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내 목덜미가 있던 곳에서 교차하는 검과 창.
어느새 다가온 피셔맨 솔저가 양옆에서 서로의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순간 무기가 얽혀 움찔한 틈을 타 준비했던 마법을 해방했다.
“썬더 볼트!”
스태프로 방향을 유도하지 않고, 그저 나를 중심으로 뿜어낼 뿐인 마법.
마나 소모도 상당하고 정확성도 떨어지지만…지금은 상관없다.
마나도 아직 넉넉하고, 대충 쏴도 맞을 만큼 몬스터는 가까웠으니까.
파지지직-!!
푸르게 명멸하는 시야.
“Mwili…mwili!!!”
“Inaungua!”
번개에 감전된 피셔맨이 괴성을 내지르며 눈코입으로 새까만 연기를 뿜어낸다.
힘없이 흘러내리는 둘의 무기를 염력 마법으로 낚아채 전방으로 쏘아낸다.
전방위 썬더 볼트로 한번 주변을 정리한 덕에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날붙이가 허둥대던 피셔맨 둘의 미간과 심장을 꿰뚫는다.
엉킨 그물을 쥐고 있는 걸 보아, 조금 전에 내게 그물을 던진 녀석이겠지.
더 이상 가로막는 것도 없는 길을 잽싸게 내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조금 전처럼 빽빽하게 뭉쳐있지는 못하고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가장 앞서 달려오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검을 똑바로 쳐다보며 H&A 시절의 기억을 되새겼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놓고, 발끝은 안쪽으로 오므린 것을 보아 레반틴 제국의 제식 검술이 분명하다.
정직하고 우직한 검술…의 탈을 쓴 기교파 검술.
한 번이라도 검을 맞대거나, 피하기 위해 몸을 뒤튼다면 그대로 말려들어 발목을 붙잡힌다.
일단 적을 묶어두고, 다른 강자 혹은 머릿수로 몰아붙이기 위한 실로 제국다운 검이다.
그러니 아예 자세를 무너뜨릴 정도의 강격을 날리거나…뒤이어지는 모든 연계 검술을 쳐내면 된다.
곧은 선을 그리며 내 이마를 향해 떨어지는 검을 향해 스태프를 쥔 손을 뻗었다.
동시에 오른쪽 발을 대각선 앞으로 크게 한 걸음.
쩌엉-!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미리 걸어둔 실드가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도 제 역할은 다했는지 검 또한 옆으로 빗겨나갔다.
검을 늘어뜨린 자세가 된 스켈레톤 나이트의 눈이 푸르게 빛난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대각선 올려 베기.
알고있는 패턴이다.
손목을 꺾어, 스태프로 녀석의 관절 부분을 후려쳤다.
퍼억!
아직 힘이 들어가기 전에 얻어맞아서 그런지 손쉽게 저지당하는 스켈레톤 나이트.
비틀거리는 녀석이 돌연 손잡이를 짧게 잡더니, 그대로 검을 찔러온다.
그렇겠지. 수직 베기 뒤에는 수평 혹은 대각선 베기. 마지막에는 찌르기로 이어지는 연계니까.
훅! 하고 가까워지는 시퍼런 검날이었으나…내가 미리 가져다 댄 단검에 막혀 그 궤적이 비틀어졌다.
카가가각…!
불똥을 튀기며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검.
동시에 무방비해진 녀석의 옆구리를 향해 스태프를 겨누었다.
“솟구쳐라! 워터 캐논!”
이번에는 제대로 스태프 끝에 모여든 마력이 고압의 물줄기로 화했다.
콰아아아-
이렇다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물줄기에 밀려 날아가는 스켈레톤 나이트.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초.
평범한 스켈레톤의 몇 배는 강하다는 강화형 언데드임에도 이 정도인가.
돌파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진다.
사교도처럼 지능이 높은 상대라면 자신의 공격이 읽힌다는 것을 깨닫고 변칙적인 태도로 돌아서겠지만…몬스터는 그렇지 않다.
