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
그러고 보니 피 깔때기라고 했던가. 무슨 뱀파이어 조약에 위반되는 거라고 했었다.
“이 효율적인 걸 왜 금지하는 건지.”
“까딱 잘못하면 비인도적이게 되니까? 뭣보다 얀델 학생도 이미 느껴봐서 알잖아. 계속 피를 빨리게 된다는 건….”
“계속 기분 좋아져서 중독된다는 거죠? 대충 이해했어요.”
지금처럼 어쩌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매일 반복한다면 분명 의존증 비슷한 게 생겼을 거다.
“이야 이야. 얀델 학생의 멘탈이 튼튼해서 다행이라니까? 보통이었다면 진작에 쾌락의 노예가 되서 제 피를 빨아주세요 이오나 님~ 같은 소리를 했을 텐데 말이야.”
“저한테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던 거예요?!”
“내가 아니라 얀델 학생이 한 건데? 설마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고 있었어?!”
서로 놀라는 나와 이오나.
“당연히 저는 몰랐죠! 애초에 제가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건 확실하고 빠르게 죽이는 방법 정도예요!”
“사실 위험한 건 얀델 학생이 아닐까?!”
식겁하며 벌벌 떠는 이오나. 이제와서 새삼스럽기는.
다만 보통은 진작에 정신이 나갔을 거라는 내용이 좀 신경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며칠 반복하면 좀 위험하겠다 싶긴 했어도 정신이 어그러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건 그건. 얀델 학생의 정신력이 대단했거나, 내성이 뛰어나거나, 그냥 나랑 궁합이 좋았거나 셋 중 하나일 거야! 아마 궁합이 좋았던 것 같지만!”
“오….”
궁합도 궁합이지만, 거기에 내성도 올라서 괜찮았을 거다.
이번에 새로 얻은 대적자 특성에 정신계 내성 증가 효과가 있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얼추 납득이 가네.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오나가 얼굴을 붉힌 채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튼 아무튼. 얀델 학생이라 다행이었던 거지 사실은 지인짜 위험한 일이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만약 이오나 교수님이 조약 위반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면 제가 어떻게든 사 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뭐어?! 얀델 학생이 먼저 목을 내밀었으니 그 정도는 아니야!”
뭐야. 아니었나.
머쓱해 하는 내게 이오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얀델 학생이 정식으로 내 흡혈 파트너가 되는 건 어때?”
“흡혈 파트너요?”
뱀파이어에게 흡혈은 식사와 야스의 중간 그 어디쯤에 있는 행위. 즉 흡혈 파트너란.
“섹파….”
“아냐! 아냐! …어딘가에는 그런 느낌으로 흡혈 파트너를 모집하는 뱀파이어도 있겠지만 보통은 아냐!”
고개를 붕붕 흔드는 이오나의 설명에 따르면 뱀파이어들의 후원 관계 같은 거라고 한다.
수명이 긴 만큼 대부분의 뱀파이어는 본신의 무력은 물론이요, 쌓아온 재력이나 권력도 상당한 경우가 많다.
흡혈 파트너는 뱀파이어가 가진 이런저런 것들을 대가로 피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하긴. 피 좀 빨리고 빽을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인류의 편에 선 뱀파이어는 조약에 의해 함부로 피를 빨 수 없다지만, 빨리는 쪽이 허락한다면 직접 흡혈이 가능해진다.
흡혈 파트너는 ‘난 이 뱀파이어에게라면 피를 빨려도 괜찮아요.’ 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들이고.
여기서 중요한 건 아무한테나 빨려도 괜찮다는 게 아니라, 특정 뱀파이어에게만 허락한다는 점.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후원자들이 인재를 찜해두는 것처럼, 이 녀석은 예비 클랜원이라고 점찍어둘 때도 흡혈 파트너로 삼는다나.
섣불리 뱀파이어가 됐다가는 몇 백 년 간 후회할 수도 있고, 그 탓에 클랜 분위기가 흐려질 수도 있으니 일종의 인턴 기간을 두려는 거겠지.
“근데 전 뱀파이어가 될 생각은 없는데요….”
“나도 얀델 학생을 뱀파이어로 만들 생각은 없어.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피 깔때기 건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야.”
“흐음. 어젯밤의 일이야 누가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저번 전투 중의 일은 이미 알려졌겠죠.”
“응응. 멀리서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사용한 피와 마력이 어마어마한 것도 있으니 금방 알아내겠지.”
그러니까 아예 내가 이오나의 파트너였다는 걸로 삼겠다 이건가.
