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넘쳐나는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마법 한번 쓸 때마다 회복 포션을 마셔야 하고, 위력이 큰 마법은 시전하던 도중에 쇼크로 쓰러지겠지.
하지만 내가 망설이는 이유를 들은 이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혈마법은 맞지만 지금의 얀델 학생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야.”
“네? 제가요?”
“맞아 맞아. 정의로운 광명으로부터 강력한 가호를 받고 있지? 훨씬 약하고 성질도 다르지만 나도 같은 신으로부터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 잘 알아!”
“오오…?”
인류의 편에 서서 조약에 서명한 뱀파이어는 그 대가로 태양 아래를 거닐 수 있게 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태양신이기도 한 정의로운 광명이 뱀파이어들에게 가호를 내리기 때문.
나처럼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단순히 ‘쏘지 마라 아군이다’ 라는 표식을 붙인다는 느낌이지만…어쨌든 가호는 가호.
헬레나가 내 몸에 깃든 가호를 알아봤듯, 이오나도 존재 자체는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리라.
“정의로운 광명의 가호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지치지 않게 해준다고 해! 정말이야?”
“지치지 않는다기보다는 재생력이 확 높아지죠. 거기에 모든 종류의 빛 속성 공격이 강화되고요.”
“역시 역시! 그런 구조였네! 혈마법을 신체 강화에 쓰면, 피를 한 번에 격발시키지 않고 천천히 소모하거든? 그거라면 얀델 학생도 부담 없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하면 지속 회복 포션을 마셔서 커버하면 되고!”
“그건…될 것 같은데요? 잠시만요.”
인벤토리에서 빛나는 사자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마법사는 유리 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지금의 내 내구 스탯은 17이나 되고, 이는 재생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탯이다.
마력 스탯 18이 어지간한 아카데미 졸업반 수준의 마력임을 생각했을 때,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거기에 칭호와 특성으로 인한 보너스 재생력은 또 어떤가.
만신의 가호로 50%, 태양신의 가호로 태양이 떠 있는 동안은 350%나 상승하지 않는가.
이 정도라면 뱀파이어처럼 재생력을 믿고 방어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겠지만…그래도 자잘한 상처는 금세 나으리라.
꼴깍 침을 삼키고는 그대로 손가락 끝을 살짝 베었다.
주르륵.
살이 벌어지며 그 틈새로부터 빨간 핏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잽싸게 손을 뻗은 이오나가 떨어진 핏방울을 낚아채 할짝이느라 바닥에 닿진 않았지만 아무튼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가 나긴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어느새 아문 상처에서는 더 이상의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으니까.
환부를 살펴보자, 그 짧은 사이에 살이 붙어있었다.
오직 한 줄기 붉은 실선만이 여기에 상처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는 모습. 이마저도 몇 시간이면 사라지겠지.
“…얀델 학생 인간 맞지?”
“아마도요?”
“혹시 혹시. 이 상태에서 뱀파이어가 되면 심장이 뚫려도 살아나지 않을까? 어때? 나랑 같이 영원한 삶을 누려보지 않을래?”
“그럼 더는 제 피를 못 드실 텐데요?”
뱀파이어는 인간은 물론 각종 이종족이나 짐승의 피도 마실 수 있지만…동족의 피는 마실 수 없다.
가끔 다른 뱀파이어의 진혈을 흡수해 힘을 키우는 미친놈도 있긴 한데, 그 경우에도 마시는 게 아니라 직접 혈관에 때려 박는다.
당연히 이오나도 알고 있을 사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이오나가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방금 전 건 농담이었어….”
“그렇다고 치죠. 아무튼 이 정도 재생력이면 괜찮으려나요?”
“어? 응. 그렇지 그렇지. 신체 강화 같은 내부에 작용하는 힘은 소모가 적은 편이니까.”
이오나가 근접전에서도 밀리지 않는 전투를 보여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혈마법을 통한 폭발적인 신체 능력의 향상에 있다고 한다.
모든 마법의 위력을 강화시키지만, 피를 매개로 하기 때문인지 유독 신체에 작용하는 마법에는 효율이 높다나.
“너무 큰 힘을 내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많은 양의 피가 소모되니까 그 부분은 주의해야 해. 반대로 말하면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문제는 없는데…어때? 한번 배워볼래?”
“당연하죠.”
오랜 기간을 살아오고, 뛰어난 육체와 마력을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뱀파이어이기에 그들은 하나하나가 강력한 기사고 마법사다.
