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냥 다른 이유가 있어서 방문한 걸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여기에 아일라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뿐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우리를 향해 이오나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무튼.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져. 여긴 너무 위험하니 너희는 이만 돌아가. 대주교 정도라면 모를까 추기경급을 상대하며 다른 사람을 신경 써줄 여력은 없거든.”
“하지만 약속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 바로 텔레포트로 보내줄 테니까 어서 가.”
맞는 말이다. 아무리 업적작이 중요해도 목숨만큼은 아니지.
“교수님은요?”
“나는….”
잠시 고민하던 이오나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나는 하려던 일을 마쳐야지.”
“…….”
아일라와의 결전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는 말린다고 말려질 일이 아니겠지. 이오나의 행동 원리는 복수.
무려 대전쟁과 300년의 세월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불꽃이, 겨우 목숨의 위협이나 내 만류 앞에 꺼질 리가 없다.
이오나는 오늘 아일라와 싸워서 끝을 보려 들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간에 말이다.
“…바로 지원을 부를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충분해! 충분해! 어쩌면 그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슬쩍 허세를 부린 이오나가 서로 손을 맞잡은 우리 앞에 섰다.
이번에는 나와 손을 잡지 않은 채로.
“바로 내 연구실로 보낼게. 한번에 먼 거리를 이동하니까 조금 멀미날 수도 있을 거야!”
그리 말하고는 우리의 머리 위로 원을 그리는 이오나.
다시한번 막대한 양의 검붉은 마력이 피어오르며 우리의 시야를 가렸다.
이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이오나의 연구실 풍경이 눈에 보이겠지.
그 길로 바로 정의로운 광명 교단과 아카데미 측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한다.
그게 다른 지부건, 왕실직통이건 아무튼 곧장 이오나에게로 지원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닥치는 대로 대주교급 사교도들의 약점을 알려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네.
그 뒤로는 그저 이오나와 지원군이 잘 싸워주기를 바라야 할 뿐.
조금 씁쓸해지는 속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몇 번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하지만.
눈을 깜빡였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뒤바뀐 풍경이 아니었다.
와장창-!
유리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부서져 조각나는 검붉은 마력의 커튼.
그리고 혀를 차는 이오나와 저 멀리서 휘청휘청 다가오는 한 인형이었지.
이오나가 우리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나아가며 말했다.
“당장 뒤로 달려.”
이오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과 동시에, 꾹꾹 눌려있던 요염함이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매료를 제어할 여력마저 포기하고 전력을 다하려는 거겠지.
묘한 위압감과, 달짝지근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이오나가 재차 외쳤다.
“방해받아서 텔레포트는 못 쓸 것 같으니까 당장 달려서 가까운 마을까지 가! 여긴 내가 막을 테니까.”
이오나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비틀거리던 녀석의 뒤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
각 교단의 주교부터 대주교까지 듬성듬성 뒤섞인 기묘한 조합을 보고 직감했다.
이오나 버스가 뒤집어졌다는 걸.
이오나 버스가 뒤집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좆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이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위험한 상황은 아니거든.
혼자서도 대주교 정도는 가지고 놀고, 추기경이라도 약간의 접전 끝에 무리 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로드급 뱀파이어.
그게 이오나다.
내가 괜히 이오나 하나만 믿고 쫄래쫄래 따라온 것이 아니다.
이리스 또한 이오나의 강함을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고.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 부를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추기경 하나에 대주교가 일곱. 거기에 주교급도 한 열댓과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을 언데드 군세까지.
어지간한 대도시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전력이지만….
‘나는’ 괜찮을 거다.
이오나의 전력이라면 꽤 오랫동안 대등한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위험한 건 내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기로 결심한 이오나지.
“여긴 내가 막을 테니까 어서 가!”
평소와 달리 위압감과 요염함이 뒤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이오나의 말에 따르려 멋대로 움찔거리는 다리를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는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한쪽 팔이 없어 비틀거리듯 걸어오는 여인. 그 뒤로는 내가 아는 중간 보스들의 얼굴이 잔뜩 포진해있다.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언데드와, 저 멀리 바닷가에서부터 기어 오는 피셔맨은 덤이었고.
다시 한번 찬찬히 선두에 선 여인을…분명 처음 보는 것임에도 묘하게 익숙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한 20대 후반 정도 됐을까. 외모에 걸맞지 않게 노파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다만 눈동자에서 감도는 익숙한 검붉은 빛이 약간의 위화감을 선사한다.
실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나…그래도 저 이목구비를 보니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응시하는 아일라.
편협한 찬탈의 추기경이자, 이오나가 그리도 죽이고 싶어 하던 여동생 바로 저 여인이리라.
“뭐하는 거야! 어서 가라고!”
