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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73화 (173/230)

“후….”

어찌어찌 고비는 넘겼나. 이제 다시 몬스터 사이에 섞여 접근하면 되겠지.

최대한 쓸데없는 전투를 줄였으니 조금 전의 고생도 의미가 있었다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던 도중.

“???”

누군가 목 뒤로 얼음이라도 미끄러뜨린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반사적으로 단검과 스태프를 고쳐 쥐고 기감에 집중하자 금방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던 산만한 살기가 어느새인가 내게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

설마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빌프리트로인해 초토화된 곳 너머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제야 얼굴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을 자각했다.

조금 전에 공격을 피한답시고 이리저리 뒹굴다가 로브의 후드가 벗겨졌나.

아마 녀석들 눈에는 내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걸로 보이겠지. 당연히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재빨리 후드를 눌러 썼지만, 이미 늦었다.

“키야아아아악!”

“kumuua huyo jamaa!”

“딱! 따닥!”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다양한 울음소리를 내며 일제히 달려든다.

사방을 가득 채운 몬스터의 물결.

한번 눈치채면 투명화 정도로는 다시 숨을 수 없는 듯 하다.

몰래 움직이는 것도 여기까지인가.

“씁…그래도 이 정도 왔으면 나쁘지 않네.”

이제는 쓸데없이 마력만 집어삼킬 뿐인, 로브의 투명화를 풀었다.

절반 정도는 숨어왔으니, 나머지 절반은 힘으로 뚫고 가면 될 일이다.

두근-

중첩된 버프로 평소보다 강한 마력이 체내를 맴돈다. 이에 호응하듯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코어.

넘쳐나는 마력을 스태프 끝에 모으며 영창을 외웠다.

“단단한 자여. 날카로운 자여. 너는 내 손에서 쏘아지는 포탄이어라. …락 블래스트!”

땅에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그저 덩어리였던 바위가 대여섯개로 쪼개지며 말뚝 같은 형상을 취했다.

그 중 하나를 전방을 향해 쏘아내며, 뒤를 따르듯 몸을 던졌다.

쐐애애액-!

회전하는 바위 말뚝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피셔맨 워리어와, 그 뒤의 부하들을 일렬로 찍어누른다.

퍼억!

난전의 신호였다.

***

이오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복잡한 수인을 맺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무식하게 달려드는 회색 괴인의 주먹을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뿌득.

워낙 힘이 강해서일까. 괴인을 반대편으로 날려버린 이오나였으나, 팔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인 팔. 하지만 이는 1초도 채 되지 않아 재생되었다.

로드급 뱀파이어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격이 다른 재생력이다. 그 광경에 그녀를 상대하던 아일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린다.

“난 이래서 언니가 싫었어. 내 팔을 잘라갔으면서 자기 팔은 멀쩡해? 왜? 왜 나만 아파야 해? 왜 나만 고통스러워야 해? 왜 언니만 멀쩡해?”

“그래서 내 가족을 다 죽였니 아일라?”

“언니 가족은 나잖아! 그 정신 나간 흡혈귀들이 아니라!”

이를 으득 갈며 눈알로 이루어진 팔이 다양한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분해의 마안, 석화의 마안, 왜곡의 마안, 폭발의 마안.

4개의 마안이 동시에 발현되며 이오나를 향해 쏘아진다.

하나하나가 어중간한 마법사라면 대응조차 못 할 위력적인 마안.

마력을 분해해 마법을 와해시키고,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주변의 공간을 왜곡시켜 퇴로를 막은 뒤, 심장 어림께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단 한 수였지만, 이오나를 죽이기 위한 고뇌가 담겨있는 조합이다.

이오나가 아일라를 죽이고 싶어하듯, 아일라 또한 이오나의 목숨을 거두고 싶어했음이 잘 드러나는 일격.

물론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지만.

공간이 밀폐되기 전에 블링크로 이동한다. 준비하던 마법은 분해의 마안이 뿜어낸 광선에 미끼로 내던졌고.

뒤이어 핏빛 안개에 자신의 석화를 떠넘겼으며, 마지막으로는 심장만 철저히 감싼 채 아일라에게 달려든다.

퍼어엉!

폭염 속을 돌파하는 이오나.

창백한 피부가 붉게 물들며 수포가 피어올랐으나…아일라에게 닿았을 때에는 이미 전부 재생되어있었다.

“하아아아앗!”

마법을 내던지며 비어있는 손으로 무언가를 잡고 휘두르는 이오나.

그 짧은 사이에 자신의 피를 직접 단조해 만들어낸 대검을 잡고 휘두른 것이다.

혈마법 중에서도 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혈조술 계통.

본래 완성 속도가 빠른 계통이긴 하나, 이오나의 속도는 그 격이 달랐다.

완벽하게 형성된 혈검血劍이 아일라의 흉측한 어깨 노리며 휘둘러진다.

여기서 한 번 더 팔을 잘린다면 마안의 대부분을 잃게 되는 셈이라 아일라의 전력은 급감할 터.

하지만 이오나는 아일라 혼자와 싸우는 게 아니었다.

“이러니까 여자는 싫다니까요.”

입술을 삐죽이며 아일라의 앞을 막아선 보라색 머리의 미인.

한쌍의 뿔과 날개. 그리고 악마 꼬리가 달린 전형적인 서큐버스의 모습을 한 여인이 혈검 앞으로 손을 뻗었다.

슈우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급격하게 형태를 잃는 이오나의 혈검.

