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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92화 (192/230)

대주교는 외부로 내보이는 주력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어마어마한 성과지.

특히 언데드 창고와 추기경을 동시에 잃은 편협한 찬탈의 경우엔 전력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보면 될 정도.

애초에 3학년쯤에 얻어야 할 만신의 가호와 대적자 칭호를 이번 일로 얻었을 만큼 큰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빨라도 3학년 때 드래곤 하트를 살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기존에 남아있던 포인트가 700 정도였으니, 앞으로 약 1,300 정도면 드래곤 하트 조각을 살 수 있는 건가.

정말 1학년이 끝나기 전에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멍하니 행복회로를 굴리고 있던 도중. 이오나가 불쑥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자기 턱 밑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흔히들 꽃받침 자세라고 하는 자세로 방긋방긋 웃었다.

“어때 어때? 역시 이 이오나 교수님밖에 없지?”

“그…러네요?”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슬쩍 고개를 뒤로 빼자, 그만큼 쫒아오는 이오나의 얼굴.

젖힌다. 다가온다. 또 젖힌다. 또 다가온다.

그렇게 내 뒤통수가 벽에 닿고, 이오나는 거의 덮칠 듯이 내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어서야 한숨을 푸욱 내쉬며 물었다.

“…수고하셨어요.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에이 에이.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닌데~ 교수로서? 연상으로서? 그리고 이젠 연인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았으면 했을 뿐인걸~”

누가 봐도 고의로 말끝을 늘린 이오나가 그제야 턱에서 손을 떼고, 내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내가 원하는 건 별거 아냐. 그냥…이제 나도 얀델 학생이랑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으니까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

“깊은 이야기라 하심은?”

“얀델 학생의 목적이라던가, 마지막에 봤던 로브를 뒤집어쓴 지원군이라거나, 아카데미 차원에서 조사해도 나오지 않는 과거 같은 것들 말이야.”

“…그건 확실히 한 번쯤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언제가 좋으려나. 다음 주말…아니, 그땐 그냥 방학 첫날이잖아.

방학하면 땡하고 나가면 되는 나와 다르게, 이오나는 교수니까 조금 일이 있을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헬레나와 약속했던 날짜는 조금 여유가 있으니 그사이에 만나면 되려나.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쾅!

“오호호호홋-! 정신을 차렸다는 말은 들었답니다 얀델! 아침으로 직접 도시락을 준비해 왔으니 같이 먹도록 하죠! 물론 아카데미 밥이 더 맛있겠지만, 당신에게 선택지는 없답니다! 이미 싸 왔기 때문에…!”

어째서인지 잔뜩 신이 난 엘리샤가 힘차게 문을 열며 등장했다.

“엣….”

그리고 나와 이오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넋이 나갔는지 눈이 점처럼 변했다.

“응? 에? 그? 저기? 얀델? 이오나 교수님? 지금은 전투 중도 아닌데? 왜? 어라?”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대더니,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린 적 없는 부채를 툭 떨구….

“으아아악! 포스 그랩!”

떨구기 전에 염력 마법으로 캐치했다. 덤으로 엘리샤도 번쩍 들어 같이 데려왔고.

이오나가 그사이에 분위기를 읽고 호다닥 떨어져 준 덕분에 생긴 빈자리에 엘리샤를 앉혔다.

“…핫! 너무 깜짝 놀라서 그만 실수하고 말았네요.”

그러자 정신을 차린 엘리샤가 잠시 자세를 바로 하고는 우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먼저 병문안을 와주셨군요 교수님. 얀델의 노예를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맞아. 맞아. 그러고 보니 엘리샤가 노예가 된 이후로는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어머? 그렇게 보이나요? 아이참, 아직 나중의 일이라 티내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죠.”

말은 그리하면서도 입가를 움찔거리는 것이 조금 기뻐 보인다.

나중 일이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랑 평범한 주종관계가 아님을 은근슬쩍 어필하는 것만큼은 확실한 모습.

이오나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공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흥미가 돋은 모양이네.

정작 엘리샤는 그런 이오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조심스레 말을 잇는 엘리샤.

“그나저나 조금 전의 일은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었던 거겠지요? 설마 아카데미 내부에서 학생을 덮치는 교수가 있을 리 없잖아요. 저번 같은 긴급사태도 아니고….”

