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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83화 (183/230)

피식 웃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따끔함. 뒤이어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의 쾌감이 차오른다.

“흐으으….”

더 정신이 흐트러지기 전에 황급히 인벤토리에서 최상급 회복 포션을 꺼내 입에 물었다.

살짝 내려다본 이오나의 다리가 꽈배기 상태에서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상대 쪽에서도 지금의 틈을 노리고 필사적으로 공격해왔다.

하지만.

“사방에 결계가 깔릴 테니 괜히 움직이지 마세요. 대신 정면을 향해 최대한 큼직한 공격 한 방 날려주시고요.”

대부분은 통하지도 않으리라.

앞으로 몇 걸음이면 길고 길었던 전투도 끝나겠지.

이오나도 나도 살아있는 채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당연히 상대 쪽에서도 지금의 틈을 노리고 필사적으로 공격해오겠지만.

“사방에 결계가 깔릴 테니 괜히 움직이지 마세요. 대신 정면을 향해 최대한 큼직한 공격 한 방 날려주시고요.”

대부분은 통하지도 않으리라.

앞으로 몇 걸음이면 길고 길었던 전투도 끝이겠지.

이오나도 나도 살아있는 채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잠시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이오나가 막대한 양의 마나를 주변에 흩뿌렸다.

마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은 진담이었는지, 일대에 깔려있던 핏물을 끌어모아 거대한 주먹의 형태로 쏘아 보내는 이오나.

“이호아 허히!”

내 목덜미를 물고 있는 터라 발음이 좀 뭉개졌지만…그래도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이오나 펀치라니. 저번엔 그거 발차기였잖아….

내가 어이없어 하는 것과는 별개로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날아가는 이오나펀치.

가로막는 건 뭐든 깨부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돌연 그 중앙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으적!

어지간한 집 한 채는 통째로 삼킬 것 같은 거대한 이빨 자국.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도 나름 회심의 한 방을 노리고 있었던 건가.

다만…그렇게 뚫린 구멍보다 이오나 펀치의 사이즈가 훨씬 컸기에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한 발악이 되었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혼탁한 합일의 신도로서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질량을 가진 피의 벽.

지금껏 이오나가 사용한 마법들이 강력하긴 했어도, 멀리서 봤을 때처럼 큰 거 한방은 없었는데.

그동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던 걸까. 우리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려 뿌려둔 결계가 사라졌다. 대신 혼탁한 합일의 대주교에게 집중됐고.

그 틈을 타 블링크로 거리를 벌린 이오나. 처음에는 반쯤 정신을 놔서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걱정했는데 흡혈 중에도 잘만 싸우네.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우리의 순간 이동이 끝난 직후. 잠깐의 무방비 상태를 노리고 아일라의 마안이 일제히 쏘아졌다.

완벽하게 대처하기엔 너무 촉박한 타이밍.

“어쩔 수 없네! 얀델 학생 마음의 준비를 해!”

“그거 보통 죽기 직전에 하는 말이거든요?!”

내 반론에도 낄낄대며 가장 무해해 보이는 안광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이오나.

그리고 세상이 뒤바뀌었다.

전투의 여파로 마구 패여 있던 지면은 타르처럼 검은 바다가 되어있었고, 하늘은 부서져 그 틈새로 운석이 떨어지고 있다.

코끝에 스치는 오물의 냄새과, 팔뚝을 무언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

하필이면 환각 계열 마안이었나.

환청, 환시, 환후, 환지….

현실 위로 거짓이 덧씌워진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

내가 후유증으로 약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일라의 마안이 그만큼 강하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어…이오나 교수님 괜찮으세요? 전 환각에 당한 것 같은데.”

“으븝? 으브븝.”

이건 진짜 뭐라는지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인 어조는 아니었으니 괜찮겠지.

나만 여기서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면 된다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마인드 디펜스 포션을 하나 더 마시고 싶었지만, 각종 약물을 뱃속에서 칵테일처럼 스까 버린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태다.

