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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49화 (149/230)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옷매무새까지 다듬어 주고서야 내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야말로 나쁜 일을 꾸미는 귀족 같은 미소.

잠시 멍하니 로브와 엘리샤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안 들키면 그만이야.”

“예에. 안 들키면 그만이랍니다.”

“크흐흐흐흐!”

“오호호호홋!”

방안을 가득 울리는 비열한 웃음소리 사이로 카를라의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온다.

등교 시간이었다.

***

“오늘도 안녕 안녕! 다들 시험 준비는 잘하고 있어? 마법 전투 과목이야 대련만 하면 된다지만, 다른 과목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잖아!”

물론 제대로 준비하고 있다. 이론 수업은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통째로 외우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고.

나머지 부분도 4학년까지 갔던 카를라가 있으니, 대충 어떤 식으로 나올 거라는 족집게 과외를 받고 있다.

최고 반인 A반이라도 성적은 중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정 커트라인을 넘어서는 성적은 포인트. 그러니까 상점 벌점의 상점 비스무리한 것으로 전환되고.

이는 유저들 사이에선 업적 상점이라 부르던 우수 학생 특별 지원에서 여러 물건과 교환할 수 있기 때문.

보통은 영약이나 희귀 스크롤, 고위 마도구 같은 걸로 바꿔 가는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건 결국 골드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포인트가 많이 필요하지만 골드로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야말로 업적 상점의 존재 의의.

특히 그 정점에 있는 드래곤 하트 조각은 내 계획에 꼭 필요한 물건인데….

게임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활약을 벌인 덕에, 이대로라면 3학년…아니, 어쩌면 2학년때 필요한 포인트를 전부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속으로 이번 시험에서 얻을 포인트를 계산하면서도 시선은 이오나에게서 떼지 않았다.

저만한 흡혈 주머니를 달고 있으면서도 앞구르기나, 폴짝 뛰기, 손을 크게 흔드는 등. 여러 과장된 동작에도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아무리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해봤지만,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뿐.

신체의 무게 중심을 완벽히 제어하고 있다는 것.

무슨 마법사가 이렇게 몸을 잘 쓰는 거야…?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는 간다.

이오나는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혼자’ 사교도와 싸우고 다녔었다.

당연히 마법사의 고질적인 취약점인 신체 능력과 근접전에 관해서도 대비했겠지.

…어쩐지 대련 중에 근접전을 시도해도 맨날 역으로 당하더라.

이제 근접전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겠네.

내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몸을 잘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오나에 비벼볼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까.

벌써 하나 배웠네. 이걸 왜 이제까지 몰랐지?

머릿속으로 이오나의 공략법에서 근접전 항목을 아예 지워버리고 있던 것도 잠시.

돌연 시선을 돌린 이오나가 눈꼬리를 장난스레 휘며 물었다.

“뭐야 뭐야? 어디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데…얀델 학생. 어딘지 알겠어?”

“교수님을 향한 제 존경심이 보통 뜨거운 게 아니긴 해요.”

“엑….”

좀 깬다는 듯한 표정으로 끔뻑이는 이오나.

“저기 저기…혹시 아침을 잘못 먹었다거나 그런 거야?”

“아뇨. 어차피 아침부터 교수님이랑 대련하다 보면 전부 토할 테니 요즘은 아침 굶습니다.”

“아앗….”

이오나 본인도 요즘 수업이 좀 거칠었다는 걸 아는지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

“있잖아 있잖아. 조금 대련 강도를 낮춰볼까? 어제는 쓰러지기까지 했잖아. 콜헨 사제님한테 혼나기도 했고….”

저번에 봤던 깐깐한 중년 사제의 이름이 콜헨이었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난이도를 낮추는 건 오히려 이쪽에서 사절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이대로 가주세요. 전 괜찮습니다.”

핏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그리 말하자, 어째서인지 삐질 대며 시선을 피하는 이오나.

“이상하다…분명 심장이 뚫렸지 머리를 다친 건 아니었는데….”

실례되는 소릴.

난 지극히 정상이다.

아마도.

오늘도 어김없이 대련에서 털린 뒤. 수업 종료를 알린 이오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키는 나랑 한 뼘 차이인가. 여자치고는 큰 편이지만 어차피 나보다 작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팔다리는 키에 비해 긴 편이네. 사정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길게 책정해야겠다.

근접전으로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부턴 거리 조절이 중요할 테니까.

“저기 저기. 얀델 학생? 수업 끝났는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그야 존경하는 교수님의 배웅을 하려는 거죠.”

“오늘은 머리 안 때렸는데….”

한숨을 푹 내쉬는 이오나.

순간 부풀어 오른 흉부가 시선을 끌었다.

보면 볼수록 엄청나네. 이만한 걸 어떻게 숨기고 있었던 걸까.

신기한 마음에 이오나의 목 아래를 스윽 훑어보는 것도 잠시.

“???”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요즘 들어 여자 옷을 벗길 일이 확 많아져서 그런 걸까. 이제는 옷 위로 봐도 대략적인 견적을 그릴 수 있는 쓸데없는 능력이 생겼다.

