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98화 (198/230)

납작말랑했다.

“…뭐야?”

“주인이 제일 중요하니 놓치지 않게 꽉 붙잡았네.”

여전히 땡땡하게 부어오른 뺨으로 귀여운 소리를 하는 이리스.

볼을 꾸욱 눌러, 입안에 가득 찬 공기를 빼주며 물었다.

“엘리샤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엘리샤도 공동 1등이니 괜찮네.”

아차 한 목소리.

슬쩍 시선을 피하는 이리스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으며 번쩍 들어 올렸다.

“햣!”

갑자기 발이 들린 탓일까. 다리까지 써서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이리스.

그런 이리스를 팔에 얹은 채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근력 스탯이 높아진 덕분에 별로 무겁지도 않네.

졸지에 거꾸로 뒤집힌 상태가 된 이리스는 엉금엉금 기어 어깨 쪽에 자리 잡았지만.

그렇게 이리스를 어부바한 상태로 페이와 함께 거실 쪽으로 향했다.

진작에 준비를 마친 다른 사람들. 파밀라와 그 가족들은 저택에 남기로 했다.

셋 모두 중위 마법사에 달하는 실력자지만…어차피 어디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집 지킬 사람은 필요하지.

그게 아니더라도 멀리 떨어지는 거니, 본거지인 아카데미 쪽이랑 연락이 닿을 사람도 필요하고.

내 명령을 기다리듯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카를라, 엘리샤, 이리스, 페이, 이오나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바로 출발하자. 헬레나 기다리겠다.”

그렇다. 오늘이 바로 일전에 약속했던 헬레나와 함께 정의로운 광명의 본단에 방문하는 날.

아무래도 나한테 사도직을 내리려는 것 같아 거절하러 가는 것이지만…다른 목적도 하나 있다.

높은 랭크의 가호를 지니고 성지에 들어가면, 해당 신의 신탁을 들을 수 있다고 했던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이 세상에 빙의 당했다면, 같은 초월적 존재인 정의로운 광명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먼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겠지만…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수준의 희미한 기대.

그래도 지금껏 내 빙의에 관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으니 이게 어딘가.

파밀라 가족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형제님…? 등에 업은 그 아이는 대체….”

“아.”

이리스 내려놓는 거 깜빡했네.

517살에 아이 소리 들은 이리스가 잽싸게 자기 귀를 가리고 중얼거렸다.

“으, 응애.”

워낙 귀가 길쭉해 하이엘프라는 사실을 숨기지 못할 것 같지만.

“와. 미쳤네.”

열댓 명이 들어가도 널널한 응접실…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긴 마차 내부다.

정의로운 광명 본단에서 준비했다길래 좋을 건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이잖아?

공간 확장 마법을 한계치까지 걸어둔 것도 모자라, 이동 시의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공기도 신선한 걸 보아 문이 닫혀도 끊임없이 환기는 이루어지고 있겠지. 온도 조절은 덤이고.

거기에 주변의 인테리어는 또 어떤가.

인원수에 맞춰 늘어선 푹신한 침대들, 벽에 붙어있는 근엄한 사자 그림, 중앙의 푹신한 쇼파, 바닥에는 고급진 양탄자가 깔려있다.

마지막으로 곳곳에 걸려있는 정의로운 광명의 심볼들.

태양을 형상화 한 듯한 그 모습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자못 호화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을 경건하게 탈바꿈시킨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골드를 소모했을까. 아니, 이곳이야말로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의 대표 격이겠지.

연신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 편 쇼파에 앉은 헬레나가 자신만만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어떠신가요 형제님. 마음에 드시는지요?”

“최고네요. 이 정도면 거의 고급 여관 수준 아닙니까.”

“실로 그렇습니다. 저희 교단에서는 움직이는 교회라고 불리고 있지요. 지금은 형제님을 위해 내부 구조를 약간 개조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제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걸어 다니는 교회는 교황 성하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바로 그 교황 성하께서 보내주신 거니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희 교단의 그 누구보다도 찬란한 가호를 두르고 계시잖습니까. 형제님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하…영광이네요 그건.”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가슴께에서 기도하듯 손을 맞잡는 헬레나.

