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65화 (165/230)

“아무튼. 아무튼. 다들 준비 끝났으면 바로 출발한다?”

이오나의 말에 카를라와 엘리샤를 돌아보았다.

아직 가면은 완성되지 않아 로브뿐이나, 그 안에는 나름 괜찮은 장비를 입고 있을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말없이 스태프와 원드를 꺼내는 둘.

나 또한 인벤토리에서 스태프와 단검을 꺼내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됐어요 교수님.”

“좋아! 좋아! 그럼 이제 출발할 테니까 다 같이 손잡아!”

내밀어진 이오나의 손을 붙잡았다. 뱀파이어답게 좀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반대쪽 손에는 카를라가, 카를라의 손은 엘리샤가 붙잡으며 하나로 이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오나가 비어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텔레포트로 바로 이동할 테니, 괜히 마력을 끌어올려서 저항하지 마. 그러다 잘못하면 혼자 바닷속이나 지면 깊숙한 곳에 전이될 수도 있거든! …어쩌면 팔 한쪽만 날아갈 수도 있고!”

“…명심할게요.”

살벌한 경고에 카를라와 이오나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확인하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리는 이오나.

우웅-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며 이오나의 손끝에 응축되기 시작한다.

검붉은 마력광.

일전에 실습 던전에 진입할 때 이오나가 선보인 텔레포트 게이트와 비슷한 색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결과가 조금 달랐다.

거대한 문이 생기는 대신, 이오나가 마력광으로 빛나는 손가락을 우리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러자 커튼처럼 흘러내리는 마력광.

강대한 마력에 둘러싸인 탓일까. 코어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발하며 끓어오른다.

물론 이 본능에 따랐다가는 이오나의 경고대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겠지만.

“————————.”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로 들려오는 이오나의 영창 소리.

작게 웅얼거리는 데다가, 그 속도 또한 빨라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이를 배경음 삼으며 코어를 달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이오나의 마력이 점점 옅어지더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스르륵 사라진다.

그렇게 다시 드러난 주변은…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분명 이오나의 연구실이었건만, 그 잠깐 사이에 우리는 숲속에 내던져져진 것이다.

“와….”

“이건…대단하네요.”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카를라와 엘리샤.

다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햇빛마저 가릴 만큼 빽빽이 자란 나무들.

그럼에도 새 소리나 벌레 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사위.

마지막으로 누구 하나 없을 것 같은 적막한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산장까지.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 교수님?”

“어라? 어라? 여기 맞는 거 아냐?”

“위치는 맞는데…너무 정확해서 문제죠.”

저 산장이. 아니, 이 일대의 지하 전체가 편협한 찬탈의 지부니까.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다들 마법 준비해. 언데드 동화 포션까지 뿌려두면 더 좋고.”

우드득-

지면에서 하얀 뼈만 남은 손이 삐져나온다.

죽은 자들의 손님맞이였다.

“다들 마법 준비해. 언데드 동화 포션까지 뿌려두면 더 좋고.”

우드득-

말을 끝마치자마자 지면을 뚫고 올라오는 새하얀 뼈만 남은 손.

침입자를 감지한 보초 언데드들이 튀어나오는 거겠지.

지금쯤 한창 각자의 열등감을 불태우며 신앙을 증명하던 사교도들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챘을 테고.

“실드!”

“보이지 않는 방패여, 실드!”

카를라와 엘리샤가 정석대로 실드부터 펼쳤다.

나는 어차피 방어 마도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직접 실드를 시전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하늘색 포션을 꺼냈다.

스켈레톤들이 상체까지 뛰쳐나왔을 때쯤에 우리 셋의 머리에 언데드 동화 포션을 하나씩 뿌렸다.

그리고는 한 병 더 꺼내며 이오나에게 물었다.

“교수님도 뿌려드릴까요?”

“아니! 아니! 난 뱀파이어라 약빨이 좀 떨어져!”

“앗.”

하긴. 뱀파이어가 평범한 종족은 아니지. 일단 언데드로 분류되면서 피를 다루는 탓에 생명력은 넘쳐나니까.

이오나가 슬슬 몸을 일으키는 스켈레톤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굳이 감각을 혼란시킬 필요도 없거든!”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이오나가 짧은 주문을 읊었다.

“내가 피눈물을 흘리는 만큼, 나의 적은 생명을 쏟아내리라. 블러드 레인!”

딱!

들어올린 손으로 핑거 스냅을 날린 순간.

난데없이 하늘에서 핏물이 비처럼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향해서. 그리고.

부글부글.

핏방울이 닿은 부분부터 해골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오오….

-딱, 따닥….

-궤에에엥….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주저앉아, 흙 속으로 가라앉는 언데드들.

원소 마법이 아닌, 주력기인 혈마법.

심지어 상위 마법사인 이오나가 짧게나마 영창 하는 걸 보아, 중급에 달하는 마법인 걸까.

십 수 초 만에 주변의 언데드들이 깔끔하게 쓸려나갔다.

뻘쭘하게 스태프를 내리는 우리에게 이오나가 은근 엄청난 가슴을 활짝 펼치며 으스댔다.

“엣헴! 엣헴! 이 이오나 교수님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바짝 붙어 따라오는 데만 집중해! 나중에 몇놈 보낼 테니 그것들만 상대해보고! 점수에는 안 들어가지만 교수의 눈으로 봐줄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쓰러뜨려 봐!”