그중에서도 이오나는 개인 무력으로 정점에 달한 로드급 뱀파이어.
이 혈마법을 통한 신체 강화는 그런 이오나식 전투의 핵심이 되는 마법이다. 당연히 이건 배워야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오나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좋아 좋아.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시작해볼까?”
“…지금요?”
“응응. 혹시 뭐 다른 예정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슬쩍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카를라와 엘리샤. 심지어 이리스마저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는…마법이고 뭐고 내 재생력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네. 슬쩍 손가락을 움직이니 페이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거든.
뭔가 묘하게 싸하긴 한데, 반대할 이유도 없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바로 시작하죠. 바깥에 수련장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거기 재질은 단단해?”
“아뇨. 대신 넓어요. 그리고 부서져도 금방 수복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졌고요. …그런데 신체 강화 마법 배우는 건데 왜 그런 게 중요하죠?”
좀 더 뭐랄까. 정적인 마법 아냐? 펑펑 터지고 그런 건 아니잖아.
제대로 성공해도 수련장 몇 바퀴 돌거나 허공에 주먹질 좀 해보면서 감 잡으면 되는 거잖아.
내 의문에 이오나의 입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야 실전으로 배우다 보면 얀델 학생이 여기저기 튕겨 나가잖아? 힘이 세진만큼 좁으면 곤란하지.”
“…….”
아.
잊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이론부터 차근차근 배운 것과 달리, 이오나는 극도의 실전 주의자라는 걸.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대련 중의 고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깜깜했다.
마치 내 미래처럼.
“우선 우선 간단한 설명부터 할까?”
“…넹?”
수련장에 도착한 이오나의 첫마디에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이오나가…설명?
나만 놀란 건 아닌지, 이오나의 수업을 지켜봐 온 카를라와 엘리샤도 눈을 땡그랗게 뜨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이론 수업이야 엘리샤! 이론 수업!”
“예에.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오나 교수님의 이론 수업…대체 얼마나 어려운 걸 가르치려는 거죠?”
내게도 들린 것이니 당연히 이오나에게도 들릴 터.
이오나가 헐렁한 옷소매로 둘을 척! 가리키며 외쳤다.
“거기! 저번에도 교실에서 이론 수업은 했잖아?! 왜 그건 기억 못하는데! 얀델 학생! 얀델 학생도 이 이오나 교수님이 이론부터 가르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야 뭐….”
“너무해! 너무해! 일단 원리나 방법은 알려주고 때려…대련해야지, 다짜고짜 대련시키면 그냥 괴롭힘이잖아!”
“아, 역시 때리는군요.”
대충 알겠다. 이론을 알려주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 싶으면 냅다 대련을 시작한다는 소리구만?
맞기 싫으면 신체를 강화해 보라는 대충 그런 느낌. 이제야 이해가 되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이오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고.
“후우…아무튼 아무튼. 다시 설명 시작하려는데 괜찮지 얀델 학생?”
“엇. 네.”
“좋아 좋아. 그럼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그러네. 기존의 신체 강화 마법은 쓸 줄 알지?”
“그야 당연하죠. 보통은 효과가 더 오래가는 물약으로 대신합니다만 마법도 쓸 줄은 알아요.”
스트렝스, 헤이스트.
신체 강화 계열 마법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더 어렵고 복잡하지만 효과 좋은 마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봤자 결국 스트렝스와 헤이스트의 응용이라 그렇지.
“그럼 대충 알겠네! 마법을 통한 신체 강화는 오러는 물론이고 신성술에도 한참 밀린다는 걸!”
“구조상 어쩔 수 없긴 하더라고요.”
오러는 신체 자체를 활성화해 강화한다. 신성술은 파워드 슈트라도 입은 것처럼 모든 움직임을 보조해 준다는 느낌이고.
하지만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는 다르다.
스트렝스는 몸 안팎에서의 보조와 함께, 뇌가 정해둔 무의식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마법이다.
헤이스트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민첩한 반응을 구사할 수 있게 하는 마법이고.
둘다 한계를 잠시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줄 뿐인 마법. 즉, 적당한 수준으로 무리하는 마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일전에 버프의 효과가 다하자마자 쓰러졌던 것도 그래서다.
과하게 운동하면 근육이 녹아내리고 뼈가 갈리지 않는가. 아무리 버프를 받았다고 하나 너무 몸을 혹사했었지….
