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그리 생각했다.
배드 엔딩 일러스트로 점액에 절여진 채, 촉수에 박히는 일러스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미친 새끼들은 와! 정기흡수 효율이 2배! 를 외치면서 남자에게도 박더라.
박으면서 박히는 것도 꽤 색다른 기분이라나 뭐라나.
히로인이 촉수에 휘감기는 모습을 보는 거면 몰라도, 내가 직접 촉수에 당하는 건 좀…그렇잖은가.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준비하던 마법을 조금 더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기습을 당했으니 열받은 멜로니아가 바로 반격해올 터. 그때 오히려 한 방 먹여줄 생각이다.
…어째서인지 멜로니아는 거리만 벌릴 뿐, 곧장 반격해오지 않았지만.
“대답해!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
“당연한 거 아냐? 내 향기를 맡았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아, 그건가? 너 혹시 고자야? 아니면 남자 좋아하니?”
“…….”
자기 매료가 먹히지 않았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기습까지 당해놓고 싸우려 들기는커녕 대답부터 들으려는 멜로니아에게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짝가슴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멜로니아의 가슴은 벌써 절반 가까이 회복되어있었다.
원래 사교도가 좀 회복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빛 속성 공격에는 취약할 텐데.
대체 얼마나 정기를 흡수해놨길래 재생력이 이만한 수준인 건지….
어이없어하는 심정으로 멜로니아를 향해 코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됐으니까 좀 떨어져라. 아까부터 닭장 냄새가 나잖아.”
“다, 닭장…?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달콤한 멜로니아에게 닭자아앙?!”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분하는 멜로니아.
달콤한 이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 멜로니아는 주로 향기를 통해 주변에 매혹을 건다.
그걸 이렇게 원색적으로 부정당했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갈 수밖에.
하지만 성욕을 추구해야 할 추악한 번성의 대주교가 분노를 내세운다? 자연스레 권능이 전체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지.
이를 증명하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동조차 없던 피셔맨들이 살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멜로니아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
이게 먹힐 줄은 몰랐는데…한쪽 가슴을 날려버린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시작이 좋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씩씩대는멜로니아에게 슬쩍 스태프를 겨누었다.
“뭐, 좋아. 자세한 이유 같은 건 나중에 실컷 들을 수 있으니까. 나중에 울고불고 빌어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쥐어짤….”
“블래스트 번!”
몰래 준비한답시고 마법진도 못 그리고, 영창도 제대로 못 외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력한 마법.
화아아악!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불덩이가 멜로니아를 향해 쏘아진다.
“너, 이…!”
눈을 표독스럽게 뜬 멜로니아가 양손을 쭈욱 뻗었다.
에너지 드레인으로 내 마법에 담긴 힘을 빨아들이려는 건가.
전투와 연이 없는 종족인 서큐버스라도, 상위 개체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흡정 능력이 극에 달하면 온갖 것에서 에너지를 빨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그렇기에 명확한 형태가 없는 공격…이를테면 화염이나 바람 계통 공격은 고위 서큐버스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
멜로니아 또한 이를 잘 알고 있기에 놀라긴 했어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에너지 드레인을 시도하는 거고.
아무리 내가 한가락 하는 구석이 있다고 해도, 하급 마법 정도는 가뿐히 막을 자신이 있는 거겠지.
…평범한 하급 마법이었다면 말이다.
화르르륵!
허공에서 타오르던 불덩이가 돌연 여러 개로 쪼개진다.
“하! 여러 개로 나누면 괜찮을 줄 알았어?”
자신만만하게 뻗은 손을 쫙 펼치는 멜로니아. 허나 그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에 물들었다.
“어…?”
여러 개로 쪼개진 불덩이는 멜로니아의 에너지 드레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조금 작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위협적인 크기.
“이건…귀쟁이들의 비전?”
그렇다. 블래스트 번은 대지와 화염의 원소 조합 마법.
쪼개진 화염은 그 자체로 형태를 갖추며 물리적인 힘을 가지게 되니, 에너지 드레인의 영향을 덜 받을 수밖에.
여유 넘치던 얼굴을 와락 찌푸린 멜로니아가 황급히 날개로 자신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발현되는 분홍색의 실드.
정기 마법인가.
뱀파이어들이 자신의 피를 소모해 리스크가 큰 혈마법을 난사하듯, 서큐버스는 축적해둔 정기를 소모하여 마법의 위력이나 신체능력을 강화시킨다.
정기는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인 만큼 효율은 좀 떨어져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기에 가능한 일.
이것저것 생략한 블래스트 번으로는 뚫기는 힘들겠지. 성가셔졌네.
콰아아앙!
화염의 파편들이 실드 위를 두드리고,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킨다.
꽤 살벌한 소리였으나, 예상대로 멜로니아의 실드에는 약간의 금만 갔을 뿐 부서지진 않았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수복됐고.
