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자면 지금껏 한 번도 자기 연구실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정도?
연구실까지 따라 들어가는 건 힘드니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지만.
점심시간.
아카데미의 식당은 기본적으로 무료다. 물론 더 비싸고 맛있는 걸 먹고 싶다면 추가 요금을 내고 주문할 수 있지만.
기본으로 제공해주는 식사의 퀄리티도 상당하다. 심지어 무한 리필까지 해주고.
그렇기에 정말 극소수를 제외하면 다들 식당을 애용하지만…아무래도 이오나는 소수파였던 것 같다.
점심을 거르거나 자기들끼리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각자의 청춘을 즐기는 학생들로 넘쳐나는 중앙 광장.
그 구석에서 이오나가 혈액팩을 쪽쪽 빨고 있었다.
하긴. 뱀파이어는 피를 먹으니까 뱀파이어인 거였지.
다만 직접적인 흡혈도, 사람 피를 안 먹은 지도 오래됐다고 했던가.
아마 적당한 가축의 피가 아닐까 싶다.
식사 중인 이오나의 표정이 야채 주스라도 먹는 것처럼 무척 떫어 보였으니까.
나도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미리 준비해온 척, 인벤토리에서 꺼낸 비상식을 카를라와 엘리샤와 함께 나눠 먹었다.
말이 비상식이지 이제 막 조리된 것처럼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음식들.
일반적인 아공간 주머니는 어디까지나 공간 확장이 걸렸을 뿐이라 시간의 흐름이 멀쩡하다.
하지만 인벤토리는 시간의 흐름마저 멈추기에, 한 달 전에 집어넣은 음식도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야외에서 기분 내며 식사하는 척 이오나를 계속 살펴보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떫은 표정으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는 이오나.
아무래도 지금 먹는 피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네.
물론 단순히 피를 흘리는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을 거다.
그랬으면 전투 때마다 피에 취해 미친 짓을 벌였어야 하는데…이오나가 그런 수준은 지났잖은가.
하지만 아예 내 피가 입안에 들어가면 어떨까.
…아니. 블러드 시프트 마법 때문에 아무리 다쳐도 흘릴 일이 없네.
그럼 미리 피를 좀 뽑아서 준비해가야겠다.
한창 싸우던 대련하는 도중에 얼굴에 촥 뿌린다면? 그렇게 한 방울이라도 입술에 닿는다면?
아무리 이오나라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으리라.
머릿속으로 자기 전에 피를 뽑아둘 것을 메모하며 식사를 마쳤다.
마지막 쉬는 시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이오나는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먹은 게 혈액 팩 하나라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뱀파이어는 볼일을 안 보는 걸까?
신기하네.
다만 이걸 대련 중에 써먹기는 힘들 것 같다.
방과 후.
드디어 때가 왔다.
기숙사로 가는 척 카를라와 엘리샤를 먼저 보내고는 투명 로브를 뒤집어썼다.
학생들이 없는 방과 후라면 조금 더 풀어진 모습을 보여줄 터.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조금 더 노출해주길 바라며 천천히 이오나의 뒤를 쫒았다.
방과 후.
마이 페이스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학생 앞에서는 철저히 교수로서 임하는 이오나다.
당연히 학생들의 시선이 없는 방과 후라면 조금 더 풀어진 모습을 보여줄 터.
자연스레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조금 더 노출해주길 바라며 투명 로브를 눌러 썼다.
…아니. 혹시 몰라 냄새 제거 포션과 사일런스 마법까지 썼다.
이제 인파 속에 숨거나, 다른 일 하는 척할 수도 없으니 조금 더 신경 써서 몸을 숨겨야 한다.
보스 몹이라도 상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이오나의 뒤를 쫒았다.
“흐흥~ 흐흐흥~”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건만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듯 걷는 이오나.
경쾌한 스텝으로 복도를 돌아다니던 이오나는 가끔 마주치는 다른 교수들과 눈인사나 짧은 담소를 나누었다.
