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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77화 (177/230)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카를라와 엘리샤의 말대로 자살행위인 건 아닐까.

…이제 와선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고, 이것이 나의 선택이다.

아직 몸은 움직이고, 마력도 그럭저럭 남아있다.

그렇다면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슬슬 멜로니아의 패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매혹을 최소한으로 줄인 전투는 생소하지만, 그래도 전부 알고 있던 공격들이다.

그래. 아직 더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지?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

하급 마법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멜로니아에게 닿지 못하니까. 지금까지의 공방으로 이를 확실히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에드메렉과 싸울 때도 분신체는 엘리샤를 필두로 한 다른 학생들이 맡아주지 않았던가.

일대일로 대주교급과 싸워 이기는 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

내가 각오한다 하여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닌가.

한번 차오른 불안감은 벌레처럼 순식간에 내 안을 좀먹었다.

그래서일까. 지금껏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주던 몸이 순간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아.”

몸이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생각에 안개가 끼면 둔해진다는 소리.

불안함은 망설임을 낳고, 망설임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도끼와 창.

쳐낼 타이밍도, 피할 기회도 놓쳤다. 아직 남은 마도구의 실드가 있긴 하지만 일격이면 모를까 이격을 막아내진 못할 거다.

마력 폭발? 그거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너덜너덜해진 지금의 내 몸이 반동을 버틸 수 있을까?

1초라도 의식을 잃으면 끝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면 팔다리 중 하나가 날아가 있겠지.

그 뒤에는 예쁘게 포장 당해 멜로니아의 앞에 바쳐질 것이다.

뻔히 보이는 부정적인 미래. 하지만 이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쥐어 짜내듯 몸을 움직여 단검과 스태프를 도끼 앞에서 교차시켰다.

어깨를 다쳐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취한 최후의 발악.

이미 정신은 패배를 말하고 있건만, 몸만은 바득바득 살아남을 방도를 궁리한다.

그 아이러니함이 가져다주는 씁쓸함을 한 모금 삼키려는 순간.

툭. 투둑.

돌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붉은 비.

“Mwili unayeyuka!”

“Kila mtu kukimbia!”

“nisaidie! Ukimshika….”

그와 동시에 이를 뒤집어쓴 피셔맨들이 바닥에 몸을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나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던 녀석은 손가락이 녹아내려 도끼를 놓쳤다.

반대편에서 창을 찔러오던 녀석은 무릎이 녹아내려 앞으로 넘어진 탓에 궤적이 아슬아슬하게 빗겨갔고.

후두두둑.

소나기라도 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핏방울.

나는 이 마법을 안다. 얼마 전에 직접 보지 않았던가.

블러드 레인.

피에 닿은 적을 녹이는 살벌한 혈마법. 하지만 내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마법.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들자, 저 멀리에서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뻗은 이오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일라와 다른 대주교급을 상대하는 와중에 지원 마법을 쏘아낸 것이다.

…그 대가로 빈틈을 허용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콰앙!

실제로 덩치 큰 회색 괴인…빌프리트에게 얻어맞은 이오나가 굉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죽지는 않겠지만, 순식간에 열세에 몰리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터. 어쩌면 지금의 선택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오나는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내가 위험해 보이자 이쪽에 마법을 날렸다.

자신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말이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한가지 선명히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이오나의 의지.

절대로 나를 여기서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설령 이게 단순한 임기응변이라 내가 곧 같은 위기에 처할지라도.

설령 자신이 그 결과 위험해지더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오나 자신이 이미 그러겠노라 정했으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뛰어들고, 안 될 것 같자 꺾이려 한 나와는 다르다.

…내겐 의지가 부족했다.

이를 깨닫는 순간. 무언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가진 마법으로는 무엇을 시도해보더라도 지금의 난관을 헤쳐나올 수 없다.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를 전부 쓰러뜨리지도 못하고.

날아다니는 멜로니아의 실드에 구멍 하나 뚫는 것조차 힘들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법사란 갈구하는 존재.

있을 리 없는 기적을 바라되, 누군가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결과를 움켜쥘 뿐.

두근.

그리 다짐하는 순간, 이에 호응하듯 심장이 묵직하게 뛰기 시작했다.

코어가 발작하듯 마나를 쥐어짠다. 그 반작용인 걸까.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시야가 늘어나고, 물에 빠진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뭉개진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두근.

