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한껏 치켜 올라갔던 어깨는 시험 결과를 보자 추욱 늘어졌다.
“…망쳤어.”
“어, 그. 힘내세요 주인님!”
“으음. 아무리 당신이라도 안 배운 문제를 풀 수는 없으니까요.”
내가 실제로 마법을 얼마나 잘 쓰냐와는 상관없이,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응애나 다름없었다.
다들 기본은 떼고 입학한 아카데미에 혼자 백지상태로 들어왔으니까.
그래도 카를라의 과외와 뛰어난 기억력 특성에 힘입어 슬슬 따라잡았건만….
“겨우 며칠 누워있었다고 이렇게 모르는 문제가 많다는 게 말이 돼?! 애초에 시험 기간에 이렇게 빡쎄게 진도 나가는 게 어딨냐고!”
억울함에 씩씩대고 있자니 카를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으…제가 1학년 때랑 비교하면 조금 진도가 느린 편이었는데, 그걸 학기 말에 바짝 나갔나 보네요 주인님.”
“올해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던 거겠죠. 그래도 실기는 만점이었잖아요? 기운 차리세요 당신.”
엘리샤의 말대로다. 입학식에 이루어져야 했을 습격 사건은, 첫 던전 실습 중에 일어났으며.
본래라면 사교도들이 전면에 등장하고서야 알려졌을 들끓는 고요의 스파이 짓 또한 내가 결투 도중에 폭로해버렸다.
학기 중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니 진도가 느려질 수밖에.
하지만 교육 과정은 정해져 있으니, 학기 말에 팍팍 진도를 나갔던 것이리라.
“이래서는 마법 전투를 제외하면 어떤 과목에서도 1등을 할 수가 없잖아….”
“당신 설마 전 과목 1등 같은 걸 노리고 있었나요? 입학 며칠 전에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면서? 그건 좀 양심이 없는 일 아닌지….”
“엘리샤! 주인님도 열심히 했는걸! 목표로 삼는 정도는 괜찮잖아!”
“……둘 다 말이 너무해! 특히 카를라 너는 두둔해주는 척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잖아!”
물론 전 과목 1등이 불가능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1학년 때는 전공이 나뉘기 전이라 이것저것 찍먹해보는 시기니 더더욱 그렇지.
기초만 가르치는 거긴 하지만, 배우는 과목 자체가 엄청 많거든.
그래도 몇 개 정도는 1등을 찍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랬으면 포인트가 100 정도는 쌓였을 텐데….
슬슬 목표였던 드래곤 하트 조각을 구매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이 좀 조급해져나 보다.
시험은 망했지만 대신, 다른 부분에선 예상 이상으로 잘 되고 있지 않은가.
아직 1학기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중위 마법사의 경지에 올랐고 스탯도 상당하다.
토벌한 사교도도 많으니 악신 교단의 계획도 많이 무산됐겠지.
마지막으로 요 며칠 사이에 공명의 컨트롤에도 익숙해졌다.
아직 마력을 상당히 고조시켜야 하는 중급 마법에만 사용 가능하지만, 온 오프 정도는 가능하게 됐으니까.
이대로 계속 연습하다 보면 하급 마법에도 적용하거나, 최대 증폭률을 늘리는 것도 가능해지겠지.
음. 좋아. 멘탈 회복 완료.
점수표를 곱게 접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으갸갸갸갹…어쨌든 오늘로 1학기는 끝이네.”
“고생 많으셨어요 주인님. 마차 안에서 기초 마법 배우실 때가 며칠 전 같은데 이젠 중위 마법사라니….”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벅차오르는 표정을 짓는 카를라. 그런 그녀의 턱을 간질이며 피식 웃었다.
“카를라 너도 많이 변한 거 알아? 처음 데려왔을 때는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면서 무서워했는데.”
“에이. 그때는 주인님의 얼굴도 제대로 모를 때였잖아요. …혹시 그런 게 취향이신가요?”
돌연 오들오들 떨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카를라.
내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크게 겁먹고 움찔거린다.
지배욕을 자극하는 그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과장되게 들어 올렸다.
“흐윽…!”
목을 움츠리고 눈을 꾹 감는 카를라. 누가 보면 때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반응에 낄낄 웃으며 머리를 통통 두드려주었다.
