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마나 코어가 마나를 저장하는 것처럼 에너지화된 피를 보관하고, 필요에 따라 실체화하는 기관이며.
진혈은 원액 같은 거라 약간 희석하면 막대한 양의 평범한 피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뱀파이어의 온갖 특수능력의 출력과, 피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고.
일전에 이오나에게 받았던 혈정도 진혈을 적절히 가공해 만드는 것이라나.
덤으로 흡혈한 상대를 권속으로 만드는 것도, 피를 빨아들인 뒤 진혈을 주입해야만 가능한 일이고.
이오나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들 하나하나가 H&A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설정들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H&A를 오래, 그리고 깊게 즐겼던 터라 내가 몰랐던 설정이나 뒷 이야기가 나오면 좀 흥미진진해진단 말이지.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내가 좀 이상하게 보였던 걸까.
이것저것 질문하던 내게 이오나가 장난스런 미소로 역질문을 던져왔다.
“뭐야 뭐야. 얀델 학생이 이렇게 뱀파이어에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걸? 이런 것도 모르던 게 신기할 정도야!”
“뭐, 저도 뱀파이어에 관해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긴 합니다만…조금 결이 다르다고 할까….”
“응응. 어떤 내용이길래 그래? 한번 말해 봐봐! 눈앞에 진짜 뱀파이어가 있으니 진짠지 아닌지도 확인하기 쉬울 거 아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우선 뱀파이어의 약점은 심장이에요.”
“…응?”
“뱀파이어의 재생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모든 피를 쏟기 전에는 잘 안 죽거든요. 심지어 목이 잘려도 살아있더라고요.”
“그, 렇긴 하지?”
“네. 그러니까 심장이 약점인 거예요. 재생하기 힘든 섬세한 기관인 데다가, 피까지 대량으로 쏟게 되니 재생력 자체도 약해지거든요.”
“어….”
“물론 정말 강대한 뱀파이어라면 심장이 찔리고도 즉사는 면하겠지만…거의 숨만 붙은 수준이겠죠. 운이 좋으면 오랜만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 뱀파이어가 패닉에 빠지기도 하고요.”
“운이 좋으면…?”
“아, 그리고 빛과 신성력에도 약하네요. 물론 교수님처럼 인류의 편에 선 뱀파이어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지만, 여전히 홀로 살아가거나 악신에게 붙은 놈들에겐 빛과 신성은 맹독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뱀파이어도 엄밀히 말하면 언데드에 속하잖아요?”
“으응….”
“다만 빛 속성 마법은 다른 마법과의 시너지를 내기 어려운 데다가 난이도도 높은 편이고, 신성력은 공격적인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문제가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둘 다 써먹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죠.”
“얀델 학생…?”
“그럴 땐 불 속성 마법을 쓰는 게 최고예요. 화상을 입은 부위는 재생 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거든요.”
“저기….”
“여기까진 마법사의 관점이었고. 다양한 속성 대신 오러 하나만을 가진 기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겠죠. 물론, 오러 자체가 속성을 띠는 경우도 있지만…그건 예외적인 경우니 지금은 제외하고요.”
“그, 그만….”
“아무리 뱀파이어의 재생력이 뛰어나도, 절단된 부위를 순식간에 재구성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굳이 치명상을 노릴 필요 없이 손가락 한 마디라도 조금씩 절단해가며 돌려 깎는 게 정석이죠.”
“…….”
이후로도 뱀파이어의 안개화, 박쥐화를 활용한 도주와 기습에 대처하는 방법.
매료를 역이용하는 꿀팁, 발악 패턴인 피의 폭주가 가진 빈틈, 일시적으로 로드와 권속의 연결을 끊는 노하우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 레이드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H&A에서 뱀파이어가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나오지는 않지만, 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거든.
하나하나가 네임드에 중간보스 급이다보니 뉴비 때는 정말 고전했었지.
오랜만에 게임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 들어 신나게 이것저것 떠들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용해진 분위기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리를 부여잡은 카를라와 한숨만 푸욱 내쉬는 엘리샤.