국밥 특성인 뛰어난 기억력 덕분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자세히 살펴본 이오나의 몸은 여러모로 신기했다.

가슴이 크긴해도 페이보다는 작다. 엉덩이와 허벅지도 엘리샤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허리? 카를라의 허리가 훨씬 가늘고 낭창낭창한 곡선을 그린다.

하지만 이오나는 이 모든 것들의 밸런스가 좋았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서로 시너지를 일으킬 정도였다.

여성성의 극대화라는 게 이런 걸까.

뱀파이어의 몸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조형되었다는 설정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건 못 참겠는지 이오나가 제자리에 멈춰서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얀델 학생! 아까부터 엄한데만 보고 있지 않아? 아무리 이 이오나 교수님이 예쁘고, 매력적이라도 이건 아니지!”

솔직하게 가슴 봤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기에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교수님. 전 그냥 이오나 교수님의 몸놀림을 보고 감탄한 건데요.”

“으응…?”

“반쯤 점프하듯 과장되게 걸어 다니시지만, 무게 균형이 중앙 살짝 아래쪽에서 고정된 채 흔들리질 않아요. 아마 교수님에게는 어떤 자세건 비슷한 느낌이시겠죠.”

“그…렇긴 하지?”

“저도 마법사면서 이래저래 몸을 써서 싸우는 걸 좋아하는지라 교수님의 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헤헤…그렇게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정말이야!”

기뻐하는 것도 잠시. 이오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근데. 어떤 상황에서건 몸을 완벽히 제어하고,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건 얀델 학생도 마찬가지 아니야?”

“어, 음….”

시스템 보정 덕분이긴 하지만 나도 이오나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긴 하다.

“그게 타고난 건지, 수련으로 터득한 건지는 묻지 않을게!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

“굳이 날 쫒아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혹시 혹시. 뭔가 할 말이 있는 거라면 그냥 지금 말해! 학생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도 교수의 일이니까!”

어떻게든 한 대 때려주고 싶어서요. …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건 알면 방비하기 마련이니까. 적어도 성공하기 전까지는 알려선 안 된다.

하지만 너무 당황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실…저번에 도서관에서 교수님을 만난 이후로 줄곧 신경 쓰였어요.”

“자, 잠깐 잠깐! 얀델 학생!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그러게.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냈지.

이제 와서 대충 둘러대며 주워 담기는…힘들겠지. 응.

기왕 이렇게 된 거 기세를 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왜 되려 큰 소리를 내는 건데?!”

당황한 이오나가 내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외쳤다.

“역시 교수님도 분홍 머리를 좋아하시는 거죠?”

“멈춰 멈춰! 얀델 학생은 학생이고! 이오나 교수님은 교수…응? 방금 뭐라고?”

어정쩡하게 내 입술을 만지작대던 이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기억이 틀렸을 리는 없다. 분명 이오나 교수와 동시에 잡았던 책은 분홍 머리 여자가 그려진 소설이었으니까.

“교수님도 분홍 머리 좋아하시냐고 물었어요.”

“…….”

멍한 표정을 짓는 이오나에게 이래서 분홍 머리가 좋다! 라는 주제로 한참을 떠들었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쭈욱.

테엥- 테에에엥-

그 종소리에 정신이 든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이오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응응! 맞아! 나도 분홍 머리 좋아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빨리 다음 수업 들으러 가야지! 나도 다음 수업 들어가야 하거든!”

“앗…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럴듯하게 넘겼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꾸벅인 뒤, 빠른 걸음으로 교실로 돌아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힘이 쪽 빠졌지만.

“주인님이 분홍 머리를 그렇게 좋아하실 줄이야…염색 마법이랑 염색약 중에 어느 게 더 좋을지….”

“카를라. 너무 극단적이에요. 우선 가발 같은 거라도 써서 간을 보는 게….”

“…아니, 그냥 막 던진 말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물론, 눈앞에 분홍 머리가 있으면 신기해하긴 하겠지만.

머리색이 컬러풀한 에우렐리아 대륙에서도 분홍 머리는 희귀하거든.

아무튼 혹시 이오나라면 대놓고 따라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앞으로는 좀 더 멀리서 조심스레 관찰해야겠네.

***

두 번째 쉬는 시간.

다음 수업은 없는지 이오나는 혼자 멍하니 햇볓을 쬐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던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뿐.

본래 뱀파이어에게 햇빛은 치명적인 극독이나 다름없을 테지만…아쉽게도 빛이 이오나의 약점이 되진 않겠지.

인류의 편을 들며 연합에 가세한 뱀파이어에게는 정의로운 광명이 직접 가호를 내렸으니까.

덕분에 햇빛 아래서도 누구나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태양 빛으로 몸이 붕괴하는 속도보다 재생력이 더 빨라야 얻을 수 있다는 데이 워커의 칭호를 개나 소나 가지게 된 셈.

물론 악신 편에 선 뱀파이어들은 얄짤 없이 빛 속성 공격에 녹아내리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빛이 이오나의 약점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차라리 번개 속성 마법을 쓰는 게 낫겠다는 정보를 머릿속에 메모해뒀다.

세 번째 쉬는 시간.

아쉽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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