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51화 (151/230)

끼이익.

약간의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스윽 밀려나가는 문.

친절하게도 불까지 켜두고 간 터라 한눈에 연구실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실험 도구들. 큼직한 책상. 그 위에 쌓인 책더미.

마지막으로 벽 중앙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오나의 초상화까지.

…세상에.

뭔 자기 그림을 저리 큼직하게 걸어뒀담.

초상화 속에서‘이오나 등장!’ 이라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친절하게도 이오나는 불까지 켜두고 간 터라 연구실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실험 도구들. 큼직한 책상. 그 위에 쌓인 책더미.

마지막으로 벽 중앙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오나의 초상화까지.

…세상에.

뭔 자기 그림을 저리 큼직하게 걸어뒀담.

초상화 속에서‘이오나 등장!’ 이라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허어.”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아무튼 연구실 자체는 꽤나 잘 정리되어있었다.

다만 언제 이오나가 돌아올지 모르니 오래 머무를 수는 없겠지. 잽싸게 볼일만 보고 떠나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선 책상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실험 도구 같은 건 아무리 봐도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검붉은 액체에서 피비린내가 난다는 것 정도?

그게 아니더라도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두는 건 마법사의 본능 같은 거다. 뒤지면 뭔가 나오겠지.

“어디 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방금까지 읽으려던 것처럼 펼쳐진 책 한권과, 그 옆에 널브러진 노트 하나.

우선 책부터 스윽 내용을 읽어보았다.

‘천재 마법사는 무릎을 꿇지 않느니라…!

핑크 로터스가 다리를 M자로 벌리며 쪼그려 앉았다.

실로 자연스럽고도 당당한 자태였다.’

“엑.”

이거 저번에 도서관에서 빌린 그 자칭 천재 마법사를 주웠다잖아?

혹시나 싶어 대충이나마 읽어봤지만, 정말 평범한 야설일 뿐이다.

아니. 좀 꼴리니까 비범한 야설인가?

어쨌든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네.

뭐, 해독법을 알아야 보이는 암호 같은 게 숨겨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면 끝이 없겠지. 이번 주말에 외출하면 서점에서 한권 더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표지에 출판사 로고까지 찍힌 걸 봐서 개인이 만든 하나뿐인 책이 아니라,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책 같으니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의 페이지로 되돌린 뒤, 옆에 있는 노트에 손을 뻗었다.

부드럽고 튼튼한 고급 가죽의 감촉. 심지어 무슨 마법이라도 인챈트 되어있는 건지 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노트에 쓸만한 인챈트면 보존 마법이려나?

비교적 흔한 마법이지만, 영구 인챈트는 기본 가격 자체가 상당하다.

아마 이 노트 하나만으로도 주변에 쌓인 책더미 전부를 사고도 남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만한 물건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이오나가 소중히 하고 있다는 뜻.

학생이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와, 교수가 소중히 여기는 노트를 훔쳐본다?

이거 좋게 말해도 스토커고 나쁘게 말하면 스파이 아냐…?

순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에 망설이고 말았지만, 사실 너무 늦은 고민이었다.

연구실 안에 들어왔으면 낙장 불입이지 뭐.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콩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노트를 펼쳤다.

촤라락.

그리고 내용을 읽어 본 순간.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로드께서 이 노트를 선물해주셨다. 그리고 앞으로 짧게라도 매일 일기를 쓰라고 명하셨다.

장난스레 숙제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속뜻은 알기 쉬웠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보며 살라는 뜻이겠지.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쭉.

이 노트가 겉보기보다 두꺼운 이유는 분명 그래서일 거다.

-처음으로 피를 빨았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막상 입에 대고 나니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더라.

하지만 그래서일까. 조금 과했다.

다행히 로드께서 말려준 덕에 납치해온 여인은 죽지 않았지만.

그녀의 기억을 지우고 돌려보낸 뒤, 로드께서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하셨다.

뱀파이어는 피를 지배해야지, 피에 지배당하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그저 조금 전의 여인을 죽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화 몇 번 나눴을 뿐인, 권속으로 들일 필요까진 없던 내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분이 마음씨까지 아름다우신가 보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 기억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로드께서는 몸이 조금씩 뱀파이어스럽게 변하는 것이라며 내 볼을 쭉쭉 잡아당기셨다.

애 취급하지 말라고 투덜대니, 우리는 이제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이고 나는 로드의 아이나 다름없다고 대꾸하시더라.

평소에는 좀 바보 같을 정도로 장난스러운 분이 이럴 때만 진지한 표정을 짓다니.

조금 뭉클했다.

내게 가족이란 어떻게든 자식을 비싸게 팔아치우려던 돼지 같은 놈들 뿐이었으니까.

나야 운 좋게 로드께 거둬졌다지만, 내 동생은…아일라는 어떻게 됐을까.

걱정되어 잠이 오질 않는다.

-드디어 클랜이 있다는 폐성에 도착했다.

로드 프란체스카.

한낱 시골 처녀던 나조차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름.

그만큼 프란체스카 클랜도 무섭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모든 클랜원은 로드의 피가 흐르니 혈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며 신입인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처음 받아본 대우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다들 나처럼 사연이 있고, 로드께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더라.

어쩌면 로드 또한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을 권속으로 들인 걸 수도….

