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84화 (184/230)

이를 향해 이오나가 손을 뻗자, 누가 잡아 늘인 것처럼 길쭉해지며 쥐기 딱 좋은 크기가 되었다.

꼬챙이인지 창인지 모를 투박한 생김새. 하지만 끝 부분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무구.

단순히 혈조술로 만들어낸 무기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혈액의 밀도가 높다. 거기에 창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위협적인 기세는 또 어떻고.

척 봐도 전투 초반에 뻥뻥 날려대던 고위 마법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마법이다.

이리스 일행이 준비해둔 마법이 슬슬 다 떨어져 가는지, 점점 시전되는 마법의 텀이 길어질 때쯤.

영창을 마친 이오나가 한쪽 팔로는 나를 끌어안고, 다른 한쪽 팔로는 꼬챙이 창을 손에 쥔 채 시동어를 읊었다.

“…꿰뚫어라. 체페슈.”

순식간에 가속하는 시야. 체페슈라 불린 꼬챙이 창이 먼저 날아가며, 우리가 거기에 딸려가는 중이었다.

몇몇 마안이 명중했으나 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이오나가 묵묵히 대신 맞으며 그대로 돌파한다.

그리고 잠시 뒤.

어느새 우리는 상체를 제외한 전신이 침식된 아일라의 앞에 도착해있었다.

“커흑….”

체페슈에 심장을 꿰뚫린 아일라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게 일종의 신호였던 걸까.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잡이로 반짝이던 초록색 안광이 하나둘 꺼져간다.

상처부위부터 검붉은 기운을 뻗어 나가는 자신의 마법을 바라보던 이오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일라. 이제 끝이야.”

“언니…언니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응….”

한차례 토혈을 삼킨 아일라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은…신기할 정도로 이오나와 똑 닮아 있었다.

“나…언니가 죽었으면 좋겠어…나처럼…아니, 나보다 더 괴로웠으면 좋겠어….”

“…….”

3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여동생의 저주.

그 앞에서 이오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래.”

푸욱.

한층 더 깊게 박힌 꼬챙이 창.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아일라의 전신을 파고들던 검붉은 기운이 일제히 형태를 달리했다.

촤아아아아악-!

간신히 남아있던 아일라의 상체 안쪽에서부터 핏빛 가시가 솟구친다.

깜빡 거리며 발광하던 안구를 으스러뜨리고, 아직 멀쩡하던 상체를 찢어발기며, 마지막으로는 이오나와 닮은 얼굴로 이오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던 얼굴을 뒤덮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뾰족한 거대 가시공 하나뿐.

그제야 꼬챙이 창에서 손을 놓은 이오나는 천천히 바닥으로 하강했다.

뒤이어 이오나의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퍼엉.

작은 폭발음과 함께 머리 위에 떠있던 아일라 였던 것이 터졌다.

후두두둑.

비처럼 내리는 핏방울을 맞으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오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단순히 실감이 안 나는 걸까? 이미 죽은 클랜원들의 모습을 되새기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일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걸지도 모르고.

나는 복수를 이룬 뒤의 심정을 모른다. 가족을 제 손으로 죽인 뒤의 심정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오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하나의 결말을 맞이했다는 것.

H&A에서는 이 이후의 이야기가 없다.

주인공 일행은 이오나가 복수를 이룬 뒤, 곧장 최종 보스를 잡고 엔딩을 맞이하니까.

그러니까 스태프 롤은 알아도 이오나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전혀 모른다.

…덜컥 불안함이 솟아올랐다.

복수를 이뤘으니, 더는 아카데미 교수직을 맡을 이유가 없어진 거 아냐?

더는 이오나를 묶어두는 것이 없다. 클랜의 부흥을 위해서건, 본인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건. 원한다면 언제든 아카데미 바깥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교수님.”

“…응.”

“저희 키스할까요?”

“응?!”

당황하는 이오나에게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농담이에요.”

“아, 하하…얀델 학생도 참. 그런 농담은 곤란해.”

“대신 피를 빨아주세요.”

“어? 지금?”

“네. 지금. 조금 전의 마법으로 꽤 소모하셨잖아요?”

“그건 그런데….”

“어서요.”

떨리는 팔을 휘감아, 내 쪽에서부터 이오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이오나의 어깨에 턱을 올려두어 물기 좋은 위치에 목덜미를 들이밀었다.

“저, 저기. 얀델 학생? 이거 아마 내가 싸우면서 흘린 매료나 흡혈의 부작용 때문에….”

“됐으니까 빨리요.”

“으읏….”

입술을 오물거리며 어쩔줄 몰라하던 이오나였으나, 갑자기 움찔하더니 멍하니 내 목덜미를 바라본다.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크게 입을 여는 이오나.

으득.

송곳니가 살결을 파고드는 감각. 오늘로 몇 번째인지 모를 흡혈이 이어진다.