“아하? 아하? 그 말대로야. 여기엔 사정이 있어! …응. 아주 뜨겁고 진한 사정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는 이오나.

그 모습에 재부팅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고장 났는지, 엘리샤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만족스레 키득이는 이오나를 한번 노려보고는 엘리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일단 들어 봐 엘리샤. 이게 어떻게 된 사정이냐면…”

“사정…사정…사정….”

내가 말을 걸어도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는 엘리샤. 나도 모르게 단어 선택을 실수했네.

빨리 다른 곳으로 주의를 환기하려 했지만…그보다 엘리샤의 폭발이 한발 더 빨랐다.

“…뺘아아아아악!!”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육지를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니다 독수리에게 납치당한 오리너구리처럼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엘리샤.

“뺘아아악! 삐야아아악! 뺙…!”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서럽다는 것만큼은 전해진다.

황급히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줬지만 그럼에도 엘리샤의 패닉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이 사태의 주범인 이오나는.

“미안!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오늘 밤에 필요한 서류 챙겨서 다시 올 테니까 그때 다시 봐!”

손을 흔들며 냅다 도주해버렸다.

“나중에 두고 봐요 진짜…!”

“아하하하! 맞다, 치료받느라 시험은 못 보게 됐어도 보여준 게 있으니 만점으로 처리해뒀어! 그럼 이제 진짜 안녕!”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이오나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엘리샤는 반듯한 이마를 내 가슴에 콩콩 들이박으며 절규했다.

“삐꺄아아악!”

음.

돌아버리겠네.

이후. 아무리 여자가 늘어도 소홀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고서야, 엘리샤는 사람의 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엘리샤의 패닉 사건 이후.

다른 여인들도 깜짝 놀라 삐악거릴까 봐 조심스레 이야기를 전했지만…의외로 다들 간단히 납득하고 넘어갔다.

이미 내게 묶인 신세인 데다가, 4명이나 5명이나 다를 바 없다나 뭐라나.

나로서는 엘리샤처럼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아도 속으로 낑낑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일부다처 제도나 노예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진작에 마음의 준비가 끝난 문제였나 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가끔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고받고, 서류에 싸인 좀 하고, 그러다 한명씩 교대로 오는 여인들이랑 꽁냥대기도 하고….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다 보니, 드문드문 끊겨있던 마나 회로가 멀쩡해졌다.

즉, 퇴원할 시간이 됐다는 소리다.

“조금 아쉽네요 페이 선배.”

“으응. 그러게. 이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은 의외로 귀하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또 다쳐서 오면 안 된다? 나 진짜 울 거야?”

“명심할게요. 이런 걸 놔두고 못 만지게 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나란히 서 있는 페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조금 깊숙이. 큼직한 페이의 가슴에 손이 닿을 정도로 말이다.

쪼물쪼물.

“읏…후배님은 짓궂어.”

슬쩍 볼을 부풀릴 뿐 이쪽을 밀어내진 않는 페이. 오히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기대오기까지 한다.

내려다본 입꼬리가 느물거리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네.

부풀어 오른 페이의 볼을 꾹꾹 눌러대며 놀던 것도 잠시. 마지막으로 놓고 간 물건이 없는지 한번 확인한 후, 페이를 옆구리에 끼고 치료실을 나섰다.

덜컥.

“좋은 아침입니다 형제님. 아쉽게도 면회 허가를 받지 못해, 오늘에서야 얼굴을 뵙게 됐군요. 무사히 회복하신듯하여 다행……흡!”

그리고 말하던 도중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헬레나와 마주쳤다.

하나로 땋아 내린 화사한 금발이 살랑인다.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금안은 나와 페이 사이에서 마구 흔들렸고.

뭐지?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까지 만질 수는 없으니 가슴에서 손은 뗐는데.

왜 이러나 싶어 지금의 나와 페이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푹 숙인 고개. 긴 앞머리 때문에 보이지 않는 눈. 움찔대는 입가. 내게 안기듯 기댄 몸.

음. 누가 봐도 정사 직후의 모습이군. 대충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겠지. 일전의 결투 이후로 나와 페이가 가까운 사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헬레나 사제님. 걱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덕분에 빨리 나을 수 있었네요.”

“나, 나도! 고마워…정의로운 광명 교단에서 응급처치를 해줬다며? 덕분에 후배님이 큰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었어.”