놈들은 본능이 강해 별도의 명령이 없는 이상 싸우던 대로 싸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
즉, 내가 아는 패턴대로 움직인다는 소리다.
심지어 숫자는 많아도, 결국 여기 있는 몬스터라고는 구울, 스켈레톤, 피셔맨 이 셋뿐. 그닥 복잡한 패턴을 가진 녀석들도 아니다.
몇몇 강력한 아종이 있다고는 하나 결국 근본이 같다보니 공격 패턴도 비슷할 수밖에 없고.
중요한 건 쉬지 않고 달리는 것 하나다.
계속해서 움직이며 포위되는 상황을 피한다. 그렇게 1대1 혹은 2대1 정도의 상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할 일은 극도로 단순화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격은 전부 H&A에서 몇 번이고 경험했던 것들이다.
하물며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방금 막 본 것처럼 생생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검의 궤적, 그물이나 창이 날아오는 타이밍, 발톱이 튀어나오는 틈새, 독이 흩뿌려지는 범위.
그 모든 것들이 똑똑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남은 건 이에 맞는 대응을 하는 일뿐.
몸은 생각대로 움직인다. 마력을 아낄 필요도 없다.
끝없는 마나는 단순히 마나량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마나 회복량에도 막대한 보너스를 주는 특성이니까.
심지어 지금은 포션 빨로 지속 회복까지 이루어지는 중이 아닌가.
필요한 건 칼날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용기뿐.
…이 또한 진작에 각오는 끝났다.
에드메렉과 싸우며 얻은 교훈을 아직 잊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몬스터 군세를 상대하면서도 내가 해야할 일은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다.
눈으로 공격의 전조를 확인하고 손목을 꺾거나 관절을 후려친다. 그렇게 드러난 빈틈에 마법을 쑤셔 넣는다.
공격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사각지대를 향해 몸을 비집어 넣는다. 여유가 있다면 적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넣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잠깐 시간을 벌어, 준비한 마법으로 길을 뚫고 다시 내달린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패리와 저스트 가드, 그리고 마법 영창을 반복할 뿐인 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시스템 보정이 있는 내겐 충분히 해볼 만한 일.
이래 보여도 나름 H&A의 고인물 아닌가.
기발한 공략 루트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조금만 예상에서 벗어나면 허둥대기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일에 한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잘해낼 자신이 있다.
모든 몬스터를 쓰러뜨리지는 못해도, 돌파하는 정도는 역시 해볼 만하네.
하지만 내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카를라와 엘리샤가 말렸던 이유는 따로 있다.
정신없이 몬스터 사이를 헤집고 나아가기도 잠시.
여차하면 이쪽을 압사시킬 듯이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돌연 멈춰 서더니, 이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둥글게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마치 경기장이라도 만들어주는 것 같은 모양새.
그렇게 일부는 내 주변을 넓게 둘러싸고, 나머지는 본래의 목적인 이오나를 향해 다시 진군을 시작한다.
생각보다 늦었네. 이오나가 그만큼 잘 싸우고 있는 걸까?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다리를 잠시 멈추고, 이오나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성대한 마법이 뻥뻥 터져 나오는 격전지. 하지만 그 안에서 유유히 빠져나오는 인형이 하나 있었으니.
뾰족 꼬리를 살랑거리며 날아오는 보라색 머리의 미인.
머리에 솟은 뿔과, 허리춤에 달린 기다란 박쥐 날개가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서큐버스의 모습을 한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어머? 너 진짜 귀엽구나? 딱 내 취향인데…죽이긴 좀 아깝네.”
은근 슬쩍 몸을 비틀며 가슴을 강조하는 여인.
“이리 오렴. 괜찮아. 누나는 널 해치지 않는답니다~ 많이 힘들었지?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 거야.”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코끝까지 달달해지는 체향을 내뿜는 저 여인을…나는 안다.