회복 포션처럼 재생계열이면 모를까, 강화 계열 포션을 마셨다가는 그대로 골로 가겠지.

그러니 그냥 쌩으로 버틴다.

괜찮다. 혼자 이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지만, 그거야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니까.

뭣보다 이 와중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이오나의 감촉과 독처럼 퍼져가는 흡혈의 쾌락.

여기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다른 것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아무리 끔찍한 광경과 환통을 겪더라도, 이러면 좀 버틸만하다.

뭐, 흡혈을 마친 것인지 잠시 목덜미가 가벼워질 때가 있긴 했지만…그때는 이오나를 힘껏 끌어안아 푹신한 쿠션에 얼굴을 박으니 금방 진정되더라.

그렇게 서너 번 흡혈을 당할 때쯤이 되어서야 아일라의 환각이 풀렸다.

눈을 떠보니 남아있던 대주교들이 그 사이에 전부 죽어있었다.

“…뭐야. 그 사이에 벌써 다 쓰러뜨렸어요?”

“엣헴 엣헴. 대주교가 이렇게나 줄어들면 얀델 학생 도움 없이도 어떻게든 되더라!”

“헤에. 제 피를 빠는 건 당연한 일이라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 이거죠?”

“읏…얀델 학생 덕분에 순조롭게 이길 수 있었어! 이거면 됐지?”

“흠흠. 좋네요.”

엎드려 절받기지만, 아무튼 좋은 건 좋은 거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키득이는 나와 이오나.

겉으로는 승리를 앞두고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아일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중이었다.

이제 혼자 남았다고는 하나 아일라는 여전히 강력한 추기경이다.

긴장을 풀었다가는 순식간에 역으로 얻어맞을 게 뻔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런 이유로 상태를 지켜보며 경계하던 아일라는.

“아냐…이런 거 이상해…내가 진다고? 언니가 나쁜 거잖아! 언니만 없었으면! 그랬으면! 내가 그 늙은이에게 깔려 비참하게 빌었을 일도! 왕자님을 내 손으로 죽였을 일도 없었을 텐데! 대체 왜! 난 나쁘지 않아! 피해자야! 그런데 왜…!”

고개를 마구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참 뭐랄까…그래, 지극히 편협한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의 대략적인 사정을 알고 있기에 왜 저러는지 짐작은 간다.

아일라는 진심으로 이오나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이오나가 도망쳐서 자신이 납치당해 노리개가 되었고, 이오나가 자신을 찾아주지 못해 10년 넘게 지하실에서 기어야 했으며, 자신을 구원해준 왕자마저 이오나에게 빼앗겼다.

평범한 삶도, 여인으로서의 행복도, 시궁창 속에서 내려온 한줄기 희망도.

전부 이오나에게 빼앗겼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비틀린 것도, 자신의 잘못도, 자신이 이렇게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전부 이오나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왜냐면 아일라에게 이오나는 만악의 근원이니까.

…다만 이제 와선 지금의 발언이 아일라의 본심인지조차 알 수 없다.

악신의 권능은 사용하면 할수록 신도의 감정을 자극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니까.

그렇게 신도는 점점 더 강한 권능을 내려받을 수 있게 되고, 악신은 자신의 사도가 될만한 그릇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옛날에는 아일라도 이오나를 꽤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오나 또한 아일라를 아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조금 다른 결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둘 다 멈출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

남은 것은 서로가 부딪혀 어느 한 쪽이 부서질 때까지…….

“…어?”

이제 곧 결전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감을 끌어 올리는 것도 잠시.

무수히 많은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던 아일라의 홍채들이 일제히 초록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저거! 저거 각성패턴! 교수님! 지금 어떻게든 해야 해요! 아무거나 큰 거 마구 때려 박으세요!”

말이 각성이지 일종의 자폭기다.

추기경급만 쓸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기술인데…인간의 형태도, 이지도 잃는 대신 악신의 단말이 된다는 설정이었지.

그렇다고 사도 수준은 아니고, 추기경과 사도의 중간 단계 정도?