그리고 어째서인지 뱀파이어라는 걸 감안해도 굉장히 창백해 보이는 이오나.
“교수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신가요?”
“으음…얀델 학생?”
“네?”
“혹시 얀델 학생은…그, 뭐냐…뱀파이어 헌터라거나 뭐 그런 거야? 300년 전에 사라진 직업 아니었어…?”
“어, 음.”
대충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알겠네.
“그런 거 아닙니다. 제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방법에 관해 많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엔 다 사정이….”
“괘, 괜찮아! 괜찮아! 나는 착한 뱀파이어야! 매주 한 번씩은 교회에도 가고, 조약은 한 번도 어긴 적 없는걸! 심지어 아일라에게 뒤통수 맞았던 것 때문이긴 해도, 그날 이후로 아예 사람 피를 마신 적이 없어! 그리고 또….”
횡설수설 손짓·발짓까지 곁들이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이오나.
그나저나 사람 피를 안 마시는 게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이었구나.
수혈팩의 형태라면 언제든 마셔도 되고, 본인의 허락이 떨어지면 직접 흡혈도 괜찮다고 들었거든.
뭐…매료나 기타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게 아니라는 증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오나처럼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동물 피만 마실 필요는 없단 소리다.
이오나의 호소는 이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봤지만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길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겠어요. 진짜로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정말 정말? 지쳐 보인다고 뒤에서 슥삭…같은 거 하면 안 된다?”
“아, 쫌! 애초부터 의심한 적 없으니까 여기로 부른 이유부터 알려주세요! 점심시간 다 끝나가잖아요!”
“…헉! 맞다. 깜빡하고 있었어!”
허겁지겁 품에서 반지 3개를 꺼내는 이오나.
은색 테두리에 보석 하나 달랑 박혔을 뿐인 휑한 디자인의 반지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보석의 색이 이오나의 눈동자 색처럼 검붉다는 점?
“이거 이거. 위치 추적이 가능한 반지야! 내 피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성질을 이용한 거라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마법적인 방해를 받아도 문제없이 작동할 거야! 혹시 모르니까 하나씩 가져가서 주인 등록해 놔!”
그리 말하는 이오나의 손가락에는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이런 거 하나씩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카를라. 엘리샤. 이리 와. 끼워줄게.”
둘에게 차례대로 반지를 끼워준 뒤. 내 손에도 끼웠다. 조금 사이즈가 맞질 않아, 새끼손가락에 넣어야 했지만.
“그럼 이제 주인 등록만 하면 돼! 각자의 피 한 방울을 보석에 떨어뜨리면 끝이야!”
이오나의 지시대로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반지로부터 묘한 끌림 같은 것이 느껴지다가 사라졌다.
조금 전의 그 끌림이 위치를 찾는 방법인 거겠지.
“잘했어! 잘했어! 앞으로는 약간의 마력만 불어 넣으면 반지 간의 끌림으로 방향과 거리를 대충 알 수 있을 거야! 중요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 너무 오래 잡아서 미안! 이제 교실로 돌아가도 괜찮아!”
“네. 그럼 내일 다시 뵙죠.”
“응응. 그러자고!”
이오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남은 건….
“방과 후에 페이 선배 공방에만 잠깐 들르면 되겠네.”
몇 가지 부탁한 게 있거든.
편협한 찬탈.
질투와 연이 깊은 악신으로, 혼탁한 합일처럼 직접 전투에 나서기로 유명한 놈이다.
당연히 놈을 숭배하는 사교도나 몬스터도 그만큼 전투에 특화된 권능을 내려받게 되는데.
알기 쉽고 파괴력에 특화된 혼탁한 합일과 달리, 편협한 찬탈의 권능에는 음험한 구석이 있다.
저주, 독, 환상, 환청 등등.
온갖 디버프와 정신계열 공격으로 상대를 끌어내리는 것이 주된 권능이니 말 다했지.
그렇다고 실제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절대 방심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이오나가 있다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이오나와 사교도 지부 토벌을 결정한 순간, 바로 페이에게 몇 가지 물건들을 부탁했다.