포션을 이용한 무한 착정…아니 무한 흡혈은 위법이지만, 비상시였고 흡혈 파트너였다는 핑계를 대면 정상 참작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머릿속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정리하느라 입을 다문 것이 걱정된 것일까.
이오나가 돌연 이불에서 나와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해 너무해…날 이렇게 만들고…서로 책임지자고 했으면서…그날 밤은 한순간의 불장난이었던 거야?!”
“아니, 지금 몸으로 그런 말을 하면 몬가몬가잖아요!”
흘러내리는 핏빛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크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과 도드라지는 골반.
…그리고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
어제 한 번도 빼지 않고 몇 번이고 자궁에 사정한 탓에 정액이 빠지지 않아 저리된 것이다.
재생력이 뛰어난 뱀파이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만, 부푼 배를 볼 때마다 흠칫하게 된단 말이지.
내 시선을 느낀 이오나가 자신의 배를 끌어안으며 짐짓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흑흑…그래도 이 아이만큼은 어떻게든…!”
“아악! 할게요! 흡혈 파트너고 뭐고 할 테니까! 이제 그만 배 좀 비우세요!”
“알았어 알았어!”
표정을 싹 바꿔, 싱글벙글 웃으며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벌린 이오나.
그런 이오나가 볼록 튀어나온 자신의 아랫배를 꾸욱 누르자.
“흐으읏….”
쥬르르륵-
내가 밤새 싸지른 대량의 정액이 흘러나오면서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허벅지에 하얀 자국을 그대로 남긴 이오나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됐지 됐지? 그럼 나중에 바로 정식으로 문서 작성하러 가는 거다? 아니, 내가 가져올 테니까 얀델 학생은 쓰기만 하면 돼!”
“하아…알았다니까요. 그나저나…으음….”
잠시 이오나의 모습을 살펴보며 침음을 삼켰다.
“왜 그래? 혹시 방금 걸로 흥분했어? 한 번 더?”
“아뇨. 슬슬 다른 사람들이 올 테니 정리하고 옷이나 입죠.”
“칫칫. 왜 그렇게 쳐다본 건지 알려주기 전까지는 안 입을 거야!”
손가락을 까딱이며 혀를 차는 이오나. 이전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이나, 오늘은 뭐랄까…조금 더 친근해진 느낌이네.
정액 범벅이 된 하반신을 훤히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이오나의 모습을 재차 감상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고. 피임 마법은 쓰셨나 해서요.”
“응? 안 썼는데?”
“…네?”
순간 숨이 턱 막힌 느낌. 지금부터라도 쓰면…괜찮나? 사놓고 안 쓴 피임 포션이 인벤토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혼자 허둥대는 내 모습이 재밌었던 걸까. 이오나가 키득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피임 마법을 안 쓴 건 맞지만, 뱀파이어는 다들 불임이니까.”
“앗.”
생각해 보니 그러네. 뱀파이어는 권속화로 동족을 늘리지, 성교를 통해 아이를 임신하진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인지 꼴림 포인트가 여타 종족과 다르다나.
“헤에 헤에.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이네. 그거 알아? 아기를 가질 수 없어 아쉬워하는 뱀파이어가 한둘이 아니라는 거?”
“그런가요?”
“응. 안 가지는 것과, 못 가지는 건 다르잖아? 재생력이 너무 좋은 탓에 수정체가 착상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몸이거든. …그래서 로드가 내게 그렇게 잘해줬는지도 모르겠네.”
아련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갑자기 방긋 웃으며 더블 피스를 날리는 이오나.
“뭐! 나는 별로 아이 생각이 없으니 괜찮지만!”
그리고는 정사의 흔적을 지워내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오나와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는 않지만, 깊은 관계가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했으니 일단은 그쪽에 맞춰줘야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생력이 그 정도로 좋으면 처녀막도 재생되는 거 아니에요?”
“…헉!”
가벼운 농담이었건만, 이건 생각 못했는지 황급히 손을 다리 사이로 집어넣는 이오나.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며 끈적해진 손가락을 자랑하듯 내밀었다.
“후우…다행이야! 제대로 뚫려있어!”
“엇, 넹.”
절대 아쉬워한 건 아니다.
정말로.
괜시리 목을 좌우로 꺾으며 스트레칭하던 도중. 반쯤 옷을 걸친 이오나가 돌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손을 쭈욱 뻗어 건너편에 있는 창문을 반쯤 여는 이오나.
환기라도 하려는 거겠지.