이것이 카를라와 엘리샤가 그리도 걱정하고, 멜로니아가 조금 전까지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이유.
바로 절대적인 체급의 차이다.
내가 아무리 원소 조합이니, 유사 공명이니 하는 기술로 위력을 올려봤자 하급 마법은 하급 마법.
멜로니아가 작정하고 만든 실드를 뚫는 것은 극히 지난한 일이겠지.
하위 마법사와 대주교 사이에는 이만한 격차가 있는 것이다.
비교적 손쉽게 쓰러뜨린 소피아 또한 카를라가 없었다면 쓰러뜨리지 못했을 테고.
하지만 내 목적은 여기서 멜로니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웅-
블래스트 번의 여파가 시야를 가리자마자 지금껏 일부러 사용하지 않고 있던 투명 로브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로브를 타고 흐른 마력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땅을 박찬다.
파밧.
각종 포션과 보조마법이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속도로 몸을 밀어낸다.
빠르게 흙먼지 속을 빠져나오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테라!”
이렇다할 영창조차 필요 없는 기초 마법. 하지만 마력을 잔뜩 집어넣은 덕분에 꽤 많은 양의 흙이 바닥에서 솟아오른다.
순식간에 생겨난 흙으로 된 계단.
이대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피셔맨 무리를 단번에 뛰어넘는다.
그럴 생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도약했다.
하지만 역시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까.
“어딜 가는 거야? 좀 더 누나랑 놀자니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멜로니아의 목소리에 지금까지 잠잠하던 피셔맨들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정확한 내 위치는 모르는지 여기저기로 몸을 내던지고, 무기를 휘두르는 녀석들.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은 빗나가고 서로에게 중상을 입힌다. 하지만 일부는 운 좋게도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온다.
“젠장.”
무기는 진작에 내던졌는지 몸통박치기 맨몸으로 날아드는 피셔맨 하나가 내 옆구리에 틀어박힌다.
쩌엉!
미리 두르고 있던 방어 마도구 덕에 별다른 상처는 없지만…허공에 떠오른 보호막 때문에 위치를 들키고 말았다.
“거기 있었구나? 혼자만 즐기고 가는 게 어딨어? 누나도 즐겁게 해줘야지.”
“누나는 개뿔. 나이가 못해도 내 4배는 되는 주제에.”
“쓰읍! 이거 좋게좋게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조금 길을 들여놓는 수밖에.”
말투는 장난스럽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여유가 담겨있지 않다.
하기야. 한번 기습당한 것도 모자라 예상치 못한 마법에 한방 얻어맞을 뻔했으니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멜로니아가 완전히 회복된 가슴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냄새에 멋대로 아랫도리가 부풀기 시작한다.
정신은 멀쩡해도 몸이 반응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심지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너희들? 나를 위해 저 아이를 잡아주겠니?”
분명 저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
이에 멍하던 피셔맨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Kwa furaha!”
“Mkamate!”
“Acha nikuguse kifua chako!”
“돌겠네.”
쉬운 길이 전부 막혔으니, 남은 건 어려운 길뿐.
하지만 이게 유일한 길이라면.
“가야지.”
이 자리에서 멜로니아를 죽인다.
어떻게 해서든.
“Kwa furaha!”
“Mkamate!”
“Acha nikuguse kifua chako!”
사방에서 들려오는 피셔맨들의 괴성.
하필이면 포위망을 넘어서다 떨어진 터라, 놈들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손 뻗으면 닿을 정도. 지금이야 마도구의 실드로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
쩌적.
벌써 금이 가기 시작하는 보호막을 보아하니 다음 마법을 준비할 시간도 부족할 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하압!”
심장으로부터 뿜어진 마나를 한차례 모은 뒤, 별도의 제련없이 단번에 뿜어낸다.
퍼엉!
마력 폭발.
물리력을 가질 정도의 막대한 마나가 주변을 후려치자, 내 몸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푸른 폭풍.
이에 휘말린 피셔맨들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진다.
제대로된 마법이 아닌만큼 내 몸에도 반동이 왔으나, 아직 효과가 남아있는 지속 회복 물약 덕에 빠르게 나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 기회다.
저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가장 포위가 얇은 쪽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었다.
“타올라라. 파이어 볼!”
짧은 영창. 허나 그 위력은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머리 만한 불덩이가 한 피셔맨의 가슴팍에 부딪혀 폭발한다.
콰아앙!
맞은 건 한 놈이지만, 후폭풍으로 주변의 대여섯이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개중에는 어디 한 군데 날아간 놈도 있고.
그렇게 드러난 틈을 향해 땅을 박찼다. 우선은 포위당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니까.
다만 이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는 걸까.
“어딜 도망가!”
공중에 떠있던 멜로니아가 이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날아오는 분홍색 광선.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색. 그러나 멍때리고 있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