘 기억하고 있지.
“원소 마법은 직관적이야.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루는 마법이니 당연하지. 그리고 이 세계는 언제나 순환하고 있어.”
사계절. 낮과 밤. 생로병사. 국가의 흥망성쇠. 물의 순환.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끊임없이 순환한다.
엘리샤는 원소 마법이 세상을 이루는 요소를 다루는 마법이라면, 자연의 순환 또한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불이 타오르고 남은 재에서 새 생명이 피어오르듯, 그렇게 자란 얇은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듯, 바람이 먹구름을 몰고 와 비를 쏟아내듯.”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세상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듯.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그저 오롯이 존재하는 거대한 순환. 가장 자연을 닮은 마법. 그렇기에 가장 엘프다운 마법.”
끝까지 키운 엘리샤는 걸어 다니는 천재지변이었다.
한 호흡에 폭풍을 불러오고, 걸음걸음마다 지진을 일으키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불기둥을 피워낸다.
먼 옛날, 아직 엘프가 정령과 함께하던 시절.
당대의 정점이라던 4대 정령왕을 한데 모아둔 것 같은 모습에 얼마나 감탄했던가.
마탑이 무너지고, 스승을 잃은 뒤에도 끊임없이 나아가 기어이 비원을 움켜쥔 위대한 대마법사.
“그게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이라면…장담컨데 엘리샤 네 영창 단축은 다른 누구의 것보다도 가치 있는 비전이 될 거야.”
물론 엘리멘투스 코어가 없는 내가 엘리샤의 비전을 완전히 익히는 건 불가능하겠지.
허나, 어찌 됐건 대마법사에 이르는 깨달음이다. 지금 당장은 미완성이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건 배려도 뭣도 아냐. 그냥 적재적소로 부려 먹는 거라고.”
“…….”
아연해하는 엘리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노예로 있는 한, 엘리샤 네 몸도 마음도 심지어 깨달음마저 내 거라고? 그러니 잔말 말고 어서 지금까지 연구한 거나 가르쳐……으븝?”
말하던 도중 틀어막힌 입술.
부드러운 감촉과 나무를 닮은 향기. 그리고 순식간에 입안을 파고드는 말랑한 감촉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난데없이 엘리샤에게 키스 당했다. 그것도 상당히 찐하게.
입 안에서 프리덤하고 저스티스하고 데스티니하게 뛰노는 혓바닥에 당황한 것도 잠시.
숨이 막힐 때쯤이 되자 고개를 떨어뜨린 엘리샤가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호호! 얀델 당신이 저를 그렇게나 높이 평가해준다니 어쩔 수 없죠! 자,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우선 어제 가르쳐준 내용의 확인부터 해볼까요?”
“어, 응.”
갑작스레 올라간 텐션에 순간 당황했지만, 어쨌든 엘리샤가 의욕이 넘치는 것 같길래 시키는 대로 지금껏 배운 걸 선보였다.
그 뒤로도 같이 이것저것 실험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엘리샤에게 질문받아 중급 마법을 쓰는 감각을 알려주기도 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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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석양이 지고, 마차도 멈춰설 적당한 장소를 알아볼 때가 되어서야 끝난 엘리샤와의 수련.
너무 말을 많이 한 탓일까. 내가 따라준 엘븐 티를 연거푸 마시며 갈증을 달랜 엘리샤가 파하- 하고 귀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맞아요 이걸 깜빡할 뻔했네요. 헬레나 사제님의 오해를 풀고 싶다고 했던가요 얀델?”
“응. 그렇지?”
“그리고 가는 길에 어렵지 않은 던전이 하나 있다고도 하셨죠.”
“그렇…지?”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뜨자, 내 예상이 확신을 실어주듯 엘리샤가 우아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단하네요. 거기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된답니다.”
“…정말 그걸로 될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단순한 발상이잖아.
하지만 엘리샤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긍정했다.
“어머? 당연한 거 아닌가요? 헬레나 사제님은 정의로운 광명의 사제시고, 당신은 가장 태양에 가까운 사람이랍니다?”
“아.”
일리가…있어!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서 보내준 마차는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바퀴에는 온갖 보조 마법이 걸려있으며, 마차를 이끄는 말은 어려서부터 축복을 받고 자란 준영물.
당연히 이동 속도 또한 상당하다. 대륙 정중앙에서 동부 끝자락까지 며칠이면 도착할 정도로.
그래서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면…슬슬 던전 하나 더 공략할 시간이 됐단 소리다.
“…어떻게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말을 꺼내지?”
“으그그그긋…하아. 그냥 갑자기 파바밧! 하고 계시가 내려왔다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후배님?”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페이.
몸을 뒤로 젖히며 자연스레 강조되는 가슴에 시선을 고정하며 대답했다.
“그건 안 돼요. 생각해보세요 페이 선배. 던전을 만든 건 신들인데 왜 자기 신도들에게 그 위치를 알려주질 않는 건지.”
내 시선을 느낀 페이가 답답하다는 듯, 은근슬쩍 상의 단추를 2개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던전의 존재 자체가 악신이 저항한 흔적이라 선신 측은 위치를 모르는 거구나?”
“정답이에요.”
던전은 이 세계의 바깥으로 몬스터를 추방하려다 실패한 흔적.
꾸깃꾸깃 뭉친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는데 누가 옆에서 블로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타인의 의도로 튕겨 나간 탓에, 던전을 만든 건 선신이지만 정작 그들은 위치를 모른다.
다행히 이 부분은 악신도 마찬가지다. …본신의 강림에 성공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이건 보통 어릴 때 배우는 내용이라고 들었다. 페이는 성장 과정이 좀 그런 탓에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만.
괜시리 짠해져서 페이의 윗가슴을 쓰다듬어주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동자를 끔뻑이며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던 페이였으나, 이내 헤실거리며 내 손길을 즐기기 시작한다.
쓰담쓰담.
“흐헤헤.”
몰랑몰랑.
“후힛.”
상상 이상으로 좋은 감촉에 멈출 타이밍을 놓치고 한참이나 쓰다듬던 도중.
“어, 그으…형제님? 여기 저도 있습니다만….”
“…헛!”
마침 아침 기도가 끝났는지, 이쪽으로 걸어오던 헬레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흠흠. 아침 기도는 끝나셨나요 헬레나 사제님.”
“예에…아직 아침 식사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으니 잠깐 밖에 나갔다 올까요…?”
힐끔힐끔 나와 페이를 곁눈질하는 헬레나. 이거 그건가? 그런 배려인 건가?
손을 내저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레나 사제님.”
“중요한 이야기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