오늘은 그걸 찾으러 가는 거고.
페이와 이어진 후, 공방의 열쇠를 받았던 터라 이번에는 굳이 초인종을 누를 것도 없이 그냥 들어갔다.
끼익-
“페이 선배? 저희 왔어요.”
“아, 응. 잠시만 기다려 줘 후배님. 지금 조금 중요한 작업 중이라….”
평소처럼 어두컴컴한 공방. 그 안에서 별처럼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물건들 사이로 페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새로 산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벌써 꼬질꼬질해진 가운. 너무 압도적인 덕에 뒤에서도 슬쩍 보이는 옆가슴.
어떻게 쓰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설비 앞에 선 페이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글-
그러자 플라스크 안에 담겨있던 형광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허공에 떠오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길이 있어, 이를 따라 흐르는 것 같은 모양새.
아마 저번에 다 같이 마신 바다의 축복 비약의 효과로 얻은 수류 조작 능력이리라.
그렇게 뭔가 위험해 보이는 형광색 액체를 길게 뽑아낸 페이가 반대쪽 손으로 가볍게 훑어내리자.
우득.
눈을 뭉칠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얗게 빛나는 결정이 일정 간격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던전 보상으로 얻은 마력 결정화 특성이네. 잘 써먹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진다.
자신이 뽑아낸 결정을 한차례 살펴본 페이는 다시 한번 수류 조작으로 형광색 액체를 플라스크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처음 꺼낼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색도 연해지고, 밝기도 약해졌네. 저 결정만큼 마력 액기스가 빠져나갔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허공에 남아있는 결정을 하나를 아래쪽에 준비해둔 포션 병으로 떨어뜨리는 페이.
안에 담겨있던 회색빛의 칙칙한 물약으로 결정이 녹아든다. 그리고 일어나는 격한 마력 반응.
부글부글-
스스로 끓어오르며 하얗게 빛나는 물약. 꽤 강렬한 자기주장이었지만…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밝았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며 부글거리던 물약 또한 빠르게 안정되어갔으니까.
그렇게 모든 반응이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뜬금없이 하늘색이 되어버린 물약.
진지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페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남은 결정들을 다른 포션 병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퐁당 퐁당.
부그르르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마력 반응. 그렇게 순식간에 하늘색 포션을 여럿 완성시킨 페이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쭐렁.
어찌나 기세 좋게 회전했는지 상하좌우로 자유분방하게 흔들리는 젖가슴.
그 위로 페이가 묘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와, 왔어 후배님?”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만 같은 부자연스러운 미소에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페이 선배. 이번엔 또 어디서 뭘 읽은 거예요?”
“으음…집에 돌아왔을 때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주는 여자가 있으면,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내용을 읽어서….”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무리해서 환한 미소를 지을 필요는 없어요. 중요한 건 반갑게 맞이해준다는 점이니까요.”
“어? 그런 거야?”
“그런 거예요. 적어도 저는요.”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제야 평상시의 음침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온 페이.
한결 자연스러워진 페이가 짧은 다리로 오도도 달려와 내게 달려든다.
“후배님! 보고 싶었어!”
“아니, 요즘 거의 매일 보지 않았어요?”
짧게나마 방과 후에는 항상 페이의 공방에 들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긴 한데 어째서인지 거의 3주 만에 만나는 기분이야!”
“그럼 어쩔 수 없죠.”
낄낄 웃으며 달려오는 페이를 마주 안아 주었다.
가장 먼저 닿는 부분은 당연히 보통 큼직한 게 아닌 가슴.
끝부분부터 닿은 페이의 가슴이 내 복부와 맞닿아 일그러진다. 그렇게 푹신한 압박감이 느껴진 뒤에야 허리에 휘감기는 팔의 감촉.
나 또한 페이의 등에 팔을 두르고 그대로 짧은 키스라도 하려 했지만.
“음….”
“헉.”
나와 페이 사이에서 쿠션 역할을 하는 가슴에 너무 커서 오히려 밀착하는 데 방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