물린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

보드라운 입술, 간지러운 숨결, 서늘한 체온으로도 숨길 수 없는 쾌감이 이성을 적당히 녹여낸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내가 환각에 당해 헛것을 보는 와중에도 이오나의 존재를 강하게 느꼈던 것처럼.

이오나도 내 존재를 강하게 느끼고 있으리라.

복수를 이룬 뒤의 희열과 허망함. 미래에 대한 계획. 죽은 이들을 위한 애도.

이 모든 것들은 뒷전이 되고, 오직 나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겠지.

“흐으…하앙….”

귓가에 들려오는 이오나의 비음 섞인 숨소리.

서로가 뒤섞이며 서로의 이성을 뭉근하게 휘젓는다.

이걸로 이오나의 머릿속에는 내가 가장 크게 각인되리라.

목숨 값을 갚으라는 명분도 있으니 휙휙 떠나가지는 못하리라. 분명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아니, 이런 핑계는 됐다.

그냥 내가 이오나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이오나가 쭈욱 곁에 있기를 바랐다.

아직 모르는 이야기에 내가 함께 하기를 바랐다.

어쩌면 조금 전의 말처럼 약해진 상태에서 매료에 당한 걸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난 이오나를 원하고. 이오나도 나를 원한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는가.

딱 좋게 몽롱해진 머리로 이오나를 휘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치지 않….

“아아아앗!! 내 주인에게서 떨어지거라 이 요망한 흡혈귀! 떨어지란 말일세…!”

익숙한 목소리에 녹아내리던 머리가 번쩍 제정신을 되찾았다.

맞다. 지금 여기엔 다른 사람들도 와있었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래쪽을 바라보자, 무척이나 다급한 표정으로 이오나의 옆구리를 투닥이는 이리스의 모습이 있었다.

아직 나를 물고있는 상황이니 차마 세게 때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

…너무 과했나?

슬슬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이오나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저, 교수님? 이제 슬슬 멈춰주시겠어요?”

“흐응….”

콧소리로 대답을 대신한 이오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송곳니를 빼냈다.

목을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무언가.

내 피거나 이오나의 침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피를 꽤 빨린 탓인지 조금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할짝.

“흣?!”

이오나가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목덜미를 살살 핥아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스으은! 떨어지거라! 주인의 주인 같은 건 인정 못 하네!”

이리스가 펄쩍 뛰며 공격 마법을 시전하려 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반응에 이오나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나를 떨어뜨렸다.

“지혈이야 지혈! 권속화는 시도도 안 했으니까 걱정 마!”

“으으읏…그렇다면…괜찮다만.”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볼을 부풀렸지만, 그래도 내가 무사해 보이자 시전하던 마법을 취소하는 이리스.

그 정겨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오던 차.

쪼옥.

기습적으로 키스 해온 이오나가 장난스레 속삭였다.

“자꾸 자꾸 교수님을 놀리려 들던 벌이야.”

“어, 음….”

스윽 멀어진 이오나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로 오늘 있었던 일은 쌤쌤으로 쳐줄게!”

“…….”

참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그제야 내가 좀 이오나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이리스와 뒤따라오던 카를라, 엘리샤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괜찮겠지?

이오나에게 기습 키스를 받은 직후.

안 그래도 정상이 아니던 몸뚱이가, 긴장이 풀리며 그대로 기절했다고 한다.

그 뒤에는 뭐, 조금 늦게 도착한 뚜벅이 지원군이 쓰러진 전장의 흔적을 보며 감탄한다거나.

널브러진 몬스터와 대주교들의 시체를 보고 경악한다거나.

전력을 드러낸 이오나가 풍기는 요사한 매료에 순간 멍해진다거나.

그리고 웬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뿜어내는 수상쩍은 위압감에 주춤한다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쓰러지며 반쯤 가면이 벗겨진 내 얼굴과, 이오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좋게좋게 끝났다나?

“그렇게 주인님을 아카데미의 집중 치료실로 모신 거예요.”

“쓰읍. 그러고 보니 이번에 가면은 거의 못 써먹었네.”

전투 중에 순간적으로 위압감을 뿜으면 상대는 움찔한다. 보통은 그렇다.

하필이면 이번에 상대한 것들이 집단 광기에 미쳐있거나, 한번 죽어봐서 겁이 없거나, 매혹에 홀려 제정신이 아니거나, 어중간한 위압감으로는 꿈쩍도 않는 거물이라서 문제였지.

“아, 그런데 왜 하필 아카데미로 옮겼어? 여기가 좋긴 하지만 가까운 곳은 아니잖아.”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이상 거리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주인님. 무엇보다 완전 중립인 아카데미를 제외한 곳은 조오금 주인님이 난처해지실 것 같아서….”

“하긴. 다른 나라나 특정 신전에서 치료받으면 귀찮아졌을 수도 있겠네.”

생각해보면 이번에 저지른 일이 꽤 엄청난 일이거든.

이런저런 계산 때문이건,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건 결과는 비슷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