마침 일출 때였는지 주황빛을 토해내는 창문. 얇은 커튼은 바람에 휘날리며 하늘거린다.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을 등진 이오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내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처럼 느껴져?”
“네?”
“아니면 이렇게 말해볼까?”
이오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며, 실로 이오나다운 표정을 짓는다.
“키스할래?”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 맛이 나지 않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말랑말랑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오나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나도 슬슬 가봐야 하는데…그 전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
“괜찮긴 한데…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걱정 마. 걱정 마. 좋은 이야기니까.”
키득이며 중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원을 그리는 이오나.
“이게 좀 들어올 거야.”
“아, 그건 카를라한테 들었어요. 가능하면 돈보다는 현물 위주로 받으려고요.”
“에이…벌써 들었어? 그나저나 현물이라니? 영약 같은 거?”
“영약도 좋고. 장비도 좋죠. 희귀한 재료도 상관없고요.”
“응응. 얀델 학생은 돈에 곤란한 것 같지 않으니까 그게 더 좋겠지. 뭐…돈이 다 떨어지더라도 내가 그동안 모아둔 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하하…그건 든든하네요.”
뭐, 내 인벤토리의 골드가 다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그래도 선뜻 지갑을 공유하려는 이오나의 마음은 고맙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고 있자니, 침대에 걸터앉은 이오나가 다리를 붕붕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포인트가 들어올 거라는 소식도 알고 있겠네. 어떻게 할래? 이번에도 뭔가 특권을 요구할래? 아니면 그냥 포인트로?”
“어…?”
외부에서 받을 현상금이나 공적치만 생각했지 포인트는 까먹고 있었는데.
“자, 잠시만요 교수님. 제가 이번에 받는 포인트가 얼마죠?”
“어라? 어라? 이건 못 들었나 보네!”
한 과목에서 1등을 하면 10포인트를 받는다. 전 과목 1등을 하면 추가로 100포인트를 더 받고.
보통 포인트는 이렇게 몇십…혹은 몇백 단위로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우등생이라도 졸업까지 2,000포인트조차 못 모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 보통은.
사교도는 대주교 하나만 잡아도 1,000포인트나 주거든.
뭐…이걸 전부 받아 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대주교는 못 해도 평균적인 중급 마법사와 동급. 전투에 특화된 교단이라면 그 이상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
당연히 학생 수준에서 잡을 수 없고, 설령 쓰러뜨리더라도 누군가와 협력해야 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토벌의 기여도를 산정해 그 퍼센트만큼 1,000포인트에서 덜어내 지급하는 방식을 채용한다.
10%만큼 기여했다면 100포인트를 받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나는 혼자 멜로니아를 쓰러뜨렸고, 그전에는 카를라와 엘리샤와 함께 소피아도 쓰러뜨렸다.
노예는 내 소유물 취급이니 사실상 단독으로 대주교만 2명을 무찌른 셈.
거기에 대량의 몬스터를 죽이고, 이오나를 도와 나머지 대주교 5명과 추기경인 아일라까지 쓰러뜨리는 데 도움을 줬다.
몇 퍼센트나 기여도가 인정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천은 될 터. 거기에 2천을 더하고, 기존에 남겨둔 포인트를 더하면….
이거 잘만하면 1학년이 끝나기 전에 드래곤 하트의 파편을 살 수 있는 거 아냐? 그거 1만 포인트짜리잖아.
너무 작아 제작 재료로는 못 쓰고, 영약 삼아 먹는 수밖에 없지만…그렇다 해도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 하트.
그 효과는 차고도 넘치리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자, 이오나가 양손으로 V를 그리며 히죽였다.
“무려 무려. 8천 포인트나 주기로 이사장님이랑 이야기가 끝났어!”
“8천이요?!”
이 정도면 절반 좀 넘게 기여도를 인정받은 건데?!
“응응. 얀델 학생이 얻어온 정보로 사교도 지부를 털었던 것, 거기서 얻은 정보로 회합 장소를 덮쳤던 일, 그 외에도 쓰러뜨린 대량의 몬스터나 천천히 죽어가던 내게 피를 먹여 역전의 기회를 만들고, 다른 대주교들의 합공을 파훼한 것까지. 전부 이사장님한테 어필했더니 그렇게 됐지 뭐야!”
“아무리 그래도 8천은…아니, 받을 만 한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은 각 교단의 대주교를 하나씩 줄이고, 추기경까지 하나 잡은 사건이다.
아직 때가 되질 않아 사도 임명이나, 악신 강림은 불가능하니 사실상 추기경이 최대 전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