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에요! 왼쪽 대각선 밑으로 구속 마법!”
“어? 으응!”
눈치 없이 대화 중에 달려들던 빌프리트. 녀석의 머리 위로 피의 사슬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이에요! 왼쪽 대각선 밑으로 구속 마법!”
“어? 으응!”
눈치 없이 대화 중에 달려들던 빌프리트. 녀석의 머리 위로 핏빛 사슬이 쏟아져 내렸다.
촤라라락-
“크륵?!”
그대로 공중에 붙들린 빌프리트. 이를 신호 삼아 대치하던 다른 대주교들도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슬 폭발시키시고, 정면에 질량계 공격 아무거나! 그리고 뒤에서 오는 기습 조심하시고요!”
폭염에 휩싸여 추락하는 빌프리트, 정면에서 날아오는 허공 포식은 돌처럼 굳은 핏덩이에 상쇄된다.
마지막으로 뒤에서 몰래 기습해오던 들끓는 고요의 대주교는….
“포스 그랩!”
이오나가 회피하는 사이에 내가 염력 마법으로 단검을 던져 반격했다.
후유증으로 몸에 힘이 없어도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아쉽게도 빗나갔지만.
말없이 이쪽을 노려보는 들끓는 고요의 대주교의 특색 없는 이목구비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에는 스파이 노릇이나 하지만, 여차할 때는 암살자 흉내도 내는 위험한 녀석.
다만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들끓는 고요의 암살 이벤트 따윈 H&A 후반부의 일상이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대충 알 수 있다.
“이…!”
뒤늦게 암살자의 존재를 알아챈 이오나가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쏘아지는 반월 형태의 바람의 칼날. 급하게 쏘아낸 탓인지 옆구리를 길게 베어내는 데 그쳤다.
허리를 부여잡은 채, 스르륵 허공에 녹아 사라지는 모습에 이오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자꾸 툭 튀어나오는 게 보통 귀찮은 게 아니야! 얀델 학생도 조심해!”
“아, 제대로 기습해오기 전에 경고해 드릴 테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그냥 맞았는데?”
“…저거 칼에 독 발려있는데요?”
“내 회복력이 더 강해!”
“…….”
아군이 된 뱀파이어 개쩌네.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말하다 말고 호흡을 맞춰 싸우는 우리의 모습을 본 아일라가 살벌한 기세로 이를 갈기 시작했다.
아드득. 빠드득.
“사이 좋아 보이네…내가, 내 미래도 그랬어야 했는데! 언니만 아니었으면…!”
상상도 못 한 트집을 잡으며 무수히 많은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는 아일라.
팔을 대신하는 눈동자 중 몇 개가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색을 발하는 마안을 보며 이오나의 팔뚝을 꾹꾹 잡아당겼다.
“동생분은 알아서 하신다고 하셨죠?! 저 이쪽으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걱정 마! 블러드 시프트 걸어놨으니 실수로 몇 번 맞아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팔뚝 아랫살 만지작대지 마!”
“엑.”
하지만 만질 수 있는 곳이 없잖은가. 팔뚝이 안 되면 가슴밖에 없다고.
…그나저나 한창 전투 중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오늘 왕창 혹사당한 감각이 맛이 가버렸거나, 이오나의 품이 주는 안정감이 장난 아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다만 어느 쪽인지 고민할 시간까지는 주지 않겠다는 걸까. 아일라의 눈이 발하는 요사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쪽을 덮친다.
“———!”
다양한 색의 빛이,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달려든다.
이에 무어라 중얼거리며 몸을 한껏 뒤트는 이오나. 우리가 조금 전까지 있던 장소의 풍경이 잔뜩 일그러졌다.
왜곡의 마안인가.
공간 자체를 왜곡하는 탓에 한번 맞으면 내용물이 뒤죽박죽되는 공격이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반죽 상태에서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 피한 것이리라.
