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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71화 (171/230)

힘차게 뛰며 마력을 뿜어내는 심장. 주변을 후려친다는 이미지로 모았던 마력을 단번에 방출했다.

카득!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압박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카를라와 엘리샤 또한 거의 동시에 풀려난 듯, 참았던 숨을 푸욱 내쉬었다.

“저주에요 당신.”

“나도 알아. 몸을 구속하는 저주 같은데, 다행히 그닥 강력한 저주는 아니었던 것 같….”

“…주인님?”

달리다 말고 내 말을 끊는 카를라. 답지 않은 행동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검지를 쭉 뻗어 하늘을 가리킨다.

“어?”

문제없이 잘 올라가다 말고 갑자기 멈춰선 오색 연기.

조금 더 정확히는 멈춰 선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 느릿해진 연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방금 막 빠져나온 구속의 저주는, 우리가 아니라 이리스에게 보낼 신호를 향해 쏘아졌다는걸.

우리는 그저 휘말렸던 것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나를 저주로 구속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저주라는 것 자체가 생물체에게 쏘아질 것을 전제로 한 마법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법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 우리는 이를 기적이라 부른다.

평범한 저주가 아닌, 권능의 또 다른 형태를 취한 저주만이 마나의 흐름마저 구속할 수 있으리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수히 많은 언데드를 대동한 의문의 여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자신의 손톱을 쉬지 않고 깨무는 녀석.

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음침한 분위기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톱날 손톱 소피아.

저주와 언데드 조종의 전문가이자, 편협한 찬탈의 대주교.

그녀가 멈춰선 우리를 보며 하얗게 살이 튼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카를라. 저거 해주 가능하겠어?”

“아까부터 해보고 있는데 안 되겠네요.”

만약 저 신호가 이리스에게 도착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잠시 이오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굳건히 버텨선 마력의 벽이 쉴 새 없이 핏물로 된 무구들을 사출하며, 사교도 놈들을 견제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방벽 너머로 넘어온 건 소피아 하나뿐이라는 소리.

대체 어떻게 우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뿐이라면 대주교급이라도 해볼 만하다.

지금은 카를라도 함께 있으니까.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언데드 무리의 선두를 노려보았다.

아직 살점이 붙어있어, 이들이 며칠 전까지 여기에 살던 수인족이었음을 알 수 있는 구울들.

그들의 반쯤 썩어버린 귀와 꼬리를 보며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다들 전투 준비.”

우선. 이 녀석부터 쓰러뜨려야 한다.

톱날 손톱 소피아.

일전에 쓰러뜨렸던 구토하는 에드메렉이 특수한 권능으로 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면, 소피아는 그 반대다.

편협한 찬탈의 신도들 사이에서는 무척 흔한 사령술과 저주에 관련된 권능만을 부여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권능들을 갈고 닦아 기어이 대주교의 자리에 올랐다.

평범하지만 에드메렉처럼 눈에 띄는 약점은 없는 타입.

뭐…눈에 띄는 게 없을 뿐, 여느 보스들처럼 약점 자체는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언데드 무리들.

가장 선두에 선 수인족 구울의 반쯤 썩은 귀와 꼬리를 향해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다들 전투 준비.”

어떤 계획을 짜건, 그 첫 번째는 이리스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소피아를 쓰러뜨리는 것부터 생각하자.

나 혼자라면 힘들겠지만…카를라와 엘리샤가 함께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으로는 저번과 똑같아. 내가 최대한 언데드를 상대할 테니, 엘리샤 너는 카를라를 지켜. 그리고 카를라는…알지?”

“이쪽은 걱정 마시길. 카를라에게 손댈 수 있는 건 저와 당신 둘뿐이니까요.”

“너도 안 되거든! 주인님뿐이거든! …전력을 다할테니 어떻게든 버텨주세요 주인님.”

믿음직스러운 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우웅-

허공에 떠오른 적색과 녹색 마법진이 서로 합쳐지며, 빠르게 복잡기괴한 문장을 채워나간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이렇게 전력을 다한 캐스팅 중엔 꼼짝도 못하기 마련이나, 내게는 시스템 보정이 있다.

입으로는 미친 듯이 주문을 외우며 손으로는 착실하게 각종 포션을 꺼내 주변에 뿌려댔다.

언데드들의 반응을 둔화시키는 동화 포션, 정신 방벽을 한 단계 강화시키는 마인드 디펜스 포션, 일정 시간 동안 독을 중화시켜주는 지속 해독 포션, 그 외에도 이것저것….

도움이 될 만한 거라면 일단 죄다 꺼내고 봤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무방비해 보였던 걸까.

어느새 몇 걸음이면 손톱이 닿을 거리까지 도착한 구울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살점 대부분의 썩어 너덜거리는 손톱. 저게 박혀봐야 얼마나 깊게 박히겠냐 싶지만….

진짜 무서운 건 손톱이 아니라, 손톱에서 뚝뚝 떨어지는 타르 같은 검은 액체다.

구울의 시독屍毒은 아주 약간으로도 극도의 고통과 괴사를 일으키는 맹독이니까.

물론 안 맞으면 그만이지만.

“타오르라. 몰아쳐라. 그리하여 나의 분노를 대변하라. …템페스트 번!”

내가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넓은 범위를 가장 강한 위력으로 불태우는 마법이 펼쳐졌다.

화르륵.

겹쳐진 마법진으로부터 해방된 화염 폭풍이 달려오던 구울을 그대로 불태워 버린다.

“크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르면서도 손을 뻗어보는 녀석. 허나, 이 마법은 화염과 바람의 원소를 조합한 것.

