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나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면.
왜 책상에 떡하니 야설과 노트를 올려둔 거지?
“교수님. 혹시 일부러 저한테 일기장을 보여주신 건…?”
“흠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이오나 쪽에서 스윽 시선을 돌렸다.
뭐야. 진짜야?
꿇었던 무릎을 은근슬쩍 펴며 외쳤다.
“설마…전부 교수님의 계획이었던 건가요?!”
“뭐, 뭐어?!”
“교수님이 절 유인해서! 자연스레 일기장을 엿보게 만들고! 책상 밑에 숨어들게 하고! 그렇게 제 약점을 잡으려던 거 아닌가요!”
“대체! 대체! 내가 얀델 학생의 약점을 잡아서 어디에 쓴다는 거야!”
“그거야 교수님이 잘 아시겠죠! 자기보다 350살 어린 제자의 약점을 잡아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죠?!”
당황한 이오나를 향해 최대한 배신감에 물든 비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참고로 모티브는 막 경매에서 사 왔을 때의 엘리샤다.
“애, 애초에 얀델 학생이 미행하거나 숨어들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거든!”
맞는 말이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이오나를 스토킹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하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정말 내 잘못이 되어버리잖아.
스스로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자괴감이 피어올랐지만….
이를 애써 집어삼키고는 이오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변태! 스토커! 범죄자! 제 약점을 잡아 난폭한 짓을 할 생각인 거죠?! 에로 소설처럼! …에로 소설처럼!”
선즙필승이라는 말을 아는가.
“변태! 스토커! 범죄자! 제 약점을 잡아 난폭한 짓을 할 생각인 거죠?! 에로 소설처럼! …에로 소설처럼!”
이제부턴 내가 피해자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얀델 학생!”
“아닌가요? 아니라면 절 그냥 놔둔 이유는 뭐죠? 일기장을 떡하니 놔둔 건?”
“그건….”
정말로 뭔가 켕기는 게 있긴 한 건지 말을 흐리는 이오나.
내 약점을 잡아 뭘 시키는 것까진 아니어도, 일부러 일기장을 읽게 놔둔 건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왜? 뭔가 이유가 있나?
…아니. 지금은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지.
방금 막 산 붕어빵을 실수로 전부 바닥에 흘렸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믿었는데! 교수님을 믿었는데…!”
“아니 아니! 진정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침입자는 내가 아니라 얀델 학생이잖아!”
“얀델은 그런 거 몰라! 이제 곧 교수님한테 덮쳐질 거야! 그간 쌓인 욕망에 엉망진창이 돼버릴 거야!”
“여기서 떼를?! 심지어 덮쳐달라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잖아!”
갑작스런 유아 퇴행에 당황한 이오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손만 꼬물거린다.
좋아. 지금이 완전히 굳힐 때인가.
쓸데없이 넓은 책상 위에 벌러덩 눕고는 스윽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처량한 눈물방울은 덤이었고.
“그,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면 되잖아요!”
좋아. 완벽했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분명 대화의 초점 자체가 흐려질 터.
미안함과 자괴감이 마구 뒤섞인 끝에, 이게 맞나 하는 반문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지만.
그래도 한번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기로 했으면 끝까지 가야지.
붕어빵의 약빨이 다해가는지라, 닭꼬치, 계란빵, 호두과자, 떡볶이, 호떡 등. 온갖 길거리 음식의 비참한 최후를 떠올리며 감정을 다잡았다.
주르륵-
그렇게 한줄기 눈물이 책상을 적실 때쯤.
“…좋아. 얀델 학생이 허락한 거다?”
어? 뭐지? 여기서 이런 반응이 나오면 안 되는데?
예상치 못한 이오나의 발언에 슬그머니 눈을 떠보자.
스륵. 턱.
그곳에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덮치듯, 책상 위로 올라타는 이오나가 있었다.
직접 피부가 닿은 곳은 하나도 없건만 그럼에도 확연히 전해지는 뱀파이어 특유의 서늘함.
거기에 억눌린 매료 때문인지, 잔향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달함까지.
이오나의 존재감이 확 부풀어 오르며 내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게 뭐람.
기대 반, 걱정 반, 두근거림 반. 총합 150%로 오버히트 중인 심장을 어찌어찌 진정시키는 것도 잠시.
돌연 이오나의 핏빛 눈동자가 사냥감이라도 바라보는 듯 날카롭게 번뜩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아차!
너무 몰아붙여서 되려 제정신을 되찾은 건가?
가끔 위기 상황이 되면 패닉에 빠지는 대신, 평소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타입이 있잖은가.
아무래도 이오나는 그런 타입이었나보다.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이오나에게 더 이상의 흔들기는 먹히지 않을 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에헷.”
“뭐야 뭐야. 아직 잠이 덜 깼던 거구나? 괜찮아 얀델 학생. 푹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테니까!”