양 검지를 자신의 눈가에 가져다 대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이오나.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자세를 다잡았다.

“알겠어요. 그럼 선두는 잘 부탁드릴게요.”

“으응…?”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오나였으나, 몇 번 던전을 돌며 익숙해진 우리의 삼각 대형을 보고는 핏빛 눈을 크게 떴다.

“훌륭해! 훌륭해! 그럼 이제 바로 시작해 보자! 산장 지하로 내려가면 되는 거 맞지?”

“어…그렇긴 한데 교수님 화력을 보아하니 굳이 함정으로 떡칠된 통로로 내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저쪽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저희 쪽에서 역으로 뭔가 설치해두고….”

유저들 사이에서는 산장 지부라 불렸던 지하의 구조를 떠올리며 어림잡아 적당한 부분의 지면을 탁탁 발로 두드렸다.

“이오나 교수님. 여기를 무너뜨려 주시겠어요?”

“응응. 그 정도는 가능한데…여기가 어디길래?”

“조금 오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제 계산대로라면 한 번에 이곳 지부장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아하? 아하? 그럼 뭔가 자료를 처분하거나 빼돌리기 전에 빼낼 수 있겠구나?”

“바로 그거죠. 천장이 무너지는 거야…나중에 마법으로 들어 올리면 되는 거니까요.”

장난기 가득하던 이오나의 얼굴이 약간의 싸늘함을 풍기며 스산하게 변했다.

“좋네. 다들 내 뒤로 물러서.”

이오나의 지시대로 뒤로 향하자 우선 유일한 출구인 산장 쪽에 결계를 치는 이오나.

무어라 중얼거리며 마력을 끌어올리더니, 이내 검붉은 막 같은 것이 산장 전체를 둥글게 감쌌다.

“흡혈의 장막….”

이를 지켜본 카를라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흡혈의 장막이라면 나도 뭔지 알고 있다. 적으로 만난 뱀파이어는 플레이어가 만만해 보이면 우선 저 마법부터 펼쳐서 퇴로를 막으려 들었으니까.

효과는 간단하다. 물리적, 마법적 차단이라는 기본적인 성능 하나니까.

다만, 주변 적들의 생명력을 흡수해 스스로 강도를 높인다는 부가 효과가 붙어있어서 무서운 거지.

큰 거 한방이 없는 타입, 혹은 있더라도 술자의 역량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에는 결계를 뚫지 못하고 말라 죽는 수밖에 없으리라.

뭐. 약간의 꼼수를 부리면 쉽게 파훼할 수 있긴 한데…여기 사교도 놈들이 거기까지는 모르겠지.

퇴로를 막아둔 이오나가 조금 전에 내가 가르쳐준 지점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꿰뚫는 가시창. 피의 결속. 뻗어나가는 줄기. 그 누구도 감히 나의 작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이라. …블러디 쏜 스피어.”

이번에는 위력을 늘리기 위함인 걸까. 또박또박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손바닥 앞에 마법진까지 띄우는 이오나.

핏빛 마법진이 빠르게 회전하며 알 수 없는 문장을, 나름의 체계하에 그려 나간다.

환하게 빛을 발하는 마법진. 그 중앙에서 검붉은 핏물로 이루어진 가시덩굴이 뿜어져 나왔다.

빠드득.

창날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달고 있는 덩굴이 순식간에 지면을 파고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째로 들어 올려지는 지면.

뿌리처럼 분열한 가시들이 흙을 붙잡고 있어, 무너지지 않고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치 뚜껑 열리듯 덮여있는 흙은 물론이요. 지하 건물의 천장까지 뽑아낸 이오나.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지길래 슬쩍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들여다보자.

“끄아아아악!”

안쪽까지 파고든 다른 덩굴의 가시가 한 사교도의 사지를 꿰뚫어 벽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여느 사교도처럼 칙칙한 검은색 로브.

하지만 가슴팍에 황금실로 수놓아진 부릅뜬 눈동자 모양의 심볼이 인상적이다.

잘 찾아왔네.

저건 편협한 찬탈의 신도 중에서도 간부급만 쓸 수 있는 상징이니까.

그리고 이곳. 산장 지부 책임자의 계급은 주교다.

단번에 지부장을 제압한 이오나가 제집인 양, 자연스런 자세로 큼직한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내려와!”

“어…넹.”

내가 하자고 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쉬워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며 구멍 속으로 폴짝 뛰었다.

카를라와 엘리샤 또한 같은 생각인지 좀 표정이 미묘하네.

가시에 꿰뚫려, 곤충 박제처럼 벽에 고정된 지부장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네놈…!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는 빌어먹을 종자가 기어이 미친년과 손을 잡았구나!”

동시에 녀석의 눈이 요사스런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바로 눈뽕을 먹여주었다.

“라이트!”

“큭!”

억지로 눈을 떠보려 했으나, 결국 생리적인 반응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린 지부장.

“새끼가. 어딜 마안부터 날리려….”

콰직!

“끄아아아아아아악!!”

“…어, 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분열된 가시에 양쪽 눈을 찔려 장님이 된 녀석.

가시의 주인인 이오나는 떨떠름해 하는 내게 잘했다는 듯 윙크를 날리고는, 바로 정색하며 지부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