단순히 온도만 높은 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저지력 또한 가지고 있다.

적어도 불타고, 녹아내린 근육으로는 거스르지 못하겠지.

거세게 타오르는 시체들이 폭풍 속에서 비틀거리다 뒤로 쓰러져 바닥을 구른다.

방사형으로 쏘아진 마법이라 가까운 거리의 몇몇은 옆으로 빠져나와 내게 달려드는 것 같았으나.

“게일 토네이도!”

엘리샤의 재빠른 마법에 밀려, 다시 불구덩이 속을 뒹굴 뿐이었다.

안 그래도 무른 살점들이 타오르고, 벗겨지며 하얀 뼈만 남아 달그락거리기 시작한다.

아마 저들은 본래 쿤달 항구에서 살아가던 수인족들이었겠지.

살아서는 마안으로 세뇌당해서, 죽어서는 언데드로 되살아나 편협한 찬탈을 위해 일한다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복잡해지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마무리해야지.

언데드가 된 이상 겨우 이 정도로 안식을 되찾진 못할 테니까. 기껏해야 구울이 스켈레톤이 됐을 뿐이려나.

템페스트 번의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단단하고, 또 무거워라. 그것이 대지의 철퇴일지니. 바위 던지기!”

처음 이름 붙인 사람이 드워프라 그런지, 다소 투박한 마법명.

하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하다.

쿠그극-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바위.

들어올렸던 스태프를 아래로 떨구자, 아직 허우적대는 수인족 구울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앙!!

발에서부터 전해지는 충격과 함께 허우적대던 뼈가 전부 으깨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여! 포스 그랩!”

염력 마법을 이용해 살짝 땅에 박혀있는 바위를 밀쳐냈다.

쿵! 쿵!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가는 거대한 돌덩어리.

그 경로에 있던 언데드들이 달려오다 말고, 황급히 옆으로 몸을 던지지만…기본적으로 굼뜬 녀석들이다 보니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돌덩이에 깔린 스켈레톤이 속절없이 부서지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네.

…이제 선두 그룹 하나를 와해시켰을 뿐이지만.

저 멀리에 보이는 무수한 망자의 군세. 이오나에게 향하던 것들 중 일부만을 끌고 왔을 텐데 이렇게나 많다니.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음 마법을 위해 마력을 끌어 올렸다.

널브러진 뼈 무더기를 밟고 다음 스켈레톤들이 척척 발맞춰 진군해온다.

조금 전의 돌진은 간보기였다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짜는 것이 여간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전열에는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스켈레톤이, 후열에는 활을 들고있는 스켈레톤이.

텅빈 두개골 너머로 번뜩이는 푸른 불꽃을 보고 있자니 절로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게 언데드지. 이래서 편협한 찬탈이 무서운 거다.

하나하나는 별거 아닌 녀석들인데, 그런 놈들을 왕창 모아 군대를 조직하니까.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바닷가에서 올라오는 피셔맨도 대충 비슷할 거다.

침을 꼴깍 삼키는 사이. 해골 무리 사이에서 홀로 손톱을 짓씹는 노파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저주가 완성된 걸까. 언데드의 진군에 맞춰, 삐뚤빼뚤한 손끝을 내게 겨누는 소피아.

본래라면 저주에 당해 허우적대는 사이, 언데드들이 달려들어 나를 조각조각 예쁘게 찢어 놓겠지.

…아주 익숙한 패턴이라 잘 알고 있다.

톱날 손톱 소피아는 기본을 갈고 닦아 대주교에 자리에 오른 이.

그렇기에 특별한 약점이랄 것은 없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모든 순간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말은 예측하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지금껏 소피아를 상대한 이들은 알면서도 대항하지 못해 스러졌겠지만…나는 다르다.

빈틈이 없는 탄탄한 전투 스타일이라고?

그럼 그런 소피아를 게임에서지만, 몇백 번이고 쓰러뜨린 나는 대체 뭐가 되겠는가.

장담컨데,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정석 플레이에 강한 사람이다. 아무렴. H&A의 플탐이 몇 시간인데.

속으로 2.5초를 세며, 타이밍에 맞춰 끌어 올린 마력을 전방에 쏘아냈다.

후욱-!

마법으로 가공한 것이 아닌 순수한 마력 그 자체가 푸른 빛을 뿜어내며 날아간다.

마치 낮은 곳에서 내리는 별똥별 같은 느낌.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허공을 노닐던 마력이 돌연 까맣게 변색되더니, 그대로 가루처럼 분해되어 사라진다.

소피아가 쏘아 보낸 저주가 마력과 충돌해 반응한 것.

그래. 마법사를 상대할 때면 언제나 마력에 반응하는 저주부터 사용하곤 했지.

만약 맞았다면 마법을 사용하는데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맞았다면 말이지만.

당황한 소피아에게 히죽 웃어주며 준비해두던 마법의 시동어를 읊었다.

“빛이여. 나의 힘이 되어다오.”

스태프 근처에 떠오르는 빛으로 된 구체 몇 개.

마법을 준비하던 도중에 마력을 한차례 쏘아내서인지, 그 기세는 다소 미약하다.

물론 이는 다시 마력을 쏟아부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아직 코어에 담긴 마나는 충만하거든.

우웅-

마력을 게걸스레 빨아먹은 광구光球가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운다.

어느새 내 머리 크기만큼이나 커진 빛 무리에 당황하며 다시 손톱을 깨무는 소피아.

늦었다. 이제 와서 쏘아낼 수 있는 저주라고는 효과가 미약한 즉발성 저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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