다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코너를 건너는 순간 마주친 기사학부 1학년 A반의 담당 교수 제이슨.
일전에 실습 던전 때 잠깐 봤던 대머리 중년 교수는 이오나와 마주치자마자 잽싸게 줄행랑을 치더라.
예전에 이오나의 제자였다고 했던가? 본래 마법학부였으나, 자기 적성이 검에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전과한 보기 드문 케이스였지.
H&A에서는 그렇게 엄하고 진지했던 교수가 이오나 앞에서는 냅다 도망칠 줄이야.
대체 학생 때 얼마나 시달렸으면….
“햣하! 대머리 수확이다!”
“머, 멈추시오! 여기서 더 뜯어가면 진짜 대머리가 된단 말이오!”
지금도 시달리는 중이잖아?!
어지간한 유목민족 침략자보다 사악한 미소를 짓는 이오나의 뒤를 따라 헐레벌떡 뛰었다.
“괜찮아! 괜찮아! 탈모약 챙겨줄게! 그러니까 이번 실험에 쓸 머리카락 5개만 줘!”
“그렇게 받은 탈모약을 발라봤자 때가 되면 또 뽑아갈 것 아니오! 이제 나도 처자식이 있는 어른이오! 그러니 이런 무도한 짓에 더는 참지 않겠….”
“흐응 흐응. 이번에 엘라 마탑과 스틴 공방에서 손잡고 만든 신상 탈모약인데 정말 필요 없어?”
“…5개면 되오?”
신상 탈모약이라는 말에 순한 양 같은 조심스런 목소리를 냈다.
그런 제이슨을 향해 이오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고급스런 병 하나를 꺼내 흔들자.
“크흑….”
구국의 결단이라도 내린 듯한 기백을 뿜어대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뽑는 제이슨.
그는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대체 내 머리카락은 왜 이리 많이 가져가는 것이오? 탈모 치료 중에 이렇게 막 뽑아가면 말짱 꽝이 된다는 걸 잘 아시잖소.”
“글쎄. 글쎄. 어차피 그렇게 자라봤자 일주일쯤 지나면 다시 빠지잖아. 치료되는 거 맞긴 해?”
“큭…머리가 빠지기 전에 익스퍼트에 올랐다면….”
세상 우울한 제이슨의 목소리 덕에 상황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에우렐리아 대륙에는 탈모약이 있는 건 사실이다.
뭐…한번 바른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발라야 하는 약이지만 말이다.
탈모약의 가격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나 어쨌든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제이슨의 경우는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지만.
약값이야 아카데미 교수의 연봉으로도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겠지.
문제는 머리가 빠진 뒤에야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이다.
오러 익스퍼트에 오른 사람은 본격적으로 초인의 면모를 갖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막대한 생명력이다.
그, 왜. 있잖은가. 심장이 찔린 채로 몇 시간을 더 싸웠다느니, 배에 머리만 한 구멍이 뚫렸는데 살아남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일반인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의 육체를 각성시키며 생명력을 극대화한 익스퍼트 급 기사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익스퍼트에 오른 이후로 노화가 급격하게 느려지는 것도 그래서고.
다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바로 익스퍼트에 오른 순간을 몸이 정상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제이슨 같은 경우에는 탈모 상태를 몸이 정상으로 여긴다는 소리.
아무리 탈모약을 발라도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걸 상태 이상이라 여긴 몸이 멋대로 탈모약에 저항한단 소리다.
그래서 내가 전에 경매장에서 산 탈모약을 선물하며, 검술 좀 가르쳐 달라 했을때도 미묘한 표정으로 거절한 거구나.
어중간한 탈모약으로는 제이슨 본인의 저항력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차라리 익스퍼트에 오르기 전에 탈모를 치료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마 그때는 탈모약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거나,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익스퍼트에 경지에 오른 거겠지.