반면 오러는 신체의 기본 성능 자체를 활성화해 한계 컷을 높이는 원리고, 신성술은 들이는 힘 대비 결과가 좋아지는 방식이다.
그렇다 보니 오러는 쥐어짜듯 무리해서 쓰는 게 아닌 이상 반동이 없으며.
신성술로 인한 강화는 뭘 어떻게 하건 반동 자체가 오질 않는다. 대신 사제의 수준에 따라 강화 한계가 정해져 있지만.
참고로 회복 계열도 얼추 비슷하다.
마법은 인위적인 활성화, 오러는 재생력 자체의 강화, 그리고 신성술은 그냥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의 수복.
이런 느낌이다 보니 치유 마법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동반하는 건 물론이요. 무리해서 사용한다면 종양 같은 게 생길 수 있다.
오러는 마찬가지로 무리한 회복을 하면 수명이 깎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별다른 부작용이 없고.
회복 신성술은 아예 부작용 자체가 없다. 환부에 이물질이 있으면 알아서 뱉어내는 기능은 덤.
그래서 마법사들도 어지간하면 포션을 마시거나, 사제의 치유를 받는 거다.
포션은 연금술로 몇 차례나 정제해 부작용을 최소화 시킨 건 물론, 돈만 있으면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회복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버프도 마찬가지.
보조 계열로는 아무래도 기본적인 효율이나 부작용 면에서 신성력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사제가 있으면 사제에게 버프를 받는 게 국룰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혼자 싸웠거든? 그래서 사제의 서포트를 받기가 힘들었어!”
“뱀파이어의 재생력과 포션이 있잖아요.”
“재생력으로 돌릴 피로 마법 한 번 더 쓰면, 더 많은 사교도 놈들을 죽일 수 있는데? 그리고 당시에는 공간 마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개인이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다닐 수도 없었어.”
하긴. 공간계열 마도구의 보급 및 성능 향상은 소환술이 금지당한 이후의 이야기다.
아직 소환술사들이 백수가 되기 이전에는 아공간 주머니도 굉장히 희귀한 물건이었겠지.
아무리 이오나가 뛰어난 실력자라도, 개인에게 쥐여주기보다는 군대의 보급용으로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으리라.
…그나저나 재생력으로 돌리느니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고 말하는 거 실화냐.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오히려 무섭다고.
“아무튼 아무튼! 그런 이유로 만든 이오나식 강화 마법!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는 얀델 학생이라면 분명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오오…!”
“방법은 간단해! 피 자체에 힘을 실어서, 전신에 그 힘을 전달한다는 느낌!”
“마나 회로 대신 혈관을 쓰는 건가요?”
“아니? 아니? 그건 위험하잖아! 마나 회로로 만들어낸 마법을 혈액에 녹여내는 거야!”
“???”
멍하니 눈만 끔뻑이자, 이오나가 내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몰캉.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부드러움. 순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쪼물대려는 순간.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린 이오나가 나보다 한발 빠르게 손의 위치를 조정했다.
“아차! 아차! 여기가 아니었지!”
“칫.”
아쉽게도 비교적 만질 부분이 부족한 위 가슴에 딱 붙은 손.
얇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서늘한 체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게 뭔가요 교수님?”
“이제부터! 이제부터! 직접 한번 써볼 테니까 느껴보라는 거지! 지금의 얀델 학생이라면 대략적인 감은 잡을 수 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
두근.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느릿한 심장 박동.
뭘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갑자기 이오나의 피가 심장으로부터 뿜어져 전신의 혈관을 순환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에 마력을 녹여낸 거야. 어때? 잘 느껴지지?”
“네. 신기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확인한 이오나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기본적인 이미지는 간단해. 이 상태에서 마력이 힘이 되고, 그 힘이 피와 함께 전신에 녹아드는 느낌이야!”
“음…얼추 알겠네요.”
“그치? 그치? 어려운 건 이다음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어디 보자….”
그리 말한 이오나가 한쪽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그 손끝을 따라 빛이 길게 늘어지며 허공이 거대한 칠판이 되었다.
알 수 없는 도형. 계산식.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긴 주석.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건 간략한 인체 해부도뿐이었다. 이건 전생에서 많이 봤으니까….
한참이나 허공에 무언가를 적어 내린 끝에 가볍게 점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 이오나.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이오나 기준으로 쓰여서 좌우가 반전되어 보이던 모든 것이 정상으로 읽혔다.
물론 읽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일단 일단. 외우면서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