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던전 공략을 재개했다.
예상했던 대로 던전 공략 자체는 굉장히 순조로웠다.
그저 기억에 있는 대로 함정을 해제하고, 몬스터와의 전투를 준비하며, 길을 헤매지도 않고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중간중간에 카를라랑 엘리샤가 로브를 써보거나, 이리스 앞에서 원소 조합 마법을 선보이며 평가받는 등.
실전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이나 갈림길을 지나 룸을 공략하며 나아가기를 몇 시간.
던전 코어가 있는 방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지금껏 전투 중을 제외하면 한 번도 멈춘 적 없어서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카를라.
“왜 그러세요 주인님? 혹시 통로에 함정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없어. 여기서 제일 왼쪽 길로 가면 금방 코어가 나올 거야.”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대체로 던전을 유지하는 중심축을 부수는 것이다.
그 핵이 몬스터에게 깃들었다면 보스라 불리는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것이고, 물건에 깃들었다면 코어라 불리는 사물을 부숴야 하는 식.
워낙 던전에 따라 케바케가 심해 어느 쪽이 더 낫다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미궁형 던전의 경우에는 보스보다 코어를 부수는 쪽이 훨씬 편하다.
코어가 있는 던전은 보스라고 할만한 강적이 없는 대신, 코어를 지키기 위해 주변에 몬스터들이 잔뜩 모여있다.
덕분에 코어만 슥삭하기 힘든 건데….
미궁형 던전은 코어 근처에 몬스터가 없거나, 다른 유형의 던전보다 훨씬 적게 배치된다.
공간이 왜곡되며 형성된다는 특징 덕에 몬스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지기 때문.
이 던전의 경우에는 마지막 갈림길이 무려 다섯개로 나뉘었고, 나머지 4개에는 피셔맨으로 가득한 방이 나오지만.
정작 정답인 코어 룸에는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
그래서 멈춰 선 거다.
“이제 페이 선배가 실력 좀 발휘해서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챙긴 뒤, 코어를 부숴서 클리어하면 끝인데…좀 아쉽지 않아?”
“넹? 주인님 설마…몬스터를 더 죽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신 건가요?!”
“아니, 내가 그렇게 전투에 미친 놈으로 보였어?”
“아뇨. 하지만 사교도와 몬스터에 미친…흠흠. 병적으로 싫어하시는 건 맞잖아요.”
“그렇긴 한데…내가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는 너희도 코어 룸에 가면 알게 될걸?”
처음 보는 사람에겐 꽤 끔찍한 장면이거든.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딱 좋은 실전 찬스를 이렇게 낭비하기 아깝다는 소리였어.”
피셔맨은 지금의 내게 딱 맞는 교보재 같은 존재다.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여럿이 뭉치면 그리 약하지만도 않으니, 로브의 투명화를 쓰지만 않으면 딱 좋은 수련이 될 테니까.
“수련이라…수련 말씀이시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카를라가 슬쩍 내게 달라붙었다.
“분명 실전은 가장 좋은 수련이죠. 특히 주인님은 이론보다 직감에 의존하는 마법사시니 더더욱 그럴 거구요.”
“그럼….”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검지를 까딱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카를라.
“실전은 할 수 있는 일을 몸에 익힐 때 좋은 거예요. 주인님은 이미 가지고 계신 걸 잘 활용하고 계시잖아요? 굳이 부족한 점을 말하자면 원소 조합의 활용법 정도려나요?”
“음음. 위력을 증폭시키거나, 쓰기 편하게 운용하는 것만 해도 제 몫은 하는 셈이네만…원소 조합의 본질은 결국 있을 수 없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 조금 더 숙달된다면 주인은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될 걸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에게 되물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느낌인데?”
“주인은 이번 공략 내내 전격 계열 마법 위주로 싸워왔었네. 원소 조합조차 바람과 전기를 섞거나, 불과 전기를 섞어 한 번에 넓은 범위를 덮치는 식이 아니었나.”
“그렇지? 체인 라이트닝 같은 광범위 전격 마법은 중급 마법부터 있잖아. 내가 쓸 수 있는 건 전부 단일기니 불과 바람 속성의 범위를 가져와서 쓴 거고. 이건 너도 칭찬했잖아.”