지금의 제이슨이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새로 나온 강력한 약을 쓰거나, 대 마법사에게 직접 시술을 받거나, 스스로 소드 마스터를 찍어 환골탈태를 이루는 수밖에 없다.
뒤의 둘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하기에 남는 방법이라고는 더 강력한 탈모약뿐.
이오나가 신상 약을 꺼낸 순간 이 추격전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불쌍해라….
남몰래 제이슨 교수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잠시.
감정을 추스린 제이슨의 질문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후…됐소. 그나저나 내 피 같은 머리카락은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이오? 추적 마법을 연구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어라? 어라? 내가 말 안 했었어? 단순한 추적 마법이 아니라, 신체의 잔해만 있어도 추적이 가능한 마법을 만드는 중이야!”
“신체의 잔해만 있어도 추적할 수 있다니…그게 가능한 일이오? 본체와의 연관성이 훼손되는 순간 별개의 조직이 될 텐데.”
“흥! 흥! 탈주 제자에게는 아무것도 안 알려줄 거야!”
“내게 마법보다 검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던 건 이오나 교수 당신이잖소?!”
어이없어하며 펄쩍 뛰는 제이슨.
이오나의 권유로 전과한 거였나…. 마법이건 검이건 아무튼 사교도만 잘 조지면 된다는 마인드였던 거겠지.
옛 제자에게 한참을 투덜대던 이오나였으나, 그래도 장난이었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성공했어. 그리고 제이슨 교수 말고 다른 교수들의 머리카락도 전부 실험 재료로 쓰고 있으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거 다행…아니, 다른 교수들과 나는 머리카락 개수부터 차이가 있잖소!”
생각해보니 열받았는지 울컥 화를 토해내는 제이슨이었으나,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찾고 있는 거요?”
“…….”
대답 없이 그저 빙그레 웃는 이오나. 이에 제이슨이 작게 혀를 찼다.
“쯧. 거 적당히 하라고 했잖소.”
물론 이오나는 가끔 보여주는 기묘한 포즈를 취하며 제이슨의 말을 일축했지만.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아!”
“…….”
머리카락을 뽑혀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어쩐지 제이슨이 이 짧은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아 보였다.
“후우…그렇지. 어련히 잘하시겠지. 아무튼 나는 이만 퇴근해보겠소. 요즘 딸이 아내랑 같이 저녁을 만들어주는데 늦게 가면 미안한지라.”
“응응. 가족은 소중한 거지. 잘 가!”
터덜터덜 가던 길을 가는 제이슨과, 팔을 붕붕 흔들며 인사하는 이오나.
그렇게 제이슨과 헤어진 이후로 이오나는 따로 마주친 사람 없이 곧장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실까지 따라 들어가면 들키겠지?
오늘은 결국 여기까지인가 싶어 아쉬운 마음으로 철수하려는 순간.
덜컥.
“아차차차….”
탄식과 한숨의 중간쯤 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연구실 밖으로 나온 이오나.
무언가 깜빡한 것이라도 있는지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뒤에 있던 내 쪽으로 다가오는 셈이라 호다닥 근처의 계단 밑에 숨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지는 이오나의 발소리.
…연구실 문. 안 잠갔었지?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니 저 멀리로 사라지는 이오나의 뒷모습만 보일 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도 기회인가?
마침 제이슨과의 대화에서 이오나가 뭔가 준비하는 게 있다는 소릴 듣고 궁금했던 참이다.
H&A에서의 이오나는 그저 비중 있는 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직접 컨트롤 할 수도 없고, 싸우는 모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는다.
물론 자주 나오는 만큼 대화 스크립트나 일러스트는 잘 준비되어있었지만.
거기에 여기저기서 이오나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는 문서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오나는 결국 공략 불가능한 NPC 중 하나였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직접 미행하는 것도 H&A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고.
헌데 마침 이오나의 연구실을 슬쩍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이건 못 참지.
H&A의 팬이라면 약점이랑 상관없이 한번 확인해볼 수밖에 없잖은가.
한번 더 주변을 살펴본 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