아무튼 언젠가 새로운 권속이 들어오면 나도 똑같이 잘해줘야겠다.

-처음으로 다른 클랜의 뱀파이어를 만났다.

듣자 하니 다른 클랜은 프란체스카 클랜과 달리 꽤 엄격하다는 모양이다.

로드를 정점으로 철저한 계급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느낌.

다만 가진 힘이 있으면 얼마든지 순위를 뒤집을 수 있다고 한다.

피의 주인인 로드는 예외지만.

로드는 자기 권속에게 강제 명령이라는 걸 내릴 수 있으니, 아무리 힘이 강해도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나?

물론 내겐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 중 누구도 로드께 반기를 들 생각은 없으니까.

“…….”

그 뒤로도 한동안 응애 뱀파이어 이오나의 이야기가 주르륵 이어졌다.

그나저나 이 노트. 펼쳐보니 알겠네. 공간 왜곡 마법으로 페이지 수를 엄청 늘린 노트다.

신들의 전쟁을 거치며 전체적인 마법의 수준이 오른 지금도 비싼 마도구인데.

전쟁 이전에 이만한 마도구를 선물해줄 정도라니….

로드라는 여인은 이오나에게서 무언가 느낀 걸까? 아니면 그냥 이오나의 말처럼 앞으로 쭉 힘내서 살아가라는 의미였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이오나가 인간이던 시절의 이야기는 적히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꽤나 우울한 과거였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 이오나에게 다른 클랜원들의 애정과 로드가 가끔 보여주는 시답잖은 장난은 큰 힘이 되어줬겠지.

실제로 막 뱀파이어가 된 이오나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감동받으며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H&A에선 나온 적 없는 이야기. 이젠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모를 이야기가 노트 속에 세밀히 기록되어있다.

이제야 복수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던 이오나가 이해되네.

애초에 프란체스카 클랜은 평범한 뱀파이어 클랜과는 느낌이 다른…좋은 의미로 가족같은 곳이었을 터.

그런 이들을 몰살당했으니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거겠지.

복잡한 심경으로 한숨을 푸욱 내쉰 뒤, 계속해서 노트를 읽어나갔다.

노트 속의 이오나는 마법을 배우고, 싸우는 법을 배우고, 피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점차 뱀파이어로서 완성되어갔다.

-오늘도 대련에서 승리했다. 이제 로드를 제외하면 클랜 내에 나보다 강한 이는 없는 것 같네.

다른 클랜원들이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그냥 내 재능이 뛰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겨우 10년 만에 전부 따라잡을 줄이야.

물론 아직 로드에 비하면 반딧불이 같은 희미한 능력이지만 말이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게 되자, 로드께서 자유롭게 바깥을 돌아다녀도 된다고 허락해주셨다.

그동안 수련한답시고 성에만 박혀있었더니 좀 답답하긴 했지. 오늘 짐 싸고 내일부터는 여기저기 여행하며 놀아야지.

-클랜이 있는 폐성은 로드의 힘으로 태양 빛을 가리는 결계가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햇빛을 피하고 밤에만 움직이는 건 꽤 까다롭더라.

…태양의 따사로움이 조금 그리워졌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은 10년이나 지났건만 변한 게 없었다.

날 그리도 괴롭히던 친부모는 뭐 하고 사나 가보니, 둘 다 죽은 지 오래라고 한다.

원래 나를 구매하기로 한 어떤 귀족이 화풀이로 전부 죽였다나?

꼴좋다.

다만 내 동생. 아일라가 행방불명된 사실을 들었을 땐 조금 우울해졌다.

역시 그 귀족이 데려간 걸까? 모르겠다. 아니었음 좋겠는데….

혹시나 해서 미심쩍은 귀족을 전부 조사해봤지만 아일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중간 중간에 시비를 거는 녀석들이 있길래 줘팼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뭐.

-어째서인지 나를 잡으러 온 녀석들이 있길래 또 줘팼다. 괜찮은거…맞나?

여기서부터는 한동안 이오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깽판 친 내용이 적혀있었다.

신들의 전쟁 이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이유는 이래서인가.

이오나 딴에는 합리적인 수준에서만 힘을 행사했다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그냥 미친 흡혈귀로만 보였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먼저 시비 걸렸다고 하나 대형 용병대 하나를 쥐잡듯이 팬다거나.

사람들 보는 앞에서 기사들에게 대가리 박아를 시킨다거나.

위의 둘이 문제가 되서 영주가 토벌령을 내리자 영주성을 반쯤 무너뜨리고 도망치는 등.

온갖 미친 짓을 다 했으니 빠르게 악명이 쌓일 수밖에.

심지어 당시의 이오나는 최대한 살인을 피했던 터라, 생존자들이 소문을 퍼뜨리며 악명이 널리 퍼지기까지 했다.

이오나가 소싯적에 이름 좀 날렸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느낌이었구나….

아무튼 그렇게 이오나의 악명이 지금은 멸망한 네르시아 왕국 전체에 퍼질 무렵.

-악신이 강림했다.

대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오나의 악명이 네르시아 왕국 전체에 퍼질 무렵.

-악신이 강림했다.

대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리 생각하자 괜히 소름이 돋으며 누가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큼직한 이오나의 초상화뿐이었다.

“착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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