나를 안고 있기도 하고.
허리가 살짝 꺾인 상태에서도 이오나는 착실하게 시동어를 읊었다.
“감싸 안아라! 크림슨 포그!”
피를 머금은 검붉은 안개가 이오나의 주변을 둘러싼다.
마나와 생명력을 동시에 소모하지만, 그만큼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
이 경우에는 마안에 대신 맞는 역할이려나. 상당한 생명력을 품고있는 터라 대타로는 딱일 거다.
실제로 크림슨 포그는 빙결, 폭발, 석화 등 이런저런 공격과 상태 이상을 받고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추기경급은 확실히 대단하네. 만약 크림슨 포그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하나하나가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마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은 마안을 연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지, 지금은 다른 눈동자들을 반짝이고 있다는 것.
시간을 진득하게 들이면 이런저런 제한을 통해 공략법을 알아낼 수 있을 듯 하나…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아일라는 온전히 이오나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가시덤불로 하반신 휘감고 수직 하강! 그다음은 심장보다 조금 낮은 높이에 대고 혈조술로 만든 무기 휘두르세요!”
“그렇게 휙휙 쓸 수 있는 마법들이 아냐!”
말은 그리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양쪽 다리에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휘감고 스스로 추락하는 이오나.
아마 범위를 자기 다리로 한정해 빠른 시전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내가 이오나의 혈마법을 조금 이해할 때 쯤, 이오나도 내 오더의 이유를 대충 이해했는지 이를 악물었다.
“이거! 이거! 나도 아픈 거잖아 얀델 학생!”
“아픈 데는 익숙하다면서요!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저도 한 대 맞을 예정이거든요!”
“전혀 위로가 안 돼!”
이쪽을 타박하는 동시에 가속하는 이오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추락 속도다.
이오나의 힘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고한 군림의 권능인 중력 조작의 힘이 합쳐졌기에 가능한 일.
아마 녀석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중력으로 이오나를 순간 움찔하게 만들려는 것이었겠지.
바로 밑에서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 거한의 서포트를 위해서.
무모한 포효의 대주교. 지금껏 이오나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맞고도 다시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는 터프한 녀석이지만…그것도 여기까지다.
“크아아아아아!”
이해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는 녀석이 이오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꾸욱.
거대한 회색 손바닥이 단숨에 이오나의 가느다란 다리를 붙잡는다. 당연히 다리에 감겨있는 가시 덤불과 함께 잡았고.
물론 이 정도로 자신이 상처 입지 않을 걸 알고 저지른 일이겠지.
실제로 빌프리트의 손바닥은 가시에 꿰뚫리지 않고, 이오나의 다리를 으스러뜨리며 쥐었으니까.
“으읏….”
“크릉.”
이오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신음에 만족스레 웃는 녀석.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저 가시덤불의 목적은 따로 있으니까.
촤아아악-!
손바닥 사이로 뻗어 나온 덤불이 이오나의 다리와 빌프리트의 팔을 하나로 엮어 그대로 묶어 버린다.
“쿠워?!”
당황한 녀석이 팔을 빼보려 힘을 주지만 이미 늦었다.
덤불이 뜯어지는 속도보다 내 마법이 조금 더 빨랐으니까.
“포스 그랩!”
포스 핸드보다 약하고 방향 전환도 어렵지만…그래도 누구 하나 찌르는 데는 충분한 염력 마법.
쉬이이익!
수직으로 떨어진 빛나는 사자 단검이 무방비한 빌프리트의 눈을 향해 쏘아졌다.
눈꺼풀마저 단단한 녀석이지만 사교도는 사교도. 치명타에 추가타까지 터지면 저 정도는 꿰뚫을 수 있을 터.
푸욱!
뒤이어 번쩍이는 휘광과 고통에 찬 비명 소리.
“크워어어어어!”
당연한 말이지만 덩치만큼이나 맷집도 강한 녀석이라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
그럼 여러 번 찌르면 될 일이지.