달콤한 멜로니아.
성욕을 상징하는 악신, 추악한 번성의 대주교.
안 그래도 이성을 유혹하는 데는 도가 튼 서큐버스가 추악한 번성의 권능까지 받으면 얼마나 강력해지겠는가.
경계하고 있음에도, 멜로니아의 달콤한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지금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가 전부 피셔맨, 그것도 수컷인 것을 보아 저들도 순식간에 멜로니아에게 매료당한 것이리라.
“으윽…큿….”
“옳지. 잘하고 있어. 응. 어서 누나 품에 안기렴?”
눈을 몽롱하게 풀고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멜로니아.
활짝 벌린 팔 사이로 드러난 젖가슴이 예사롭지 않은 출렁거림을 자랑한다.
“아…가슴….”
“세상에…얼굴만 취향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기가 더 엄청나잖아…?”
서큐버스의 종특과 추악한 번성의 권능도 대단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멜로니아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길게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보라색 머리카락. 언뜻 보면 순진해 보이는 이목구비는 눈 밑에 찍힌 점 하나로 색기를 더한다.
거기에 몸매는 또 어떤가. 여성성이라는 말을 그대로 표현한 것만 같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여인. 그것이 멜로니아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중요 부위만 살짝 가린 옷차림에도 절로 눈이 간다.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옷과 흘러내리는 살결.
“후후. 역시 어린 남자가 좋다니까. 다들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오면 좋을 텐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을 내미는 멜로니아에게 홀린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치 얼마든 안겨보라는 듯한 모습.
자연스레 출렁이는 가슴. 그 말랑말랑한 살결을 향해…….
그대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쐐애애액-!
“어떻게…!”
황급히 물러서는 멜로니아. 다만 조금 늦었는지 아니면 가슴이 너무 풍만한 탓인지, 한쪽 젖가슴을 살짝 찔리고 말았다.
얕은 공격이라도 어쨌든 명중했기 때문인지 단검이 하얗게 달아오르며 빛을 뿜어낸다.
파앙!
“꺄아아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짝가슴이 된 멜로니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0.7페이.”
별로 크지도 않네.
“0.7페이.”
별로 크지도 않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짝가슴이 된 자신의 흉부를 끌어안은 멜로니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내 매료에서 멀쩡할 수 있지? 거기에 0.7 페이라니 그건 또 뭔데!”
“그 정도 가슴으로는 날 홀리지 못한단 소리지.”
“이것도 크거든?! 아니, 애초에 그분의 권능에 내 능력이 섞인 향기를 겨우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항할 수 있을 리가….”
맞는 말이다.
서큐버스 태생으로 추악한 번성의 대주교 자리까지 올라간 멜로니아는 매료 계통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종족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 건 물론이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극혐하는 피셔맨들조차 홀릴 정도니 말 다했지.
사실상 멜로니아의 매혹은 정신공격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다만 내겐 통하지 않는다.
한창 마력을 끌어올린 상태라 저항력이 높아졌으며, 각종 포션과 스크롤로 보호받는 중인 데다가, 멜로니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하필이면 자신 있게 흔든 가슴이 페이보다 작아서 팍 식은 것도 있고.
이유는 다양하다. 허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내가 서큐버스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뿔 달린 토끼였던 몬스터가 촉수를 토해내고, 에드메렉은 자기 몸보다 훨씬 큰 걸 삼킬 수 있게 됐던 것처럼.
서큐버스 또한 악신을 섬기며 약간의 외형적 변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는…그래. 촉수가 달렸거든. 그것도 하반신에.
쉽게 말해 후타나리라는 소리다.
자기들 딴에는 여자에게도 정기를 빨아들일 수 있게 됐다며 만족스러워했고.
사교도와 몬스터는 무조건 찢고 죽여야 하는 H&A에서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서큐버스가 적으로 나오면 바로 세이브 하고 한 번쯤은 일부러 당해보는 게 국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