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내가 야한 이야기하는 건 줄 알았어? 당연히 자O이야기지.”
“왜 이번에는 뒷말을 흐리는 건가요! 그리고 자로 시작하면 안 되잖아!”
“크후후….”
특유의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가지 구이를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하는 페이.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허허 웃고 있자니, 옆에서 카를라가 침을 꼴깍 삼킨다.
“이 정도면…주인님보다 작네요!”
“그 가소로워하는 표정은 요리를 보며 지을 표정이 아니거든?!”
순식간에 난잡해진 분위기 속. 오직 엘리샤만이 차분하게 식탁을 노려보고 있다.
맑은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머리카락과 눈동자. 돌돌 말려 롤 모양으로 정리된 머리는 화려함 속에 우아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
달그락 달그락.
무섭게도 아까부터 말없이 가지 구이를 한입 크기로 자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엘리샤?”
“…에? 아, 무슨 일인가요 당신.”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무의미한 가지 해체를 그만두고 이쪽을 올려보는 엘리샤.
“그게. 조금 전부터 멍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말이야.”
“아…별거 아니랍니다. 스승님의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말씀을 들었더니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그리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잘라둔 가지 구이를 꾹꾹 짓이기는 엘리샤.
저게 그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페이의 발언 때문에 엄청 신경 쓰인다는 점은 변하질 않는다.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짓뭉개지는 가지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돌연 엘리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앗…!”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엘리샤.”
“당신!”
“응?”
“이오나 교수님에게 마지막으로 피를 빨린 게 언제였죠?”
“그야 시험 전날이었지. 아무리 내가 이오나 교수님의 공식 흡혈 파트너여도 시험 기간에 교수랑 학생이 붙어 다니면 말이 나올 테니까.”
“그래서 그게 며칠이죠?”
“대충 4일? 아니, 오늘로 5일째네. …잠깐.”
그럼 5일간 이오나는 피를 안 마셨다는 소리인가?
물론 이오나 정도 되는 뱀파이어라면 한 달은 피를 끊어도 힘을 유지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 피를 빠는 건 힘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했고 대적자 칭호로 내성이 오르기도 해서 큰 불편함이 없다지만…이오나는 다르다.
내 피에 무슨 마약 성분이라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마시지 않으면 힘들어할 정도로 의존 중이었으니까.
“…조졌나?”
오기 전에 피를 주고 왔어야 했는데. 설마 어제 자꾸 보내던 윙크가 장난이 아니라 필사적인 어필이었던 건가?
“아니, 그래도 오늘 온댔잖아. 괜찮을 거야. 응.”
“그간 억눌린 흡혈욕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죠.”
“…….”
슬쩍 인벤토리를 열어 남아있는 회복 포션의 양을 확인하던 도중.
쿵-!
아침 준비하는데 힘썼으니, 지금쯤 잠깐 쉬고 있을 파밀라가 다급히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인어른! 탑주…아니, 이리스 님! 비상입니다! 밖에 폭주 직전의 뱀파이어가…!”
“아.”
남은 밥을 한입에 털어 넣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다음 메뉴는 나인 것 같으니까.
***
“이야 이야! 얀델 학생도 참! 설마 이 이오나 교수님을 까먹을 줄이야! 아니면 뭐야? 설마 이렇게 안달 나게 하는 게 취향인 거야?”
“죄송하다니까요. 그래도 이제 만족하시죠?”
“응응.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데 이쪽은?”
내 무릎 위에 걸터앉은 이오나가, 볼을 부풀린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이리스를 가리켰다.
“이리스에요. 저번에 지원군 불러오면서 한번 보셨을 텐데….”
“이리스 실반 바나티스.”
내 말을 끊은 이오나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야 뭐야. 그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실반 마탑주잖아? …아니, 이젠 전 마탑주인가?”
“끄으응. 주인에게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리 마주하니 참 그렇구나. 그리고 거긴 내 자리니 어서 나오게.”
이오나의 팔을 꾹꾹 잡아당기며 끌어내 보려 하지만, 힘이 부족해 그냥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
결국 포기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내 등 뒤에 올라탄 이리스에게 물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그렇네. 아아아주 오래된 악연일세.”