포스 그랩으로 다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찍기를 반복하기를 두어번. 슬슬 때가 됐음을 느끼며 기습적으로 상체를 치켜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느라 허리 부근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으나, 그 고통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오나의 심장을 노리고 휘둘러지던 검이 내 폐를 꿰뚫었으니까.
“끄으윽…!”
실드 마도구가 작동했는데도 단번에 깨뜨리고, 이렇게나 깊게 찌를 줄이야.
블러드 시프트 덕에 실제 상처는 남지 않으나 고통만은 생생하게 전해진다.
뭐, 이 정도는 이오나와의 대련에서 몇 번이고 느껴봤던 수준이라 참을 만하다.
아무리 찔러넣은 검을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며 쑤셔도, 비키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내 모습에 살짝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 들끓는 고요의 대주교.
그런 녀석의 얼굴 위로 크고 아름다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오나가 혈조술로 만들어낸 흉흉한 외양의 핏빛 도끼.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이 아닌 것도 단번에 토막 낼 것 같은 무식한 무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휘둘러졌다.
“하아아앗!”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반토막이 나 무너지는 시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빌프리트 쪽도 끝을 맞이했다.
파아앗!
푸욱!
벌써 몇 번째 솟구치는 건지 모를 광휘. 다만 이번에는 단검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쑤욱 들어갔다.
손잡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힌 단검.
한쪽 눈이 너덜너덜해진 빌프리트는 파르르 경련하더니,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회색 피부는 평범한 살색 피부로. 거인처럼 느껴지던 거구는 왜소한 성인 남성의 그것으로 변해간다.
자연스레 가시덤불의 구속에서 풀려나고는, 힘없이 흔들리며 지면으로 떨어진 시체.
그걸로 끝이었다. 빌프리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침묵했다.
남은 거라고는 피에 절은 단검뿐.
생각보다 빨리 처리했네. 원래라면 몇 번은 더 이런 드잡이질을 해야 했을 텐데.
소모되고 있던 건 이오나만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잠깐 사이에 대주교 둘을 쓰러뜨린 게 이해가 안 되는지 멍한 표정을 짓는 다른 사교도들.
끊임없이 원망의 말을 중얼거리던 아일라마저 멈칫한 모습이 조금 재밌다.
대충 비슷한 감상을 느끼는 건지, 멍하니 지면에 처박힌 시체를 바라보던 이오나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교수님 교수님.”
“어? 으응? 무슨 일이야 얀델 학생?”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지 어벙한 목소리를 내뱉는 입을 향해 목덜미를 들이밀었다.
“슬슬 빨 때 되지 않았어요?”
“앗, 힉, 앗…으응. 그랬지 그랬지. 잠시 가만히 있어 봐.”
“음. 그건 어렵겠는데요? 저쪽이 가만 보고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이제 상대에게 남은 거라고는 혼탁한 합일, 고고한 군림, 굽이진 여유의 대주교뿐.
주로 쓰는 권능은 각각 허공 포식, 중력 조작, 결계 작성인가.
저 셋으로는 이렇다 할 시너지가 나지도 않을 테니 상대하기 한결 수월해지겠네.
다만 아일라는 여전히 위험할 테니 여기선 이오나가 얼마나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려나.
“어때요? 흡혈하면서 피해 다닐 수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 글쎄. 얀델 학생이 도와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동생분 말이에요.”
“…얀델 학생이 있으면 마력이랑 피를 아낄 필요 없는 거잖아? 그럼 그냥 힘 빡 주고 장막이나 깔면 되지 않을까?”
“오. 방금 그거 완전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뱀파이어 같았어요.”
“크앙! 크앙! 전부 빨아 먹겠다!”
적의 전력이 확 줄어들며 부담이 덜해진 걸까. 평소처럼 장난스런 태도를 보여주며 입술을 가져다 대는 이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