이기건 지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확실하니, 사교도들이라도 어지간해선 쓰지 않는 건데 이걸 여기서 쓸 줄이야.

물론 대응 방법은 간단하다. 완전히 변하기 전에 죽이면 될 일.

유독 파괴적인 이오나의 마법이라면 충분한 딜량이 나올 터.

그런 이유로 다급히 이오나의 팔뚝을 두드렸지만, 어째서인지 이오나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교수님? 이오나 교수님?! 이러다 저희 다 같이 죽는다니까요?!”

얼굴에 달린 본래의 눈은 물론이요, 팔 형태로 돋아난 안구들마저 진한 녹색으로 물든지 오래.

이제는 어깨 부근부터 꾸물거리며 눈동자가 기어 올라오더니, 그대로 아일라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눈동자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몬스터 비스무리한 것이 되고 말겠지.

거기까지 가버리면 빛나는 사자 단검도 통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원군이 와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고.

아카데미에 반쯤 묶여있는 이사장이나, 전 대륙에서 불러모은 정예 토벌군이라도 데려오지 않으면 상대하기는 건 무리.

시간이 지나면 자멸하겠지만…그 사이에 얼마나 큰 피해가 있을지가 문제다.

H&A에서는 못 이길 것 같아 후퇴하자, 나라 하나가 멸망한 적도 있었다고.

“으아아악! 정신 차리라니까요 이오나 교수님! 설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환각에 당하셨어요?!”

답답한 마음에 이오나의 볼이라도 때려보려 했지만.

탁.

“그만 그만! 나 제정신이니까 너무 재촉하지 마!”

“아니, 제정신으로 저걸 지켜본다고요? 전 교수님이랑 동반 자살할 생각 없는데요?!”

“에에잇!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길 봐 얀델 학생.”

손을 쭉 뻗어, 아까부터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장소를 가리키는 이오나.

“…엥?”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아일라의 뒤편에 떠 있는 6명의 마법사.

로브와 가면을 뒤집어쓰고, 수상쩍은 위압감을 발하고 있었는데…어째 눈에 익은 모습이다.

“아.”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아일라의 뒤편에 떠 있는 6명의 마법사.

로브와 가면을 뒤집어쓰고, 수상쩍은 위압감을 발하고 있었는데…어째 눈에 익은 모습이다.

“아.”

이리스가 도착한 건가?

내가 환각에 헤매는 사이에 굽이진 여유의 대주교가 죽으며 일대의 공간 이동을 막는 결계도 풀렸겠지.

이를 알아채고 즉시 텔레포트 해온 것이리라.

같이 온 나머지 다섯은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저택에 있을 엘프 가족이겠지.

넘어오자마자 뭔가 준비 중인 아일라를 봤으니, 당연히 즉시 요격할 준비 중이었고.

우우웅-

이리스 일행이 있는 곳에서부터 막대한 양의 마나가 솟아오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쏟아지는 마법의 폭격.

쾅! 콰아앙! 콰앙!

상급, 중급, 하급.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아일라를 향해 쏘아졌다.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치는가 하면, 얼음으로 된 폭풍이 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돌덩이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순식간에 아일라의 몸을 뒤덮으며 증식해가던 눈동자들이 타오르고 터져나간다.

나름 저항이라도 해보려는 건지 눈동자를 녹색으로 빛내며 마구잡이로 마안을 전개해보지만…아직 변이 도중이라 그런지 마안의 위력도 방향도 중구난방이다.

사방팔방으로 내뿜는 마안. 누가 봐도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은 상태의 아일라를 향해 이오나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들만으로 시간 내에 쓰러뜨리진 못하겠지. 마무리는 내가 해야겠네.”

중얼거리는 듯한 고속 영창. 심장이 떨릴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술렁이는 동시에, 이오나의 손목에서 대량의 피가 흘러나온다.

지금의 피는 지금까지와 달리 무작정 덩치를 불리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뭉치며 밀도를 높여갔다.

그렇게 완성된 검은색에 하염없이 가까운 붉은색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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