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피를 마실 수 있게 된 게 기쁜 걸까. 이오나는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강하게 피를 빨아냈다.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 내 입술을 뾰족한 송곳니로 깨물었다.
“읏.”
생각보다 따끔한 고통에 움찔했으나, 이대로라면 입술이 헐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구 도리질 치며 이오나의 얼굴을 떼어냈다.
“에에잇.”
“…아.”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멍하던 이오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하지만 기껏 똘망똘망해진 눈동자는 피범벅이 된 내 입술을 시야에 담자마자 다시 멍해진다.
“미, 미안 얀델 학생…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그게…전투 중인데…으읏….”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더듬는 이오나.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에 잡히는 이오나의 창백한 얼굴.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끌려오길래, 살살 끌어 내 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철철 흘러넘치는 입술의 피를 한차례 할짝여 닦아냈다.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은 걸요? 그리고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뭐…를?”
트라우마 때문인지, 내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의 흡혈로 몸이 달아올라서인지.
파르르 떨리는 이오나의 몸을 끌어안아 진정시키며 목을 내밀었다.
“이오나 교수님이라면 괜찮다고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몸은 솔직한 걸까. 내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을 꼴깍 삼키는 이오나.
그런 이오나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껏 빨아주세요.”
“진짜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하지만 얀델 학생이 괜찮다고 한 거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다 덥석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민감한 부위에서 느껴지는 이오나의 감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
이오나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목을 꿰뚫고 혈관에 구멍을 낸다.
으득.
입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량의 혈류가 빠져나간다. 순간 어지러워지는 시야에 황급히 꺼내둔 포션을 마셨다.
“그에에엑….”
세상에 이게 뭐람.
생명 그 자체가 빨려나가는 듯한 아찔함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정체 모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분.
다만 효과 자체는 확실한 건지, 이오나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빠르게 회복되어 간다.
잔뜩 흐트러져있던 마력은 빠르게 정돈되어갔고, 뱀파이어답게 창백했던 피부에 약간의 혈색이, 서늘한 체온은 살짝 따뜻한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오나로부터 숨 막힐 정도로 짙은 요염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검붉은 머리카락, 희열에 찬 숨소리, 살짝살짝 닿는 혀의 부드러움.
어느새 피를 빨린다는 고통이나 공허함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고 말았다. 남는 것은 이오나와 하나가 되어간다는 황홀함뿐.
…그런가. 뱀파이어의 흡혈은 식욕과 성욕을 겸한다는 게 이래서인가.
속으로 감탄하는 것도 잠시.
쩌저적-!
이오나의 품에 안긴 채 올려다본 실드에서 뭔가 위험한 소리가 들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저기 잔뜩 금이 간 것이 한대만 툭 건드려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네.
“음…교수님?”
“하음…쮸읍….”
“저거 슬슬 부서질 것 같은데요.”
“흐응….”
완전히 내 피를 마시는 데만 빠져있는 정신이 팔려있는 이오나.
그런 이오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다 같이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오세요!”
“힉! 히익! 저, 정신 차렸어! 차렸으니까 거기 그만 찔러…!”
간지러움이 심한 건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던 이오나였으나, 찌르기를 멈추자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핏빛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지금이라도 수복하면…아니, 그래 봤자 늦겠네.”
“회복은 얼마나 되셨어요 이오나 교수님?”
“으음 으음. 3할? 기존에 남아있던 걸 생각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 회복했어.”
“네? 그렇게요? 사람 한 명의 피를 전부 마셔도 1할밖에 안 된다면서요.”
“맞아 맞아! 보통은 그렇지. 다만 얀델 학생의 피는 뭐랄까, 엄청 진하다고 해야 하나? 맛있는? 궁합이 맞는? 아무튼 그래서 몇 배는 효율이 좋더라구. …그래서 좀 정신을 잃었지만 말이야!”
“뭔…흡혈에도 궁합 같은 게 있어요?”
“있지 있지. 근데 그건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나중에 해줄게! 실드가 깨지면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올 테니 지금은 어떻게 막아낼지부터 생각해야 해!”
“아, 그 부분이라면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뭔데? 뭔데? 설마 그냥 계속 흡혈하면서 마력으로 밀어붙이자는 소리는 아니지? 그랬다간 얀델 학생의 머릿속이 엉망이 될 거야!”
확실히 흡혈 시의 쾌감은 좀 위험하긴 하지. 다만 내가 말하려던 건 그런 게 아니다.
“교수님 저 믿죠?”
“갑자기 불안해졌는데?! 그 대사는 보통 믿으면 안 될 사람이 하는 말이잖아!”
“안 믿으셔도 믿으셔야 해요.”
이제부터 내가 오더를 내릴 테니까.
나는 아무리 공략법을 알아도 스펙이 부족해 못 잡겠지만, 이오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혹시 혹시. 여기까지가 얀델 학생이 말했던 계획이야?”
“그런 셈이죠.”
“…좋아.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내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었으니까. 한 번 얀델 학생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결심이 빨라서 좋네요.”
“그야 실드도 부서지기 직전이니까?”
쩌어어억….
그 사이에 무너지기 시작해 바깥 풍경의 일부가 드러난 실드의 모습을 보며 황급히 외쳤다.
“비행 마법 말고 중력 역전 쓰세요! 그리고 저도 좀 꽉 잡아주시고요!”
“그럼 팔을 못 쓰는데?! 매달리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잖아!”
“조금 전에 피 빨리면서 힘도 빨려서 도중에 풀어질걸요?”
“어쩔 수 없네!”
나를 끌어안으며 빠르게 영창을 읊는 이오나.
본래 중력계열 마법은 난이도가 높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범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지는 마법이다.
본인과 나에게만 적용하는 거라면 잠깐의 영창으로도 충분하다.
