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 또한 신성력으로 치환되며, 기존의 빌드를 내다 버리는 꼴.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본단에 가는 거다. 헬레나를 사도로 삼고, 나는 그냥 놔두라고 본인과 쇼부 쳐야지.
어찌 됐건 최종적으로 모든 악신을 토벌할 거라는 목적을 밝히면 조금 아쉬워하긴 해도 붙잡진 않을 거다.
…저번에 방방 뛴 걸 봐서, 의외로 방정맞을지도 모르지만.
정의로운 광명은 관대한 신이니까.
그런 내 속내도 모르고 기뻐하던 헬레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전에 말했던 대로 방학 사흘째에 아카데미 정문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아, 그 부분 말입니다만…인원이 조금 많아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저희 교단 최고의 마차를 보내준다 했으니 걱정 마세요.”
“아하? 다행이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로에 적당한 던전이 있으니, 우연히 발견한 척 클리어할 수 있으면 클리어하고 가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헬레나와 아카데미의 근황 이야기를 조금 나누며 길을 걷다가 중앙 광장에서 헤어졌다.
헬레나는 본인의 기숙사로. 나는 페이를 데리고 이오나 전용 수련장으로 향했다.
A반 학생들이 그러하듯 교수들도 개인 수련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듣기로는 시설이 훨씬 좋다는데….
대부분의 교수가 중위 마법사인 걸 감안해 중급 마법에도 버틸 수 있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몸이 완전히 낫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미리 이오나에게 수련장을 빌리기로 말해뒀다.
“여긴가?”
“맞는 것 같은데 후배님?”
조금 복잡한 길을 건너 도착한 건물. 이오나 프란체스카라는 명패가 적힌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그 즉시 열리는 문.
끼이익.
새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얀델. 당신 이제 정말 멀쩡한 거 맞죠?”
“어서 와! 어서 와! 페이 학생도 안녕!”
카를라, 엘리샤, 이오나를 차례대로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마친 뒤 수련장의 중심에 섰다.
“자, 그럼 함 해볼까?”
내가 정말 중위 마법사에 오른 게 맞는지 시험해봐야 할 것 아닌가.
이거 누워있는 내내 신경쓰였다고.
“자, 그럼 함 해볼까?”
내가 멜로니아와 싸우며 중급 마법을 사용했고, 상태창에도 마법사 특성의 랭크가 오르며 중위 마법사로 승급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중위 마법사에 오른 게 맞는가. 그 확신이 제대로 서질 않는다.
그러니 한번 시험해봐야지.
누워있는 동안은 마나 회로가 불안정하니 최대한 마법을 자제하고, 만약 사용하더라도 간단한 마법 위주로 사용하라는 소릴 들었거든.
덕분에 뒹굴거리는 내내 엄청 신경 쓰였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고 있자니, 뒤따라온 페이가 가슴팍에서 기다란 스태프 하나를 꺼냈다.
“후배님. 여기.”
“…아니, 찌찌 주머니 뭐예요 페이 선배.”
“무, 뭐어?! 그런 거 아니거든! 봐봐! 가슴골이 아니라 여기! 가슴 주머니에 아공간 주머니를 넣어둔 거야!”
펄쩍 뛰며 부정하는 페이. 각도 때문에 가슴 사이에서 꺼내는 걸로 보였나 보다.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데…대체 왜 그런 곳에 아공간 주머니를 넣어둔 거예요? 설마 오히려 착각 받고 싶어서….”
“후배님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냥 치마 주머니에 넣으면 꺼낼 때 가슴이 방해되서 그런 것뿐이야!”
“무…슨?”
밑에서 꺼내면 방해될 정도로 크다고…?
슬슬 페이의 크기에 익숙해진 다른 여인들도 화들짝 놀랐는지 입을 쩍 벌린다.
상당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이오나마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응. 이 자리에 이리스가 없어서 다행이네.
피식 웃으며 페이가 건넨 스태프를 받아들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이건…페이 선배가 만든 건가요?”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금속 몸체. 그 끝에는 새하얀 수정 같은 것이 단단히 고정되어있었다.
스태프는 마력 전도율과 편의성을 생각해 나무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건 오로지 내구성 하나만 보고 만든 느낌.
실제로 아주 기초적인 증폭과 유도 성능을 지니고 있는 주제에, 무게는 어지간한 한손검보다도 묵직하다.