내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가 바로 그러하다.

두근.

자신은 여기 있노라 외치는 듯한 격렬한 자기주장.

두근.

이 박동에 힘입어 주변에 나 자신의 존재를 새긴다.

그리고 내 의지를 새긴다.

두근.

힘이 필요하다. 이 지긋지긋한 몬스터 놈들을 쓸어버리고, 아까부터 나를 내려다보며 농락하려는 멜로니아를 끌어내릴 힘이.

나는 이미…방법을 알고 있다.

간단한 일이다. 하급 마법으로 안 된다면 중급 마법을 사용하면 될 일 아닌가.

이미 중급 마법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그렇다면 시전하지 못할 것도 없을 터.

두근.

마력이 부족하다. 이해도가 부족하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는가.

불가능한 이유를 늘어놓자면 수도 없이 많다.

허나, 그것이 내가 주저앉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두근.

불가능 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는다.

혹시 모를 요행에 기대는 것과는 다르다.

이 심장에 품는 것은 반드시 그러겠노라는 의지뿐.

두근.

심장이 뛴다. 코어가 따라 날뛴다.

…그리고 코어의 울림에 따라 주변의 마나가 술렁인다.

가득 차오른 의지는 흘러넘쳐 일대의 모든 마나를 잠식했다.

두근.

턱 끝까지 차오른 간질거림을 참지 않고 단번에 토해냈다.

“『신뢰, 뇌광, 섬전, 찰나의 순간에 내리쳐라.』”

힘을 품은 언어는 하나의 선고였다.

내 심장 소리를 들은 모든 것들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마나가 들끓고, 하늘이 검게 물들었으며, 사방에서 작은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당황한 멜로니아가 황급히 손가락에서 마력을 쏘아냈으나, 그보다 내 마지막 선언이 조금 더 빨랐다.

“『…썬더 콜링!』”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치는 거대한 낙뢰.

콰릉-!

세상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신뢰, 뇌광, 섬전, 찰나의 순간에 내리쳐라.』”

힘을 품은 언어는 하나의 선고와도 같다.

얀델을 주변으로 마나가 들끓고, 하늘이 검게 물들었으며, 사방에서 들릴 리 없는 뇌성이 울려 퍼진다.

명백한 이상 현상.

일대의 마나를 자신의 지배하에 둔 그 모습은 명백히 하위 마법사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당황한 멜로니아가 황급히 손가락을 뻗으며 마력을 쏘아냈다.

악신의 권능과 순수한 정기를 섞어 위력을 증폭시킨 마력포.

분홍색이라는 눈에 띄는 빛을 발하며 날아간 광선이었으나…얀델의 마지막 선언이 조금 더 빨랐다.

“『…썬더 콜링!』”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건만, 쉴 새 없이 그르렁대는 뇌성 속에서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시동어.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하늘에서부터 내리치는 낙뢰.

콰릉-!

세상이 번개의 창백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멜로니아가 쏘아낸 분홍색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말도 안 돼….”

굵은 낙뢰가 떨어진 곳을 보며 입을 떡 벌린 멜로니아.

그래. 이는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투 중에 한 단계 높은 경지로 각성하는 일?

드물지만 가끔가다 일어나는 일이긴 하다.

갑자기 중위 마법사에 오른 것보다, 멜로니아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얀델의 정신이 어떤 의미로는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살아오며 여러 전장에 참가했던 멜로니아에게 얀델의 각성이란 좋은 구경에 불과한 일.

애초에 이제 막 중위 마법사가 된 자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중위 마법사지 중급 마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아닌가.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반쪽짜리.

중급 마법도 못 쓰고, 자신의 최대 역량도 끌어내지 못하는 마법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멜로니아는 추악한 번성의 대주교.

다른 대주교들에 비해 직접 전투력이 떨어진다 해도 그것이 멜로니아가 폄하 당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설령 유혹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어중간한 중위 마법사나 오러 유저 혼자서는 결코 멜로니아를 어찌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은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멜로니아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준이 어긋난 건지, 일부러 한 건지 얀델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굵은 낙뢰.

어찌나 강력한지 조금 전에 멜로니아가 쏘아 보낸 마력포는 날아가던 도중에 여파에 휘말려 증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낙뢰가 떨어진 장소. 이곳은 더욱 경이로웠다.

술자가 서 있는 장소를 제외하고 움푹 파인 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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