…부담스럽다. 심히 부담스럽다.

추기경이나 성녀, 성자 후보들조차 A 랭크의 가호를 받는 게 고작인 시대다.

교황은 추기경들끼리 투표해서 뽑는 선출제라 가호는 다른 추기경들과 다를 게 없고.

그렇다 보니 A+랭크에 달하는 가호를 받는 내가 정의로운 광명의 편애를 받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겠지.

정작 나는 혹시라도 사도직 제안할 거면 거절할 거라고 미리 알리러 가는 길이라는 게 문제지만.

아까부터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는 헬레나의 시선을 피해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입을 꾹 다문 이리스.

천적을 발견한 소동물. 내지는 이리스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다.

뒤늦게나마 가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스란히 노출된 길쭉한 귀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리스?”

“히익! 주, 주인이여! 귀는 안 되네에….”

“싫으면 얼굴에서 손 떼고 이쪽 보던가.”

“그건…그건 부끄럽네.”

“지금이 더 부끄러운 거 알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

“크윽….”

흑역사를 떠올린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이리스. 하지만 끝내 손을 떼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네.”

이리 놔두기도 뭐하니 이리스를 번쩍 들어 내 무릎에 앉혔다.

그러자 졸린 오리너구리가 둥지에 숨어들듯, 자연스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이리스.

나중에 좀 진정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자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헬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헬레나 사제님?”

“핫! 무, 무슨 일이신가요 얀델 형제님.”

“이쪽을 빤히 바라보시길래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으음….”

침음을 흘리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는 헬레나.

왼쪽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있는 카를라. 오른쪽에는 이리스가 빠진 틈을 타 스윽 엉덩이를 붙인 엘리샤.

페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마차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중이었고, 이오나는 벌써부터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페이 양과 이오나 교수님이야 그렇다 쳐도…얀델 형제님이 노예와 가깝게 지내시는 게 항상 신기했습니다. 아, 물론 형제님의 사생활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지금 무릎에 앉힌 노예는…”

“아하?”

정의로운 광명은 광적으로 악신을 혐오한다. 당연히 사교도는 물론이요, 그들과 관련된 노예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노예들의 몰락 사유가 무엇인가.

카를라는 사교도 혐의의 연좌제, 엘리샤와 이리스는 정령 소환 혐의다.

나를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한 악신 혐오자로 알고 있는 헬레나에겐 이리스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리라.

움찔거리는 이리스의 목덜미를 꾹 눌러 안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셋 모두 저와 일종의 거래를 했거든요.”

“거래요? 노예랑 말인가요?”

“노예긴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죠. 무엇보다 악신과 직접 연관된 건 아니잖습니까.”

카를라의 아버지가 뒤집어쓴 누명은 아직 뒤집을 수 없다. 하지만 카를라 본인이 사교도와 연관이 없다는 건 진작에 밝혀진 사실.

그렇기에 사형이 아닌 노예형을 선고받은 것 아닌가.

이리스와 엘리샤는 어떤가. 이리스가 정령을 소환하려 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게 악신 숭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 다른 초월적 존재의 소환 위험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악신이랑은 상관없다.

“그런데도 단순한 노예로 부리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하지만….”

무어라 항변하려는 헬레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말이 거래지, 사실 그리 딱딱한 관계도 아닙니다.”

“예?”

“어, 그, 뭐냐. 헬레나 사제님도 들어봐서 아시죠? 엘프에게 반려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영혼의 반쪽, 한 쌍의 날개, 하나로 얽힌 뿌리, 천년의 약속. 설마?”

“네. 그 설마입니다. 애초에 이리스가 실반 마탑주였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스스로 노예 각인을 풀 수 있음에도 순순히 제 노예로 남아있는 건 더 단단한 계약이 있기 때문인 거죠.”

“아….”

조금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이에 용기를 낸 건지 이리스가 꼬물거리며 돌려 앉아 얼굴을 드러냈다.