내 볼에 자신의 몰랑몰랑한 볼을 딱 붙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되게 촉감이 좋단 말이지. 말 그대로 아기 피부잖아 이거.
속으로 이리스의 볼살에 감탄하는 사이. 이오나가 예의 장난스런 미소로 입을 열었다.
“맞아 맞아. 아아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지. 대충 300년 정도 됐으려나?”
“한탄스러운 일이네. 전쟁만 아니었어도….”
“아하? 신들의 전쟁에서 알게 된 거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들의 전쟁은 인류의 명운을 건 총력전.
한창 이름을 날리던 이오나는 물론이요, 이리스도 지금보다는 못해도 전장에 서긴 충분했을 거다.
당시에는 남녀노소나 국가. 심지어 종족도 상관없이 싸웠다고 하니, 둘이 같이 싸워본 적도 있겠지.
그리 생각하자 아일라를 쓰러뜨린 직후, 이리스가 스스럼없이 달려들어 매달린 것도.
처음 이오나와 함께 사교도를 토벌하겠다고 했을 때 무덤덤하게 알겠다고 한 것도 이해되네.
원래 잘 아는 사이였던 거구만?
…별로 친해 보이지는 않지만.
“있잖아 있잖아. 그거 알아 얀델 학생? 이리스는 전쟁 중에 자기 하인을 열댓씩 데리고 다니며 티타임을 요구했다?”
“그윽…그건 첫 출전 때의 이야기잖나! 뭣보다 당시의 나는 왕족으로 자라, 처음으로 대수림을 떠났을 때였네!”
지금의 하이엘프는 종교적인 의미로 존중받을 뿐이지만, 먼 과거에는 실제로 왕이었다.
그렇기에 설령 왕좌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모든 하이엘프는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아마 이리스가 어린 시절에는 아직 그런 풍습이 남아있던 거겠지.
애초에 하이 엘프가 더 능력 있는 이에게 왕좌를 물려준 이유 자체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으니까.
즉, 전쟁 초기의 이리스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이었다는 소리.
복수에 미쳐 날뛰던 당시의 이오나가 보기에는…음. 확실히 별로였겠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스가 다급히 바동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이오나 자네도 만만찮게 골칫덩이 아니었나! 사교도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명령 위반을 밥 먹듯이 해대니…나는 처음에 광명 교단의 사제인 줄 알았다네.”
“헹헹! 그래도 포위당한 성에서 엘븐 티 달라는 사람보다는 낫지!”
“성문을 뛰쳐나가, 그대로 돌진하는 미친 자살지망자보다는 내가 더 낫네!”
“어쨌든 어쨌든 이겼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어찌 됐든 아군의 사기를 올리지 않았나!”
“자기보다 200살은 어린 인간들에게 어린애 취급받은 걸 그렇게 포장하다니. 양심 어디?”
“난 귀여우니까 괜찮네!”
“드디어 미쳐버린 거야?!”
“응애!”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아르릉대는 이리스와 이오나.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페이에게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는지 다들 눈을 반짝이며 언쟁의 행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대전쟁 시절의 썰도 좀 재밌었고.
듣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둘이 이렇게 친한데, 왜 지금까지는 한 마디도 없었던 건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문 둘이 서로를 한차례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주인이여.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네.”
“응응. 굳이 말하자면 얀델 학생과 다른 A반 학생 정도의 사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내가 침묵할 차례였다.
나도 반에 친구 한명 정도는…한명 정도느은…!
결국 반박하지 못하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에에잇! 아무튼 이제 둘 다 제 여자니 사이좋게 지내세요! 이상!”
“…….”
“…….”
그 말에 서로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리스와 이오나.
“으음…주인의 말이 맞네. 이젠 사이좋게 지내야지.”
“주인이라니…방금까진 별생각 없었는데, 이거 사실 엄청난 거 아냐? 엘리샤를 사며 같이 샀다는 소리잖아. 얀델 학생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만한 골드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었지. 다른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빠르게 설명하겠네.”