팔기 위한 물건보다는 실험작 같네 이거.
내 시선을 느낀 페이가 자랑스레 가슴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후배님은 멀리서 마법만 쏘는 전통적인 마법사와는 거리가 멀잖아? 오히려 적들 사이를 휘젓는 배틀 메이지에 가깝지.”
“뭐…조금 더 정확히는 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죠. 거리가 있으면 있는 대로 싸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싸우니까요.”
이 대답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잔뜩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는 카를라와 이오나.
급기야는 서로 악수까지 하는 모습을 힐끔대고 있던 것도 잠시. 이내 페이가 우쭐대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만드는 스태프는 전부 후배님을 위한 거야. 그러니 후배님이 근접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게 증폭률을 낮추는 대신, 내구도에 조금 더 신경 쓴 거지. 그…후배님은 힘도 세잖아? 좀 무거운 게 오히려 좋지 않을까 싶었어.”
“확실히. 이거라면 그냥 봉처럼 써도 괜찮겠네요. 저라면 한손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한 무게고요.”
이만한 금속 봉으로 머리를 맞으면 다들 골로 가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직접 무기를 맞댈 때, 단검보다 훨씬 편하겠지.
실드가 있긴 하지만 난전에서는 꽤 취약하더라.
“지금은 성능이 부족하지만 이리스 님에게 인챈트도 배우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을 거야. 정 뭣하면 중심부에 마목魔木을 박고 그 주변을 철로 두르는 방식도 있고.”
“좋네요.”
스태프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어떤 식으로 휘둘러야 타격을 극대화 시킬까 고민하는 사이.
페이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내 팔을 붙잡았다.
“다 들었어. 후배님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스태프가 불타버렸다면서? 그래서 다음 마법을 쓸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태워 먹어야 했고.”
“네? 뭐…그거야 제가 좀 폭주 중이기도 했고, 마력을 되는대로 쑤셔 박기도 해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런 장비는 용납 못 해.”
페이의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중요한 순간에 못 쓰게 돼버려서 모든 부담을 사용자가 짊어져야 한다니. 그런 건 없느니만 못한 거야.”
“…….”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페이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발언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페이 선배. 잘 쓸게요.”
“흐헿…아직 시제품이니까 금방 더 좋은 거 만들어줄게!”
평범하게 기뻐하는 표정이건만, 어째 음침해 보이는 페이의 미소를 뒤로 하고 수련장 반대편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멜로니아와 싸웠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며 대량의 마력을 뿜어낸다. 마력 스탯이 올라서인지 저번보다 훨씬 강렬한 느낌.
그렇게 체내는 물론이고, 주변 일대까지 내 마나로 장악했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눈을 떴다.
이미지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 꽂히는 별빛.
내 명령만을 기다리는 마나에게 강한 의지를 담아 명령했다.
“『천상에 낙원 있고, 지상에 기원 있으니. 영원에 이르는 길은 요원한 것이라.』”
우웅-
내 의지에 호응한 마나가 바삐 움직이며 그 형태를 달리한다.
스태프 끝에서 거대한 백색 마법진이 그려지며 중앙에 맺히는 빛나는 구체.
준비가 끝난 마법을 향해 시동어를 읊었다.
“『반짝여라. 스타라이트 레인.』”
이를 신호 삼아 구체가 높이 쏘아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떨어지자, 그대로 분열하며 가속한다.
광범위하게 떨어지는 빛의 폭격.
수련장을 절반 넘게 채운 화려한 마법에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내가 정말….
“꺄아아아아!! 정말로 주인님이 중급 마법을 쓰셨어요!”
“흥! 제 반려가 될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죠.”
“???”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카를라와,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실실 웃는 엘리샤.
뭔데. 왜 너희가 더 기뻐하는데?
이제는 아예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도는 둘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만 나온다.
그렇게 한참을 꺄악꺄악 거리며 좋아하던 카를라와 눈이 마주치자, 쪼르르 달려와 내게 안겨들었다.
반사적으로 등을 토닥여주자 한층 더 깊숙이 파고들며 이쪽을 올려다보는 카를라.
“벽을 넘으시고, 공명도 감을 잡으신 것 축하드려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가 좋았을 뿐인 거 아시죠? 각성하시겠다고 일부러 위험에 빠지시면 안 돼요?”
“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 부분은 걱정하지…잠깐. 공명? 그걸 성공했다고?”
