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전에 원소 조합을 배우면서 원소 그 자체의 성질을 질릴 정도로 접했잖아? 그러다 보니 대충 느낌이 오더라고.”
“보통은 느낌이 와도 따라 하지는 못한답니다. 이건…그러네요. 굳이 말하자면 인공적인 적성이잖아요.”
“근데 하니까 되더라고.”
“…….”
엘리샤가 무척이나 재수 없는 것을 본 듯한 표정을 짓길래,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자기도 천재 과인 건 마찬가지면서 왜 저런담.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마나의 유동에서 느껴지는 성질을 통해, 어디서 어떤 계열의 마법이 시전됐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뜨거운 마나가 느껴지니 불 마법이다, 단단한 마나가 느껴지니 대지 마법이다 같은 느낌인데.
애초에 마나에 온도가 어딨고 경도가 어디 있겠는가.
마나는 마법이 됐건 뭐가 됐건, 현상으로 화하기 전에는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에너지인 것을.
그거 다 해당 속성이 가지는 공통적인 파장 같은 거다.
내가 방금 따라한 것도 그런 파장을 흉내 낸 것이고.
물론 이는 마법 그 자체와 공명하여 증폭시키는 린델하이트의 비전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마이너 버전이다.
한 번에 한 계열밖에 강화할 수 없으며, 그나마도 내가 파장을 확실히 기억한 원소 마법에만 가능한 일.
여러모로 제약이 많은 깨달음이지만.
“그래도 가닥은 확실히 잡으셨네요 당신.”
그렇다. 엘리샤의 말대로 가닥은 확실히 잡았으니 이대로 발전시킨다면 공명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멍하니 손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던 카를라의 입꼬리가 마구 씰룩이기 시작했다.
“헿. 헤헿. 흐헤헿.”
“카를라?”
“역시 주인님! 전 주인님을 믿고 있었어요!”
“…내가 두 번 다신 동조 안 한다고 하니까 입술 삐죽 내밀지 않았어?”
“이러려고 내민 건데용?”
쪽.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헤실대는 카를라.
그런 카를라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꺄아아!”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비명.
다음은 엘리샤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뺘아악!”
그냥 묘한 비명.
“뭐, 뭔가요! 저는 갑자기 왜 꼬집었나요 당신?!”
억울해 보이는 엘리샤의 목소리에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냥?”
“…이익!”
분하다는 듯, 길쭉한 귀를 파르르 떠는 엘리샤.
하지만 조금 전의 카를라가 내게 그러했듯, 슬쩍 입을 맞추자 바로 얌전해졌다.
얌전히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그런 둘의 사이에 있는 나.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지만 카를라와의 수련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이제 괜찮지 않을까?
순식간에 야릇해지는 분위기.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엘리샤가 은근슬쩍 가슴을 들이대며 말했다.
“저기. 당신?”
“응?”
“끝까지 가진 않았고, 수련을 위한 거라지만 아무튼 카를라랑 했으니 다음은….”
은근슬쩍 내 위에 올라타려는 엘리샤.
물에 젖은 파란색 롤빵 머리가 내 상체를 간질인다.
무척 합당한 주장이었기에 나 또한 엘리샤의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빠빠빠 빠빠 빠빠빠빠-
침실 쪽에서 들려오는 자명종 소리.
“…….”
“…….”
맞다. 지금 시간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
울상을 지은 엘리샤의 귀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입으로만 잽싸게 해줄래?”
“…….”
“대신 오늘 밤은 엘리샤 너 먼저 하게 해줄게. 똑같이 욕실에서 물 받아놓고 말이야.”
“…알겠어요.”
스르륵 물속으로 잠수하는 엘리샤.
수중 호흡은 무적이고.
수중 펠라는 신이었다.
수중 호흡은 무적이고.
수중 펠라는 신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본방까지는 못하고 옷을 입어야 했지만.
그렇게 아직 덜 마른 머리로 쓸데없이 넓은 아카데미 부지를 가로질렀다.
최근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시험 기간이 되어서인지 조금 차분해진 분위기.
하긴. 사교도 색출도 진작에 다 끝났으니 무섭다고 자퇴할 거 아니면 학교생활이나 열심히 해야겠지.
아카데미의 시험은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아닌, 한 학기에 한 번 있는 학기 평가가 전부다.
하지만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게 학기 평가의 성적을 보고 다음 학년의 반 배정이 이루어지며.
정말 높은 성적을 받으면 2학기부터 반을 옮겨주기도 한다.
하위반이라고 불이익을 보는 건 아니지만, 상위반에 배정되면 생활의 질이 달라질 정도로 많은 걸 누릴 수 있게 되는데.
예를 들자면 A반 기숙사의 개인 수련실이나, 던전 실습을 한 번 더 갈 수 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거기에 졸업 이후의 취직처도 어느 반으로 졸업했느냐를 가장 크게 보기도 하고.
평민이나 사생아 출신 같은 개인의 출세를 바라는 이라면 시험 하나하나에 절박해질 수밖에.
책에 머리를 처박고 걸어 다니는 학생들이나, 방과 후에 대련 약속을 잡는 학생들을 구경하며 걷는 것도 잠시.
과정이야 어찌 됐든 내가 공명의 가닥을 잡은 게 기분 좋았는지 연신 헤실거리던 카를라가 내 새끼손가락을 살살 잡아당겼다.