조금 우물쭈물대면서도 똑바로 감사인사를 전하는 페이. 묘한 대견함에 부스스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으읏…그마! 내가 선배인데…!”

내 손길이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흔들리는 페이의 머리.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걸까.

얼굴을 살짝 붉힌 헬레나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형제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희 주께서 선택하신 분 아닙니까. 추기경께서도 오히려 영광이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럽네요.”

“얀델 형제님께선 그럴 자격이 있으니 부담 갖지 마시지요. …실제로 저번보다 훨씬 찬란한 가호를 받으셨잖습니까.”

나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슬쩍 눈을 감는 헬레나.

태양신의 가호 랭크가 A+까지 오른 걸 느낀 건가.

언제 흠칫했냐는 듯,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하기 그지없다.

어설프게 성호를 따라 하며 마주 인사하고서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헌데 헬레나 사제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신 것 같은데, 무언가 볼일이라도 있으시나요.”

“앗, 네. 그렇죠. 우선…이것부터 받아주시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핀 헬레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잘 포개진 옷더미를 건넸다.

“이건?”

“일전에 부탁하신 수녀복. 전부 준비해왔답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설마 하나 더 필요하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하하…그게 말입니다….”

“후후. 그럴 줄 알고 사실 하나 더 준비했죠! 이거면 됐죠?”

입으로 짜잔 소리를 내며 수녀복을 한 세트 더 꺼내 얹어주는 헬레나.

재빨리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헬레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뭘 이런 걸 다…역시 헬레나 사제님은 참 생각이 깊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걸로 칭찬받아도 기쁘지 않아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일은….”

“비밀이라는 거죠? 당연히 지켜드려야죠. 대신 헬레나 사제님도 비밀입니다?”

“예에. 그나저나 이 손 좀….”

“어이쿠. 제가 정신이 좀 없었네요.”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부끄럽다는 듯 바로 빼서는 자신의 가슴 앞에서 모으는 헬레나.

펑퍼짐한 수녀복에 가려진 몸매가 손에 눌리며 그 윤곽을 살짝 드러낸다.

“…후배님?”

페이의 미심쩍어하는 목소리에 바로 시선을 돌렸지만.

“크흠.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걸 가져다주시려고 여기까지 오시다니.”

“겸사 겸사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그보다 조금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시 무슨 일이 있긴 하셨군요. 말씀해주세요.”

“실은 얀델 형제님과 이오나 교수님의 이번 활약에 겁을 먹은 건지, 사교도 놈들이 지부를 버리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네? 도망이요? 사교도가요?”

모든 사교도는 기본적으로 광신도다. 대업을 위해 숨어다니지만, 들켰다고 해서 도망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부를 지키는 건 신이 내린 사명이니까.

직접 신탁을 받거나, 본단에서 받은 신탁의 내용에 의거한 명령을 받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지부를 버리지 않는다.

죽음을 순교로 여기며 두려워하질 않는데 왜 도망가겠는가.

하지만 이를 반대로 말하면 확실한 명령만 있다면 언제든 지부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예에.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아직 위치만 파악하고 지켜보던 지부가 몇 있는데…전부 하룻밤 사이에 텅 비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허어.”

“그래서 그으….”

잠시 머뭇거리던 헬레나가 무척이나 비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약속드렸던 방학 중의 사교도 토벌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

어, 음.

그러니까. 지금 사교도를 조지지 못하게 된 걸로 이렇게 미안해하는 건가?

내가 정의로운 광명의 총애를 찐하게 받고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취급 받으면 좀 몬가몬가인데.

어색하게 웃으며 헬레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이렇게 된 거 조금 계획을 변경해볼까요?”

“변경 말인가요.”

“네. 마침 광명 교단의 본단을 방문해보고 싶었는데…괜찮을까요?”

“흐어억!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주께서도 얀델 형제님이 오시는 걸 반기실 겁니다!”

한 번에 회복되어, 해맑게 웃는 헬레나.

그래. 어차피 한 번쯤은 방문했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정의로운 광명은 나를 사도로 삼으려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단 말이지.

신의 사도가 되면 좋든 싫든 교리에 묶여 살 수밖에 없다. 정의로운 광명은 비교적 자유분방한 신이지만, 그래도 규율은 엄연히 존재하거든.

무엇보다 내 특성은 마법사에 맞춰져 있는데, 정식으로 사도가 되면 강제로 성직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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