“물론 그건 잘했네. 허나 너무 단조롭지 않은가. 만약 한 피셔맨이 주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다른 피셔맨들에게 알렸다면? 그렇게 주인의 마법에 대비하고 있을 때의 대처 방법은 있는 겐가?”
“마력을 더 쏟아부어서 대비고 나발이고 통째로 짓누른다거나?”
“…무척이나 린델하이트스러운 방식이네만, 주인이라면 실현 가능할 것 같으니 뭐라 하기 좀 그렇군.”
잠시 어이없어하는 이리스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원소 조합은 실반 마탑의 비전이었으니 감히 첨언하자면, 물과 섞는다는 방법도 있네. 수계 마법 특유의 조작성만 가져와 번개를 직접 조작하여 적들 사이를 누비는 걸세.”
“허어….”
그러네. 워터볼 같은 건 숙련된 마법사라면 허공에서 궤적을 틀 수 있는 마법이다.
그걸 썬더 볼트에 적용하면 위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적진을 무너뜨리는 게 가능하겠지.
대충 체인 라이트닝의 하위 호환 같은 느낌이려나.
범위는 넓어졌지만 한 번만 막으면 되는 공격과, 강력한 단일기가 쓰리 쿠션을 튕기는 공격은 다른 법.
아마 상대가 무엇을 준비했건 어느 정도의 효과는 볼 수 있으리라.
“흠흠. 어쩌다 보니 말이 샜네만, 아무튼 이런 건 본래 홀로 수련하며 고민 끝에 깨닫는 걸세. 실전에서 무언가 배우려면 조금 전에 가정했던 상황처럼 위기 상황에 몰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다 익히는 수밖에 없고.”
“무슨 말을 하려는진 알겠어. 성장하거나 죽거나의 상황이 아니면 실전에서 성장할 일은 없으니, 실전이 아니라 수련으로 성장하라는 소리지?”
“바로 그걸세. 위기 상황에서의 각성이란 것은 그리 쉬이 오지 않는 것이니.”
“이리스 님이 잘 말해주셨네요. 제가 하려던 말도 그거였어요. 만약 주인님이 새로 익힌 마법을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실전을 추구하는 거라면 괜찮아요. 하지만 더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요?”
“좋은 방법이라…잠깐. 나 왠지 카를라 네가 무슨 소리 할지 알 것 같은데?”
“후후. 그래도 저는 말할 거예요!”
내 양손을 붙잡은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페이 양이 자기 할 일을 하는 사이. 저희는 공명이나 마저 수련해요 주인님!”
“역시 공명 이야기였어!”
나 그거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역시 공명 이야기였어!”
나 그거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물론 주인님이라면 문제없이 익히실 수 있겠지만…아직 주인님은 마법을 배우신 지 반년도 안 됐잖아요? 아마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는 걸 거예요.”
“글쎄….”
몇 년 뒤에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카를라가 안심하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번엔 주인님에게 조금 도움이 될만한 방법을 준비해왔으니까요! 기숙사로 돌아가면 바로 시험해 보죠!”
“…….”
전신으로 기대감을 내뿜는 카를라. 차마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던 터라 뻘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한번 해볼게.”
***
왼쪽 길로 쭉 나아간 끝에 드디어 도착한 코어 룸.
지금까지 방이라 부르던 곳은 사실 배수로가 좀 확장되었을 뿐이라 문조차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여긴 예외다.
코어 룸은 본래 아틀란티스의 하수 처리 시설을 제어하던 일종의 스태프 룸이니까.
여긴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방이다.
거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공간 왜곡이 일어난 터라, 코어 룸은 300년 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 300년 전. 한창 신들의 전쟁이 벌어지던 도중의 광경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소리다.
네모반듯한 방의 벽면은 죄다 피 칠갑이 되어있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치들 위로 인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만 하나같이 멀쩡한 구석이 없는 시체들이었다.
눈알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돌멩이를 끼워 넣은 시체, 발가벗기고 한쪽 가슴을 잘라 입에 물려놓은 시체, 얼굴 가죽이 뜯겨나간 시체 등등.
갑자기 펼쳐진 끔찍한 풍경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우웁!”
“달갑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의식…인가?”
“아니에요 페이 선배. 의식이 아니라 놀이에요. 피셔맨은 편협한 찬탈 계열의 몬스터. 그 특징은 잘 아시죠?”