“주인님 주인님. 바로 교실에 가기 전에 헬레나 사제님을 만나고 가신다 하셨었죠?”
“응. 잠깐 목욕하고 한두시간이나마 눈 붙이려고 했는데…어쩌다보니 그마저도 못했잖아? 피로 회복 좀 부탁할 겸, 던전 하나 더 클리어했다고 자랑해야지.”
“자랑이요?”
“우리가 지금은 화력으로 밀어버리고 있다지만, 더 강한 적을 만나게 되면 파티의 밸런스가 중요해지잖아? 그런 의미에서 헬레나 사제님은 딱 좋은 포지션이거든.”
딜탱이 힐러까지 겸한다? 이게 진짜 꿀조합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헬레나에게 광전사 패널티가 있는 거겠지만.
속으로 이런저런 조합을 떠올리는 사이.
어째서인지 카를라와 엘리샤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설마 헬레나 사제님도 몰락할 예정인 건가요…?”
“어쩌면 정의로운 광명 전체가 무너지는 걸지도 몰라요 카를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몰락한 사람만 동료로 삼는 것 같잖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떨떠름한 목소리.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보다 격한 놀람이었다.
“네? 아니었나요? 페이 양도 가정 사정을 들어보니 거의 주인님께 종속된 거나 다름없던데요?”
“제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나 거절했으면서, 제가 노예가 되자 한걸음에 달려와 샀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분명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
업보인가.
아니. 이건 다 들끓는 고요 때문이다.
고요 교단의 신도들이 싹수 좀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해서 그런 거다.
아무튼 사교도 탓인듯!
“뭐, 가만 놔두면 광명 교단이 몰락하는 건 사실이지만.”
“거봐요!”
“역시 그랬군요!”
분명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건만, 놀라기는커녕 우쭐한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둘.
대체 날 뭘로 보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를라와 엘리샤의 표정이 굳었다.
“어…라? 정의로운 광명 교단이 무너지면 선신 교단의 무력이 거의 반토막 나는 거 아니에요?”
“성직자의 특성상 신성력만 증명할 수 있으면 어지간한 혐의는 벗길 수 있죠. 그럼에도 몰락한다면…교단 전체의 타락? 혹은 모시는 신의 부재…어느 쪽이건 쉬이 넘길 수 없는 문제군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둘.
그런 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걱정 마. 내가 괜히 이 이야기를 꺼냈겠어? 방법은 있으니까 걱정 마.”
이제 꽁꽁 숨기기만 할 필요는 없으니 대략적인 계획을 털어놓았다.
뭐어…애초에 계획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우선 정의로운 광명 교단과 우호도를 쌓아 외부인은 참여할 수 없는 비밀 임무에 함께한다.
전부는 아니고, 사교도들이 함정을 쳐둔 몇몇 임무만.
임무에 나서는 척하면서 안 나가건, 함정을 역으로 털어먹건 아무튼 최대한 전력을 온존해 돌아가면.
곧장 정의로운 광명 교단 총본산으로 향해 뒤통수를 치고 있을 사교도 연합의 뒤통수를 친다.
어떤가 참 간단하지 않은가.
“…내용이 간단하지 않은데요?”
“사교도 연합이요? 그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은 놈들이 연합한다고 했나요 당신?”
“지금도 느슨하게나마 연합 중이야. 겉으로는 교리가 너무 달라서 섞이지 못하는 척하고 있지만.”
어깨를 으쓱이자 이제는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된 카를라와 엘리샤.
그 모습에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 참고로 아예 함정 임무에 나서지도 않으면, 거기에 배치해뒀던 인원들까지 포함해서 정면 승부를 걸어올 거야. 사교도 놈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계획이거든. 변수 몇 개로 포기하진 않을 거야.”
적어도 H&A 플레이 중엔 알아낼 수 없었다.
나는 물론이고 진짜 썩은물 소리 듣는 유저들까지. 그 누구도 정의로운 광명 교단 습격 이벤트 자체를 피하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말하자 살짝 창백해졌던 둘의 표정에 묘한 결기 같은 것이 떠올랐다.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둘의 모습에 주변의 힐끔거림이 느껴졌지만….
이미 한바탕 난리를 쳐서인지 그냥 못 본 척 하며 제 갈 길을 가는 다른 학생들.
덕분에 조금 편하게 신성학부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예? 피곤해서 저한테 찾아오셨다고요 형제님?”
“네. 근데 그냥 피곤한 게 아니라 어제 던전 하나를 당일치기로 클리어해서 생긴 피로예요.”
어이없어하는 헬레나에게 조금 남은 바다의 축복이 담긴 병과, 접싯물에 코 박아도 안 죽고 잘만 숨 쉬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제야 믿더라.
“흠흠. 이건 피곤할만 하셨네요! 이리 오세요! 겸사겸사 축복까지 걸어드리겠습니다 형제님!”
슬쩍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어루만진 헬레나가 무어라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내 몸을 감싸며 무겁던 몸과 흐릿한 정신이 빠르게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아니, 축복까지 해주겠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몸이 평소보다 가벼워지기까지 했다.
“아, 여기 둘도 같이 던전을 돌았는데….”
“으음…그렇다면 마땅히 해드려야지요.”
내게는 친절해도 사교도와 정령 소환에 엮여있는 카를라와 엘리샤를 무시로 일관하던 헬레나였으나.
둘도 던전 공략에 이바지했다는 말을 듣자 냉큼 회복과 축복을 위한 기도문을 읊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