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52화 (152/230)

너무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네.

다만 숨돌릴 시간은 없다. 이오나가 오기 전까지 남은 내용을 전부 읽어야 하니까.

어차피 뛰어난 기억력 덕에 한번 본 내용은 언제든 떠올릴 수 있을 테니, 책장 넘기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사락.

-악신이 에우렐리아 대륙 전체를 뒤엎고 있다.

신위 그 자체인 폭력 앞에서는 나도 로드도 어린아이에 불과하겠지.

많은 이들이 맞서 싸우다 죽거나, 굴복하여 사교도가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계속 숨어 지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할지 논의하던 와중.

레반틴 제국의 사절이 도착했다.

-인류 연합.

종족도, 과거의 원한도 상관없는. 오로지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연합.

이미 네르시아 왕국은 연합에 들어가기 했다는 모양이다.

우리도 들어가기로 했고.

이제부터 사람의 피는 상호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만 마실 수 있겠지만…그래도 다시 태양 아래를 거닐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애초에 프란체스카 클랜은 다른 곳처럼 피에 미쳐있지 않았기에 큰 디메리트는 아니었다.

물론 악신을 상대하는 건 두렵기 그지없긴 한데.

다행히 그 부분은 이번에 새로 나온 용사라는 녀석이 맡는다고 하더라.

우리 클랜이 할 일은 용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교도를 쓰러뜨리는 것뿐.

그 정도는 얼마든 가능하다.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에도 로드의 판단이 옳으리라.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동생 아일라를 만났다.

레반틴 제국의 황자와 네르시아의 국왕. 그리고 로드 프란체스카.

이 셋이 한데 모여 연합의 가입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파티가 한창이던 도중.

네르시아의 왕세자가 뜬금없이 자신의 시종이라며 아일라를 소개하는 게 아닌가.

전쟁 중에 무너진 성을 탈환하고 수복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갇혀있던 아일라를 발견했다고 한다.

내가 워낙 유명해진 터라 아일라와 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아챈 왕세자가 바로 보호해서 데려왔다나.

한창 프란체스카 클랜의 연합 가입이 대두되던 때니, 클랜의 2인자나 다름없는 내게 점수를 따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어쨌든 다시 아일라를 만났다는 점이니까.

친부모는 몰라도 아일라에게 악감정은 없다.

서로 의지하며 개 같은 부모의 개 짓거리를 버텨냈다는 동질감이라면 모를까.

다시 예전처럼 아일라와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왕세자가 따로 회포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아일라는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아일라는…나를 아주 닮았으니까. 내 대용으로 쓰려는 생각이었겠지.

로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도 아일라와 다를 바 없는 신세였을 테고.

이제 같이 살자며 아일라에게 권유했지만, 왕세자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조금 더 시종으로서 머무르겠다고 거절당했다.

왕세자를 좋아하는 걸까?

끝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내 동생이라 하더라도 10년간 다른 이의 노리개로 살았던 여인을 아내로 들이는 왕족은 없을 테니.

물론 이는 나보다 아일라가 잘 알고 있겠지.

나는 그저 웃으며 아일라의 선택을 지지해주면 될 일이다.

-연합에 가입한 뒤. 본격적으로 악신의 군세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후방에 있는 다른 연합국의 지원 덕에 어찌어찌 문제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아일라는 왕세자의 시종이자 내 동생이라는 위치를 살려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었고.

처음에는 곧 죽을 것 같이 어두웠던 아일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역시 만날 때마다 로드의 이야기를 해준 덕인 걸까?

항상 유쾌한 기행을 일삼는 분이기에 재밌는 이야기가 많거든.

어째서인지 아일라와 만날 때면 왕세자가 자꾸 끼어들었지만….

뭐, 연합의 돈독함을 위해 그런 거겠지.

-전쟁이 격화되자 점점 전선이 밀리고 있다.

아일라도 그게 걱정스러웠는지 여차할 때 프란체스카 클랜 쪽으로 도망쳐도 되겠냐고 묻더라.

다만 바로 답해줄 수는 없었다. 클랜의 주인은 내가 아닌 로드였기에.

물론 내가 물어보자 로드께선 흔쾌히 승낙하셨다.

아일라에게 프란체스카 클랜의 본거지인 폐성에 들어올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일라가 그리 환하게 웃는 건 재회한 뒤로 처음이었다.

이걸로 무슨 일이 생겨도 안심이네.

-사교도도 모자라 이젠 몬스터까지 몰려온다.

선신은 죽어도 안 믿더니 악신 상대로는 이리 간단히 엎드릴 줄이야.

줏대 없는 놈들.

그나저나 하루라도 몸에 피가 묻지 않은 날이 없다 보니 수시로 본능이 날뛴다.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참고 있지만…혹시라도 아군의 목덜미를 물어뜯을까 걱정된다.

그랬다간 연합에 들어온 뱀파이어의 입지가 좁아질 터. 당연히 로드에게도 민폐가 될 텐데.