“쯧.”

혀를 찬 이오나가 다시금 블링크로 거리를 벌린다.

서큐버스의 흡정은 뱀파이어의 흡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혈액은 예로부터 정기가 가득 담겨있는 생명의 정수.

아무래도 혈액 그 자체를 다루는 혈조술은 에너지 드레인 앞에 그 형태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물론, 이오나와 일대일로 싸운다면 제대로 대응하기도 전에 목이 잘려나갔겠지만.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지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피 묻은 손을 가볍게 흔드는 서큐버스.

“아! 그래도 레즈는 예외랍니다. 혹시 이오나 언니는 여자 좋아하시나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울컥한 이오나가 손을 휘젓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핏방울.

하나하나에 꺼지지 않는 불이 붙어 꽤나 위협적인 마법이나.

“전투 중에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마….”

늘어지는 말투의 소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반투명한 결계가 생성되며 이오나의 마법을 튕겨냈다.

“역시 결계 하나는 믿음직스럽다니까? 어때? 이번 일이 끝나면 한 발 빼줄까?”

“귀찮아…됐으니까 빨리 싸우기나 해….”

“하긴. 저번에 보니까 서지도 않더라.”

키득거리는 서큐버스와 그런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 한숨만 내쉬는 소년.

그 외에도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기름이 줄줄 흐르는 뚱뚱한 중년 여인, 화려한 장식을 둘둘 말고 나온 콧수염 사내.

마지막으로 날아갔던 회색 피부의 괴인이 쿵쿵거리며 돌아와 이오나의 앞을 막아섰다.

여섯 대주교를 바라보며 이오나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나하나는 상대도 안 될 것들이….”

“와…오랜만이네! 옛날에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어 언니? 어디 보자…분명 몸만 멀쩡하면 상대도 안 될 것들이…였던가?”

“…….”

아일라가 히죽이며 이오나의 속을 긁어댔다.

일부러 조롱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참기 힘든지 이를 악무는 이오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턱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아니. 그때와 지금은 달라.”

자기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희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오나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는 쪽이었으니까.

개인적이 복수도 이유긴 하지만…머뭇거리면서도 달려가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오래 전에 잘못했던 일을 이제야 바로잡는 기분.

이오나가 홀가분해진 심정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 가는 길에 부디 빌어먹을 여동생을 끌고 갈 수 있길 바라며 마력을 재차 끌어 올리는 순간.

파앙!

“???”

돌연 들려오는 폭발음에 이오나도 사교도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바보 바보!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자기도 모르게 습관이 된 말투가 튀어나올 정도로 당황한 이오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 전 폭발의 주인은 진작에 도망친 줄 알았던 얀델이라는 걸.

재능도 있고, 실력도 있고, 뭘 어떻게 한 건지 하위 마법사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뛰어넘은 얀델이다. 실제로 제법 잘 싸우고 있고.

하지만 그런 얀델에게도 지금의 행위는 자살이나 다름없다.

저 많은 몬스터 무리를 거슬러 오는 것도 불가능하며, 어찌어찌 돌파한다 해도 기다리는 것은 추기경 하나와 대주교 여섯이다.

이오나가 아일라와 다른 대주교를 몇몇 붙잡아둔다 해도 전부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하나둘 정도는 빠져나갈 테고, 얀델은 이를 감당할 수 없겠지.

그 사실이 이오나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플래시백 시켰다.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위해 몸을 내던진 전 로드.

그녀의 모습이 귀기어린 눈으로 몬스터 떼를 헤집는 얀델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한다.

잠깐이지만 저 멀리에 있는 이오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내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스켈레톤이 앞을 가려 확실한지는 않지만.

“그 어 어 어 어…!”

이가 나가고 녹슨 탓에 톱처럼 삐죽삐죽한 도끼날. 맞으면 절단상보다 파상풍이 더 위험해 보이는 무기를 향해 오히려 몸을 던졌다.

턱!

도끼 날이 아닌 손잡이 부분이 어깨에 부딪히며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당황한 스켈레톤이 입을 딱딱거리며, 급한 대로 내 목덜미라도 깨물려 했지만…조금 늦었다.

이미 내가 녀석의 경추에 단검을 휘두르는 중이었으니까.

빠각!

아쉽게도 단검의 추가타는 발동하지 않았으나, 그간 쌓아온 근력 스탯 덕인지 녀석의 모가지가 단번에 부러진다.

목만 떨어뜨렸을 뿐, 두개골은 멀쩡한 터라 스켈레톤은 부서지지 않고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노리던 바다. 슬슬 때가 됐을 테니까.

팔로 녀석의 척추를 휘감은 채, 어깨를 앞으로 내세워 돌진했다.

방패로 써먹으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뼈만 남은 녀석이라 공격을 막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럼에도 굳이 녀석을 붙잡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피셔맨들이 던져대는 그물을 쳐내기 위해서니까.

쉬이익-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아오는 그물을 확인하자마자, 내디딘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어 그대로 축 삼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렇게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팔에 걸어두었던 스켈레톤을 내던졌다.

“하아앗!”

하늘 위로 솟아오른 뼈가 정확히 그물의 중앙에 명중한다.

목 없는 스켈레톤을 휘감고는, 그대로 왔던 궤적을 되돌아 날아가는 그물.

“kupata haki!”

저 멀리서 들려오는 뭐라는지 모를 피셔맨의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급히 허리를 뒤로 꺾었다.

채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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