그리 말하고는 야설책을 들어 올리는 이오나.
“어. 잠깐만요 교수님. 저 제정신입니다. 이제 헛소리 안 할….”
“이오나 펀치!”
쿵!
“껙.”
무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책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거 펀치 아니잖아….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억울함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이오나가 있었다.
“안녕! 안녕! 드디어 눈을 떴네!”
“……?”
뭐지? 데자뷰인가?
분명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으나…이오나의 옆에 놓여있는 익숙한 제목의 책 한권을 보자마자 모든 것이 떠올랐다.
“앗!”
당황한 내 모습에 이오나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있잖아! 있잖아!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줄 거지?”
“…넹.”
진짜로 진짜 어쩔 수 없네. 여기서 또 선즙필승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순간 책에 맞고 기절하기를 몇번이고 반복하겠지.
이젠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쿵저러쿵 구리구리오리너구리
“그렇게 된 거예요.”
살살 눈치를 보며 말을 끝맺자 이오나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뭐지? 화났나? 혹시 엿된 건가?
조심스레 마력을 끌어올리며 실드를 준비하는 것도 잠시.
“흫. 흐핫. 아하하하핫!”
어째서인지 이오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뭔데. 별다른 말 없이 웃기만 하니까 더 불안하잖아.
좌불안석이라는 게 이런 걸까. 낄낄대는 이오나와 달리 조용히 꼼지락대게 된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이오나가 평소의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어깨를 팡팡 쳐대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어떻게든 한 방 먹여보고 싶었다고? 열의가 있어서 좋네! 응응! 이오나 교수님은 그런 학생 정말 좋아하거든! …아직 한참 일렀던 것 같지만 말이야! 아하하하핫!!”
“그엑. 겍.”
어깨를 얻어맞을 때마다 몸이 마구 흔들린다. 무슨 마법사 근력이 이렇게 세?
뱀파이어라 그런가?
뱀파이어는 격이 높아질수록 신체적으로도 마력적으로도 강해지니까. 로드급인 이오나는 기본 신체 능력도 상당한 거겠지.
그렇게 이거 피멍 드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참 동안 어깨를 내주고 나서야 이오나의 웃음이 멈췄다.
“아 물론 그건 그거고, 연구실 무단 침입에 이것저것 훔쳐본 건 또 다른 문제지.”
“그 부분에는 이오나 교수님의 책임도 좀 있는 게 아닐까요? 일부러 보여줬잖아요!”
“그렇게 말하니 어감이 이상하잖아! 뭐…일기장 부분은 그래. 일부러 얀델 학생한테 보여주려고 했던 게 맞아.”
“역시 제 몸이 목적….”
“아냐! 아냐! 함정을 판 것 같은 모양새는 미안해! 근데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 애초에 왜 그렇게 자기 몸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어…지금까지의 경험에 의거한 판단이려나요?”
요즘 카를라가 대놓고 내 얼굴을 만지작댄다거나, 그러다가 은근슬쩍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많더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이오나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는 조심스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으…괜찮아! 괜찮아! 이젠 아카데미 학생이잖아? 아카데미에서 지켜줄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
아.
이거 그건가? 뛰어난 외모를 타고난 평민은 오히려 그 외모가 독이 돼서 인생이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도 그런 쪽으로 오해받은 건가?
이걸 해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이오나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갈게. 내가 얀델 학생에게 일기장을 보여준 건 맞아.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걸 시키려는 건 아니야.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런 거라면 그냥 물어봐도 됐을 텐데요?”
“…어? 정말? 정말? 물어보면 그냥 알려줄 거야?”
“내용에 따라서는요.”
어깨를 으쓱이자 이오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에우렐리아 대륙이 판타지 세상치고는 꽤 발전하긴 했지만…그렇다고 인터넷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정보의 가치는 여전히 높다는 소리.
내가 들끓는 고요의 권능을 밝히는 모습을 보고 뭔가 알고 있다 여긴 거겠지.
그러다 지금 기회가 온 거고.
이오나가 물어볼 내용은 대충 예상이 간다.
“던전의 위치 보단 사교도 지부에 더 관심이 많으시겠죠.”
“맞아. 맞아. 그중에서도 편협한 찬탈의 신도였으면 더 좋겠어.”
“몇 군데 알고 있는 곳이 있긴합니….”
“하지만 혹시 아일라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그걸 먼저 알려줬으면 해.”
“…….”
뭐요?
“설마 이오나 교수님 일기장에 나온 그 동생 분이요?”
“응응.”
“…아직 살아 있어요?”
“확실해 확실해. 내가 10년? 20년? 그쯤 전에 직접 만나서 한쪽 팔을 자르기도 했는걸!”
“설마 그 아일라가 제가 아는 아일라…?”
“맞아!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