고민중인 내가 불쌍했는지 아일라가 자신의 피를 나눠 주겠다고 했다.

상호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예전처럼 직접 흡혈해도 된다며 말이다.

아일라의 피는 달콤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언제나 뜻대로 움직이던 피가 먹통이다. 심지어 마력조차 딱딱하게 마법을 자아내기도 힘들고.

혈마법도, 일반적인 마법도 전부 막힌 상태.

요즘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아니면 어제 오랜만의 직접 흡혈을 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네.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말하려 사령부에 들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엿들었다.

네르시아 왕국이 정체 미상의 추기경급 사교도에게 함락당해?

수뇌부는 전부 죽고 하인들만 도망쳐 나오는 데 성공했다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사령부에는 하루만 쉰다고 했지만, 더는 전선에 머무를 수 없다.

어서 클랜이 있는 성으로 가야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일라에게 결계를 통과할 방법을 알려주길 정말 잘했다.

왕족과 귀족만 골라 죽였다고 하니, 일개 시종인 아일라는 괜찮을 거다.

분명 폐성에서 다른 클랜원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늦어버렸다.

결계를 통과하자마자 풍겨오는 코가 삐뚤어질 정도의 혈향.

인간이나 몬스터의 피 냄새가 아니다.

보다 짙고 잘 숙성된…그래. 뱀파이어의 피 냄새라는 걸 직감했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로드가 있을 알현실 쪽으로 향했다.

복도 중간중간에 보이는 사람 모양으로 눌어붙은 탄 자국과, 큼직하게 쌓여있는 잿더미들.

뱀파이어의 시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대신, 잿더미가 되어 먼지로 돌아간다 했던가.

설마 다른 클랜원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니, 아니겠지.

고개를 저어보지만 불길한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무언가에 뒤쫓기듯 미친 듯이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알현실의 문을 여는 순간.

알현실을 가득 채운 사교도들. 그리고 놈들 사이에 선 아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로드의 심장에 손을 박아 넣은 아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의 나를 저주한다.

내가 뱀파이어가 된 날. 로드에게 아일라도 구해달라고 했더라면.

내가 밖을 나돌아다니며 명성을 쌓을 때. 조금 더 깊이 조사해 먼저 아일라를 찾았다면.

내가 매혹을 완벽히 조절해 왕세자가 내게 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면.

내가 아일라에게 결계를 지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내가 아일라의 피를 빨지 않고, 멀쩡한 몸 상태로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면.

내가…내가 아일라의 질투를 조금 더 빨리 알아챘다면.

그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로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무력한 나를 구출했다는 것.

그리고 내 탓이 아니라며 되려 나를 위로하고 죽었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확실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던 로드의 시체가 타오르며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잿더미는 아무리 손에 쥐어도, 손가락 틈새로 허무하게 빠져나가고 말았다.

허나 흩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있었으니.

색이 예쁘다는 이유로 언제나 로드가 차고 다니던 보석 목걸이가 바로 그러했다.

본래 투명한 수정이었던 것을 로드의 피로 검붉게 물들였다고 했던가.

하나 남은 로드의 유산을 목에 걸며 되새겼다.

이젠 내가 프란체스카다.

나만이 프란체스카다.

“아니 뭔…?”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머리가 띵하네.

이오나의 클랜이 사교도에게 몰살당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쟁에 휘말린게 아니라 동생의 배신이 원인이었다고?

심지어 그 동생의 이름이 아일라? 정황상 질투…그러니까 편협한 찬탈의 신도가 된 것 같은데.

편협한 찬탈의 고위 신도 중에 아일라라는 이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추기경. 응시하는 아일라.

H&A에서는 이름만 언급될 뿐, 실제로 등장하는 보스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에이. 설마 동일 인물이겠어? 시기상 300년도 더 된 과거의 인간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겠는가.

이오나나 이리스처럼 장수종도 아닌데.

아무리 악신의 고위 사제가 된다 해도, 사도급이 아닌 이상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는 없다.

당장 선신 교단만 해도 교황이 약 100년 단위로 바뀌잖는가.

남들보다 장수하긴 해도 딱 그 정도라는 소리다.

다만…이름과 교단이 같다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

정말 다른 사람인 걸까? 만약 동일 인물이라면 이오나가 찾는다는 사람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을 이어가는 것도 잠시.

저벅 저벅.

문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벌써 이오나가 돌아온 건가? 아니, 벌써라기엔 꽤 시간이 지났지. 너무 집중해서 읽느라 몰랐을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들고있던 노트를 최대한 처음과 비슷한 각도로 원상복귀 시켜놓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을 곳은 없네. 뭔 놈의 연구실에 책상이랑 실험 도구 뿐이란 말인가.

다행히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책상. 쓸데없이 큰 만큼, 밑의 빈 공간도 넓은 것 같으니까.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를 신호 삼아 잽싸게 책상 밑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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