“…불화. 그리고 패배자를 향한 잔인함.”
편협한 찬탈이 가진 속성은 질투.
녀석을 따르는 사교도와 몬스터는 누군가 자기보다 잘난 걸 용납하지 못한다.
당장은 고개를 숙여도, 언젠가 상대를 끌어내릴 생각으로 가득한 그런 느낌.
예외가 있다면 놈들의 주인인 편협한 찬탈 본인과, 편협한 찬탈이 직접 임명한 고위 간부 정도?
그 외에는 설령 다른 악신이라 하더라도 결코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
하여 편협한 찬탈의 신도들은 어딜 가나 불화를 일으키고, 자신에게 패배한 상대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군다.
“피셔맨의 생김새를 봤지? 부위의 차이는 있지만 인어처럼 반인 반어잖아. 그런데 피셔맨은 몬스터 취급이고 인어는 아인종 취급을 받았어.”
“그건 피셔맨이 몬스터 같은 행동해서 그런 것이네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리스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맞아. 피셔맨에도 지능이 있고 나름의 문명이 있지만…너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야.”
적당한 수준이었다면 물속의 야만인 정도로 여겼겠지. 에우렐리아 대륙에는 정말 다양한 종족이 있으니까.
하지만 피셔맨은 너무 과했다. 편협한 찬탈을 모시기 전부터 바다의 골칫거리였으니까.
먼저 무기를 뽑지 않고 대화를 요청하면 응하던 바바리안과 달리, 그 어떤 시도에도 상대를 죽이고 노예로 삼을 생각으로 가득 찬 놈들.
심지어 협상에 성공한 줄 알고 안심한 이들의 뒤통수를 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녀석들이 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몬스터로 분류되는 것도 그래서다.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거든.
“그런데 정작 피셔맨은 자기들과 인어가 외모 말고는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
“…기술력이나 성품, 무력.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다르잖나.”
“그런 자잘한 건 보려 하지 않기에 편협하다는 거지.”
“허어.”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덮어 놓고 상대를 질투할 것.
그게 편협한 찬탈이 신도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아무튼 피셔맨은 오랜 시간 인어를 질투해왔고, 그 탓에 바다의 지배자 자리를 찬탈하며 이루어진 학살극은 상당히 잔인했다.
멸종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인어.
하지만 지금 이곳의 시체들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예뻐 보이는 부분은 죄다 난도질해놨으니까.
“내가 이래서 악신도 그 밑의 것들도 싫어하는 거야.”
사교도가 봉기한 이후의 내용. 그러니까 H&A의 후반부를 플레이하다 보면 이보다 더한 장면을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게임이라는 걸 알아도 불쾌함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현실이 된 지금은 어떻겠는가.
나도 모르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문득 중앙의 한 시체에 시선이 향했다.
유일하게 얼굴이 멀쩡한 시체.
하지만 그 대신이라는 듯 목 아래부터 지느러미 끝까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다.
책상 위에 눕혀져 있는 탓에 무슨 인신 공양의 제물처럼도 보이네.
실제로 제물이 맞긴 하지만.
“저 인어의 시체가 이 던전의 코어야.”
침략 루트가 된 배수로의 마지막 관리자. 아틀란티스 왕국의 제3 공주. 그리고 악신 편협한 찬탈의 위업을 찬양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
이만하면 던전의 코어로 삼기 딱 좋은 대상이 아닌가.
“…코어는 사물 아니었나요 주인님?”
“시체는 생물이 아냐.”
“…….”
지금은 좀 떨어져 있어서 그렇지 가까이 다가가면 코어 특유의 오색 찬란한 빛을 뿜을 거다.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여인들과, 그저 씁쓸하게 웃는 이리스.
분명 조금 전까지 던전 클리어가 머지않았다며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네.
조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짝짝.
“자자. 어차피 다 지나간 300년 전의 일이야. 우리는 챙길 거나 마저 챙기자고.”
“앗, 응. 후배님은 내 연금술이 필요하다고 했지? 여기서 뭘 하면 돼?”
“간단해요. 여긴 아틀란티스의 모든 배수로를 통제하던 곳이거든요. 그만큼 중요한 시설이기에 관리자는 대대로 왕족 중 한명이 맡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