“역시 역시. 뭔가 있긴 하는 거구나?”
자기가 먼저 알았다는 티를 내며 엣헴 거리던 이리스. 됐으니까 어서 설명이나 하라며 흥미진진해하는 이오나.
이대로라면 이오나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겠네. 다행이야.
그런데 난 언제까지 둘 사이에 끼어있어야 하는 거지?
싫은 건 아닌데, 슬슬 다리에 쥐가 난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대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마지막 드래곤이 비밀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조직의 마지막 후예이자 모든 안배의 주인이 얀델 학생이라는 거지?”
“바로 그렇네.”
“운이 좋은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우연히 사교도의 계획을 방해한 게 아니라 전부 알고 막아선 거고?”
“음음.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펼친 게 아닌가 싶네. 드래곤의 지능과 마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거기에 드래곤의 재산을 물려받아 돈도 많고?”
“혹시나 해서 묻네만, 코 묻은 어린애 돈을 뜯을 생각이라면….”
“아냐 아냐! 나도 돈 많거든?! 그리고 코 묻은 돈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잖아! 뭣보다 자기 주인을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나 자네에 비하면 어리지 않나.”
“장생종이랑 비교하면 제국 황제도 어린애잖아!”
이리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기를 반복하는 이오나. 그럴 만하다. 나도 같이 놀라는 중이거든….
대체 이리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그럴 듯하게 살이 붙은 거야?
“그나저나 그나저나. 사정을 알고 나니 대충 이해는 되네. 그럼 얀델 학생의 최종 목표는 악신 강림 저지인 거네?”
“조금 더 정확히는 세상의 멸망을 막는 거죠.”
“혹은 두번째 용사가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해 보이잖아요…전 그냥 오래오래 행복하게 놀고먹고 싶을 뿐인데.”
“그건 그것대로 어려운 목표네!”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오나.
“어…이오나 교수님은 지금 내용을 전부 믿어요? 제가 생각해도 좀 말도 안 되는 내용이잖아요.”
“글쎄 글쎄. 애초에 쓸만한 마법이라고는 윈드 커터 하나밖에 모르던 신입생이 몇 달 만에 중위 마법사가 된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인걸?”
“앗.”
H&A 때도 플레이어는 주인공답게 역대급 천재 수준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게임 시절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당장 이오나 본인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니, 재능만으로 가능하다고 하기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겠지.
그렇기에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것이리라.
…내 조잡한 거짓말에 이리스가 살을 붙이며 정합성을 부여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뻘쭘하게 뒤통수만 긁적이고 있자니, 이오나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걱정 마. 걱정 마. 얀델 학생이 도와준 것처럼, 이 이오나 교수님도 얀델 학생을 도와줄 생각이니까! 어때? 막 든든하고 아름답고 키스해주고 싶고…그러지 않아?”
“허어….”
노골적으로 입술을 할짝이는 이오나에게 가벼운 키스를 해줬다.
쪽.
당연히 조금 뾰로통한 표정의 이리스와 멀리서 구경만 하는 다른 여인들에게도 한 번씩 해주었고.
이제 막 식사를 끝마쳐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배부른 표정이 된 여인들 사이에서 이오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기 저기! 얀델 학생은 주변에서 이런저런 걸 배우고 있잖아? 카를라의 마나 호흡법이나, 이리스의 원소 조합 같은 거 말이야.”
“뭐…그렇죠?”
그 외에도 엘리샤에게 배우는 영창 단축이라거나, 페이에게 여러 특수 포션을 받는 등.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이오나 교수님에게서도 마법사의 전투 방식에 대해 배우고 있잖아요.”
“응응. 근데 그건 단순히 아카데미 수업이잖아?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얀델 학생에게 조금 특별한 걸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래. 어때? 생각 있어?”
“특별한 거요? 이오나 교수님의 비전은 혈마법이잖아요. 제가 배우기는 힘들 텐데….”
혈마법은 피 자체를 다루건, 피를 연료로 다른 마법의 위력을 높이건 아무튼 피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