“네? 모르셨어요?”
카를라가 내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따라 갸웃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헤실헤실 웃는 카를라.
“헤헤…헙!”
혼자 웃다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주인님. 방금 공명 쓰신 걸 모르고 계셨어요?”
“어…그냥 중급 마법만 쓴 거 아냐? 따로 의식한 게 없는데.”
“그럴 리가요. 스타라이트 레인의 위력은 중급 마법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한다는 거 아시나요?”
“그야 뭐. 빛 속성 마법인 데다가 범위 중시 마법이니까.”
빛 속성 마법은 상성 상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지만, 순수한 파괴력 자체는 부족한 편이다.
거기에 스타라이트 레인은 여러 개로 쪼개지며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마법. 한층 더 위력이 줄어들 수밖에.
실제로 저번 전투에서는 잡다한 언데드를 몰살시키는 식으로 사용했었지.
“여기가 교수님들을 위한 수련장이라 튼튼한 것도 아시죠? 그런데 한번 마법이 떨어진 장소를 보세요 주인님.”
“응?”
카를라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살짝 금이 간 타일들이 천천히 수복되고 있었다.
“차지 영창을 했다면 모를까 통상적인 스타라이트 레인으로는 약간의 손상도 주지 못했을 거예요.”
“진짜…?”
“진짜로 진짜요. 저도 쓰는 거니 잘 안다구요.”
“그건…그렇겠네.”
나보다 카를라가 공명에 대해 더 잘 아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없던 실감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내 긴가민가한 표정을 본 엘리샤와 이오나가 다가왔다.
“얀델. 조금 전의 당신에게서는 미약하지만 분명 카를라와 비슷한 느낌이 났답니다.”
“응응. 공명이라면 그거지? 린델하이트 가문의 비전. 작년까지만 해도 직접 카를라를 가르쳐봐서 나도 잘 알아. 확실히 비슷했어!”
다른 사람들도 이리 말하니 진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상태창에 표기된 린트블룸 코어의 랭크가 C+에서 B+랭크로 올라갔었다.
랭크 뒤에 붙는 플러스는 고정형 특성이라면 추가 효과가 있다는 뜻이지만, 성장형 특성이라면 승급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가 중위 마법사가 됐으니 코어의 랭크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그렇다고 한번에 플러스를 달 정도는 아닐 터.
그렇다면 단순히 중위 마법사로의 성장 말고도 다른 요소가 더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게 공명이라면 얼추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문제가 있다면.
“난 정말 모르겠는데….”
진짜. 정말. 하나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금까지 공명을 배우려고 했던 고생이 허무해질 정도.
멍하니 스태프를 바라보고 있자니 카를라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너무 저랑 비교하실 필요 없어요 주인님.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나, 아직 저랑은 숙련도 차이가 클 테니까요. 다만….”
“다만?”
“마법을 쓰실 때. 느껴보신 적 없으신가요? 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두근거리는 느낌이라던가, 주변의 마나를 손에 쥐고 흔드는 느낌이라던가 그런 거요.”
“…짚이는 부분이 있긴 하네. 근데 그거 단순히 중급 마법을 쓰는 감각 아니었어?”
중급 마법부터는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확 늘어난다.
당연히 마법을 시전할 때도 체내에서만 돌던 마나가 밖으로 흘러나온다고 배웠다.
그렇기에 강한 마법일수록 전조를 쉽게 느낄 수 있다고 했었지.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주인님이 말씀하신 건 어디까지나 본인 안에서 완성된 주문이 바깥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주인님이 하신 건 자신의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주변의 마나를 다루시는 거고요.”
“으음.”
일전에 카를라가 보여준 공명의 예시. 그때 분명 주변의 마나가 카를라를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조금 전에 쓴 마법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나?
천천히 되짚어보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의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쪽이 훨씬 좋겠지.
온 오프는 물론이고, 하급 마법에도 적용할 수 있는 데다가, 정신을 집중하면 공명의 위력을 더 높일 수 있으리라.
이는 내가 시스템 보정에 기대 마법을 쓸 때와,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마법에 대해 배우고 쓸 때의 차이로 직접 느껴본 것이다.
“뭐, 연습하다보면 방학 전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시스템 보정이 없어도 나는 꽤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오늘 하루 칭찬만 들어서 그런지, 어깨가 절로 으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