“가끔은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난 지금이 더 좋지만.”
“헤헤…전 언제나 주인님이 좋았어요!”
“그럼 오늘은 경매장에서 봤던 모습으로 폴리모프 마도구 쓰고 할까.”
“아, 그건 좀.”
언제 헤실거렸냐는 듯, 정색하고 거절하는 카를라.
여전히 외모에 민감하단 말이지.
괜시리 딱딱해진 카를라의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끌어 올리며 놀고 있자니, 뾰로통한 표정의 엘리샤가 내 허벅지를 꾹꾹 눌러온다.
“뭔가요. 당신이랑 카를라 둘만 아는 것 같은 이야기는. 제가 끼어들기 힘들잖아요!”
“어? 엘리샤 모르고 있었어? 그럼 이참에 조금 썰을 풀어보자면….”
그렇게 이번에는 엘리샤까지 껴서 잡담을 나누던 것도 잠시.
어느새 성적표 배부를 끝낸 이오나가 교탁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주목 주목! 다들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았어! 혹시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올해는 B반으로 강등당할 정도로 성적이 위태로운 사람은 없으니까! 오히려 작년, 재작년이랑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높은 편이지! 자극이 될 만한 사람이라도 있었던 걸까?”
슬그머니 이쪽으로 집중되는 시선. 동시에 이오나도 히히 웃으며 윙크를 날려온다.
…부담스러워! 그리고 수업 중에는 너무 티 내지 말라니까!
그런 의미를 담아 찌릿 노려보았으나, 정작 이오나는 키득이며 내 시선을 흘려넘길 뿐이었다.
“아무튼 아무튼! 한 학기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들 고생 많았어! 다음에 만날 때도 지금처럼만 해! …이걸로 1학기 수업은 끝! 방학 중에 푹 쉬고 2학기에 다시 봐!”
-와아아아-!!
A반 학생들의 요란한 환호를 받으며 퇴장하는 이오나. 나도 적당히 박수를 쳐주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은 미리 싸뒀지? 페이 선배 공방에 들렀다가 같이 저택으로 가자.”
“넹. 아, 이오나 교수님은 같이 안 가나요?”
“응. 교수는 방학 땡 했다고 바로 쉴 수 있는 게 아니라나? 그래도 내일이면 마무리하고 저택 쪽으로 온댔으니 괜찮아. 위치도 미리 알려줬고.”
“아하? 그럼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하지만 엘리샤는 반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자기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푸른 눈동자를 깜빡였으나,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별거 아니겠죠.”
싱겁기는.
***
교실에서 나오자마자 향한 페이의 공방.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건만 페이가 훨씬 먼저 도착했나 보다.
진지한 얼굴로 플라스크와 시험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페이. 제법 중요한 과정인지 이쪽에 힐끗 시선만 던진다.
“왔어 후배님? 잠시만 기다려 봐. 이제 섞기만 하면 되거든.”
“이쪽은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
“…화난 거 아니지?”
“…보통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체 무슨 사고회로를 거쳐야 조금 전의 말이 화난 것처럼 들리는 건데.
피식 웃으며 뒤편 쇼파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추욱 늘어져 있자니, 카를라와 엘리샤가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움직임으로 컵과 접시를 꺼냈다.
그리고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둘.
“뭐로 마실래?”
“전 주인님이랑 같은 거요!”
“어머? 전 언제나 먹던 걸로 부탁드려요.”
“오케이.”
자잘한 물건들은 카를라와 엘리샤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만, 음식 종류는 내 인벤토리에 보관한다.
아공간 주머니는 어디까지나 공간이 확장됐을 뿐 시간은 멀쩡히 흘러가지만, 인벤토리는 들어가는 순간 시간까지 멈춰버리니까.
그런 이유로 음식 같은 상하는 물건은 전부 내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다닌다.
“어디 보자….”
우선은 엘리샤가 좋아하는 엘븐 티부터 꺼냈다.
엘프가 자주 먹는다고 엘븐 티라는 이름과 프리미엄이 붙었지만…내가 마셔보니 그냥 박하향이 추가된 녹차 맛이더라고.