“주인의 말대로네. 자네 같은 성직자의 눈에 나나 엘리샤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아네만,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런 걸세. 주인의 적은 나의 적. 주인의 목표는 나의 목표. 이 각인은…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동안은 나와 주인을 잇는 신뢰의 상징이네.”

목덜미에 새겨진 가시덩굴 문양을 어루만지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이리스.

“아마 린델하이트 영애도 비슷한 약속을 맺었겠지.”

“넹? 아닌데요?”

“으응?”

이리스가 푸른 하늘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를라 또한 루비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반대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으…린델하이트 영애 자네도 나중에 노예 신분을 청산하고 주인과 맺어지는 것 아니었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는 쭈욱 주인님만의 노예인걸요?”

“…그럼 대체 왜 그리 열성적으로 가문의 비전을 가르친 겐가? 어차피 한 가족이 될 테니 주인을 통해 린델하이트의 부흥을 꿈꾸는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야 제 몸도 마음도, 그리고 머릿속에 든 지식도 전부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조오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인님에게 제 흔적이 묻는 게 좋아서 그랬던 것도 있네요.”

“영역표시였던 게냐…?”

어이없어하는 이리스. 엘리샤와 헬레나도 얼추 비슷한 생각인지 입을 떡 벌리고 있다.

오직 카를라만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눈을 끔뻑일 뿐.

“저기. 카를라? 만약 내가 너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다고 하면….”

“아, 안 돼요 주인님!”

멀쩡하던 카를라의 안색이 순간 파랗게 질리며 내 팔에 매달려 온다.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평생 노예로 삼는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버리는 게 아니라 풀어주는 거잖아.”

“어쨌든 주인님의 노예가 아니게 되는 거잖아요! 호,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주인님을 거슬리게 했나요? 죄송해요. 알려주시면 다시는 안 그럴게요….”

오랜만에 보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불안한 표정이네.

카를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천천히 팔에서 떨어뜨렸다.

“정말 버리는 거 아니니까 진정해. 언제까지고 노예로 있을 수는 없잖아. 한참 나중의 일을 말하는 거야.”

“저는…평생 주인님의 노예라도 괜찮아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다른 여자를 몇 명이나 들이시건 상관없어요. 저를 사랑해주지 않으셔도…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저 저를 주인님에게서 떨어뜨리려 하지 말아주세요. 저를…저를 필요로 해주세요….”

“…….”

“이젠 주인님의 노예가 아닌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단 말이에요….”

무겁다.

카를라의 집착이 너무 무거워.

엘리샤나 이리스와는 달리 노예 교육 때 한번 사고방식이 삐뚤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나.

최근 들어 밝아진 모습을 보여주긴 했어도 근간에 있는 두려움은 변하지 않은 느낌.

한숨을 푸욱 내쉬며 카를라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파르르 떨리는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내가 이렇게 말 잘 듣고 예쁜 노예를 왜 버리겠어. 카를라 너는 평생 내 노예야. 누구도 뺏어갈 수 없어. 벗어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나한테 모든 걸 맡겨. 넌 그저 어떻게 하면 내게 귀여움받을까만 생각해. 그게 애완 노예의 본분이잖아?”

“녜헤엣….”

지금껏 몇 번이고 속삭였던 소유욕 가득한 말들.

이를 계속해서 반복하자 카를라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춘다.

부작용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표정이 몽롱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괜찮아졌다.

카를라가 이렇게나 주종관계에 집착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긴 하다. 원하는 대로 평생 데리고 살지 뭐.

대신 앞으로는 이런 주제를 꺼낼 때 카를라에게는 조금 더 조심하고.

“후우….”

어찌 됐든 해결됐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읏.”

그리고 헬레나가 가스라이팅 장인이라도 봤다는 듯,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헬레나 사제님 조금 오해가 있는….”

“아앗! 벌써 기도 시간이 됐네요! 저는 이쯤에서 실례하겠습니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형제님!”

호다닥 쇼파에서 일어나 정의로운 광명의 심볼이 걸린 벽 쪽으로 향하는 헬레나.

누가 봐도 명확한 거부 의사에 황망한 표정으로 헬레나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그런다고 떠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해명할 기회도 사라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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