“엇.”
잠깐 멈칫하는 것도 답답했던 걸까. 이오나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손에 뒷덜미를 붙잡힌 것처럼, 몸이 강제로 끌려간다.
염력 마법인가?
카를라와 엘리샤도 대충 비슷한 상황인지 당황한 얼굴로 나란히 풀밭을 나뒹군다.
잠깐 사이에 족히 10m는 멀어진 나와 이오나.
그 사이로 방대한 마력이 벽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우리를 밀어내는 것처럼, 혹은 적들이 우리에게 닿는 걸 막아내는 것처럼.
반투명한 붉은색 방벽 너머로 이오나가 슬쩍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색기를 풍기는 낯선 요녀의 분위기.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것은 익숙한 장난스러움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지원을 부르러 가는 거야. 얀델 학생이 빨리 오면 나도 살 수 있으니까 부탁할게. 알았지?”
“…….”
어린아이도 속이지 못 할 뻔한 거짓말.
지원을 부르러 간다? 어디로?
어중간한 마을로 가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변변찮은 통신 마도구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 변방 항구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뛰어서 얼마나 걸릴까.
마법을 활용한다 해도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하나하나가 이오나의 어설픈 거짓말을 반박할 수 있는 내용.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이오나의 마지막 말이, 눈빛이, 미소가, 그 모든 것들에 담긴 감정의 무게에 압도되어 굳어있었을 뿐.
카를라가 그런 나를 잡아끌었다. 이오나의 반대편으로.
한 걸음. 두걸음. 세걸음.
관성이 붙자, 누가 이끌지 않아도 다리는 절로 움직인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짧은 한숨을 내쉬는 이오나의 뒷모습뿐.
어쩐지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하고 싶은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멀어졌다. 여기서 외쳐봐야 이오나에게는 들리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이오나가 치켜든 창백한 손 위로 핏빛 마력광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정신 차리세요 주인님! 어서 이쪽으로!”
내 손을 잡아당기는 따스한 손길에 무심코 앞을 돌아보고 말았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요란스러운 폭음
콰아앙-!
등 뒤에서부터 덮쳐오는 열풍에 절로 몸이 비틀거린다.
굉음이, 충격의 자릿수가 다르다.
통상적으로 하급 마법은 사람 한 명을 능히 해할 수 있는 위력이라고 한다.
중급 마법은 잘 짜인 베테랑 파티를 전멸시킬 수 있으며, 상급 마법에 이르러서 성채를 무너뜨린다고 한다면.
조금 전의 이오나가 쓴 마법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이에 적중하고도 멀쩡하게 적의를 불태우는 사교도 놈들은?
확실한 건 지금의 내가 끼어들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
충격파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덕분일까.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씻겨져 나간 기분이다.
조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계획을 전부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짜기 시작했다.
꼭 우리가 아카데미나 주변 도시까지 가야만 지원을 신청할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즉시 인벤토리에서 이리스와 연결된 수정구를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직. 지직-
아쉽게도 수정구는 매끈한 표면 위로 내 얼굴을 반사할 뿐, 이리스의 목소리를 뱉어내진 않았다. 들리는 거라고는 알 수 없는 노이즈뿐.
하긴. 공간이동을 막아뒀는데, 통신 수단을 가만 놔둘 리가 없지.
물론 아직 방법은 있다. 수정구를 깨뜨리면, 어디 있고 어떤 상황이건 이리스가 나를 찾아올 거라 했으니까.
“흡!”
쨍그랑!
수정구를 바닥에 내던지자, 그 잔해에서부터 오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평범한 연기가 아니라 마나의 변형인 것 같네.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 위로 뻗어나가는 연기를 본 카를라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주인님! 그걸 여기서 깨트리시면…!”
“어차피 공간이동은 막혀서, 한 번에 오지도 못하잖아. 어디까지 결계가 쳐져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리고 이리스 혼자 와도 힘들 거야. 차라리 텔레포트가 막혔다는 그 자체로 경고하는 게 훨씬 나아.”
이리스는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다. 분명 내 경고를 눈치채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오겠지.
예를 들면 아카데미의 교수들이나 선신 교단에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이름을 팔면, 그리고 자신이 내 노예라는 사실을 밝히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사이에 최대한 여기서 떨어져 안전을 확보해야….
구웅-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돌연 주변의 공기가 이상할 정도로 무거워졌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에서 느껴지는 저항감.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다.
마력을 끌어올려 전신을 순환시켰다. 조금 가벼워지는 어깨.
기본적인 저항으로는 턱없이 부족한가 보네.
그럼 남은 건 정공법뿐이다.
아카데미에서, 그리고 카를라에게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코어를 쥐어짰다.
두근.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