딱 좋은 온도로 달아오른 주전자를 엘리샤의 컵에 따라주고,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이러면 다음에 꺼낼 때도 지금과 거의 온도가 달라지지 않았겠지.
그다음은 내가 마실 건데…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슬슬 좀 덥더라.
평범한 물을 꺼내 나와 카를라의 컵에 따르되, 추가로 간단한 마법을 사용했다.
“아이스.”
허공에 떠오른 얼음 조각을 3개씩 컵에 담았다. 그리고는 짐짓 뿌듯한 표정으로 카를라에게 컵 한쪽을 건넸다.
“자.”
“술…인가요?”
“아니? 그냥 얼음물인데?”
“…….”
묘한 표정으로 루비색 눈동자를 깜빡이는 카를라.
마치 20살 된 기념으로 사고 싶은 거 사라고 용돈 줬더니, 서점에서 월정액 회원권 끊고 온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 같은 시선이다.
뭐지.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지.
스윽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치만 술은 맛없잖아.”
“…나중에 제가 맛있는 와인 추천해 드릴게요 주인님.”
그만둬. 나를 그런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 정말로 이 세상의 술이 맛없어서 안 마시는 거라니까.
아, 깔루아 밀크 마렵네.
물론 이를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투덜거리며 얼음물이나 마셨지만.
대충 그런 느낌으로 미묘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티타임이 반쯤 끝났을 무렵.
“됐다아…!”
페이가 양손을 번쩍 들고 뿅뿅 점프하기 시작했다.
뒤에서도 보이는 옆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을 한참이나 감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대체 뭘 만드셨길래 그렇게 좋아하세요 페이 선배?”
“…핫! 그, 그게.”
부끄럽다는 듯이 한참을 꼼지락거리고서야 손에 든 플라스크를 내밀었다.
약간의 점성이 있는 투명한 액체.
“이거…태닝 로션이야.”
“태닝 로션?”
“응. 며칠 뒤에 정의로운 광명의 본산으로 간다고 했잖아? 태양신이기도 한 만큼 그 근처는 햇빛이 강하다고 들었거든?”
“설마….”
입을 떡 벌리자, 페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음습해 보이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힛! 맞아! 이걸 바르면 살을 이쁘게 태울 수 있어! …갈색으로 탄 후배님…하지만 거기는 여전히 하얗겠지…흐흐흫….”
“…….”
성지聖地를 성지性地로 만들 생각으로 가득 찼구나.
진짜 제정신이 아닌 발상.
“그거 몇 개나 더 만들 수 있어요?”
싫다고 한 적은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리스가 자그마한 가슴을 내민 건지 말랑한 배를 내민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귀여운 자세를 잡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는 개개인의 대답이 전부 다르면서 전부 정답일 수 있는 문제네. 허나, 감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입에 담아보자면….”
“담아 보자면?”
“사람은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살아가는 거라네!”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한 내용이긴 하네. 동시에 뜬금없는 말이기도 하고.”
페이에게 태닝 로션을 넉넉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향한 저택.
일전에 고생해서 지원군을 불러 모아왔을 이리스에게 비행기를 태워주기도 하고, 중위 마법사에 오른 걸 자랑하기도 하며 하루를 지냈다.
이후에는 뭐…오랜만에 이리스를 한껏 귀여워해주고서 기절하듯 잠들었지.
그리고 지금으로 이어진다.
파밀라 가족이 신경 좀 써준 건지 그럭저럭 호화스러운 메뉴. 그 앞에서 이리스는 재차 선언했다.
“사람은 먹어야 움직일 수 있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가지가 더 먹고 싶네.”
“…이거 먹을래?”
애도 아니고 이게 뭐람.
내 몫의 가지 구이를 절반 덜어 이리스 쪽에 옮겨주었다.
평범한 가지 구이가 아니다. 속에는 다진 고기를 넣고, 겉에는 새콤달콤한 소스를 바른 고오급 가지 구이지.
이게 좀 맛있긴 해.
그렇게나 먹고 싶어 하던 이리스였으나, 막상 내가 덜어주자 흠칫한 표정이 되었다.
이를 바라본 페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후배님의 O지….”
“가지 말하는 거죠? 그거 가지 말하는 거 맞죠?!”
아침부터, 그것도 밥 먹으면서 말하기엔 좀 그렇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