이오나의 마법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부서져 우리를 둘러싼 사교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폭격.
…다만 거꾸로 추락하는 우리가 한발 더 빨랐다.
후우우웅-
보통은 따로 조작하지 않으면 느릿하게 허공을 부유하는 게 전부인 중력 역전이나, 지금은 보통 때가 아니다.
우리를 향해 중력이 무겁게 내려앉은 상태니, 그만큼 빠르게 위로 솟구칠 수 있기 때문.
눈으로 보이는 풍경과, 몸으로 느껴지는 중력의 괴리를 느끼며 외쳤다.
“회색 덩치! 이제 곧 녀석이 뛰어오를 테니 그때 관통력 있는 마법으로 공격하세요! 이후에는 블링크로 거리를 벌리시고요!”
“알았어!”
남은 대주교들의 연계라고 해봤자 결국 순간이동을 막아두고, 중력으로 억누른 뒤, 일제 공격 같은 것뿐이다.
권능에 의존해 싸우는 이상,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얼추 짐작이 가기에 가능한 추측.
실제로 우리가 있던 자리에 혼탁한 합일의 허공 포식과, 아일라의 마안이 만들어낸 포격이 동시에 몰아친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경로를 꺾어, 뛰어오른 회색 거한…무모한 포효의 대주교 빌프리트.
무식하게 큰 덩치와 힘. 하지만 녀석의 진짜 무서운 점은 공격력이 아닌 방어력에 있다.
광폭화 중에는 물리적, 마법적으로 엄청난 방호 성능을 지니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분노가 일정 수치를 넘으면 죽음조차 잠시 유예할 수 있을 정도니까.
즉, 엄청 단단하고 힘도 센데 잘 죽지도 않는 성가신 탱커라는 소리.
하지만 무적은 아니다. 이오나쯤 되면 얼마든 녀석의 가죽을 뚫어낼 수 있겠지.
“…블러드 스피어!”
이오나의 손목에서 스윽 뽑혀나간 피가 회전하는 창의 형태가 되어 쏘아진다.
내리꽂히는 창의 속도도, 점프해오는 빌프리트의 속도도 예사롭지 않다. 둘이 맞물리면 한 절반 정도는 관통당하지 않을까?
저쪽에서도 잘 알고 있을 테니, 공간이동을 방해하던 결계를 방어로 돌릴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콰앙!
“크워어어어어…!”
반투명한 막이 빌프리트와 혈창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한다.
굽이진 여유. 나태를 담당하며, 결계를 다루는 능력을 권능으로 하사하는 악신.
녀석의 대주교쯤 되면 이오나의 공격도 받아낼 만큼 단단한 결계를 다루지만…이만한 수준은 한 번에 하나밖에 조작할 수 없을 터.
예상대로 주변에 깔려있던 간질간질한 느낌이 사라졌다. 이오나가 즉시 블링크로 멀찍이 떨어졌다.
뒤이어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자리를 관통하는 무수한 왜곡과 저주들.
아일라인가.
“확실히 확실히. 자신할 만하네 얀델 학생. 나라면 한두 방 정도는 몸으로 때웠을 텐데.”
“교수님은 몸이 튼튼하니까 그래도 되지만 저는 아니잖아요?”
“블러드 시프트 걸어줄게.”
짧은 영창.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스며드는 붉은 안개.
이걸로 내가 받는 모든 피해는 이오나에게로 전이된다. 뱀파이어 특유의 재생력을 믿고 들이받는 전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오나의 생명력이 2배로 소모되겠지만…그거야 내 피를 빨아 다시 보충하면 되는 일 아닌가.
다시금 대치하는 모양새가 된 이오나와 아일라.
처음과 차이가 있다면 저쪽은 대주교를 둘이나 잃었고, 이쪽은 훈수 두는 피 주머니가 하나 생겼다는 점이겠지.
멀리서 봐도 장난 아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징그러운 아일라의 눈동자 팔.
서로 달라붙어 있는 안구들이 꿈틀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에 슬쩍 시선을 피하며 속삭였다.
“이오나 교수님. 제가 다른 대주교들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어도, 동생분에 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없거든요?”
“얀델 학생은 지금처럼 다른 녀석들에 관해 조언해줘. 아일라 쪽은 내가 알아서 대처해 볼게.”
“네. 괜히 참지 마시고, 부족하면 바로 피 빨아주세요.”
“…나 지금 완전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야.”
하긴. 이렇게 피 주머니 달고 싸우는 뱀파이어는 보통 악역으로 나오더라. 그것도 대전쟁 이전의 극악무도한 타입.
우리가 서로 소곤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일라가 이를 으득 갈며 무수히 많은 눈동자를 부라렸다.
“언니이…이제야 그 음탕한 본성을 드러내는 거야? 그래, 예전에도 이렇게 왕자님을 홀려 내게서 뺏어 갔었지.”
벌써 300년 전의 일임에도 이오나를 향해 질투와 적의를 불태우는 아일라.
꽤 살벌한 모습이지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내겐 이오나가 있으니까.
“지금이에요! 왼쪽 대각선 밑으로 구속 마법!”
“어? 으응!”
눈치 없이 대화 중에 달려들던 빌프리트. 녀석의 머리 위로 피의 사슬이 쏟아져 내렸다.
“…흐응♡”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이오나의 달콤한 비음.
오래만에 마신 인간의 피. 그것도 하필 상처 입은 몸이 피를 원할 때 이루어진 직접 흡혈이 트리거가 된 걸까.
피맛을 본 이오나는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격정적으로 나를 요구해왔다.
츕. 츄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밀어내려던 혀는 반대로 졸라대듯 마구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살짝 닿는 수준이었던 입술은, 이쪽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강하게 짓눌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