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네만, 그렇다는 건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라는 소리겠지.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건만 아무런 준비 없이 진입하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네.”
“으응…나도 다른 분들 말이 맞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난 전투 연금술사가 아니야. 후배님 잊은 건 아니지?”
일제히 반대하는 넷.
전부 타당한 내용이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괜찮아. 미궁형 던전이라 길만 알면 금방이거든. 싸울 일도 얼마 없어.”
“그럼 더 위험하잖아요 주인님. 잘못 들어가면 미궁에서 며칠이나 갇혀있을…어? 잠깐? 혹시…?”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던 카를라가 입을 헤 벌렸다.
슬쩍 손가락을 집어넣자 반사적으로 혀를 휘감아온다.
축축하면서도 말랑말랑한 감각.
카를라의 혓바닥을 만지작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이미 알고 있어. 중간 중간에 몬스터를 좀 만나긴 할 텐데,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피셔맨 계열. 그중에서도 하급 위주로 나오거든.”
피셔맨. 이족 보행하는 물고기 같은 녀석으로 수중 몬스터 중에서는 가장 흔한 종족이다.
어린애 수준이지만 나름 지능도 있어 각종 도구와 함정을 다루고, 집단생활까지 하는 터라 은근 까다로운 놈들.
다만 신체 능력 자체는 떨어지는 편이라 방심하지만 않으면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몬스터다.
뭐랄까. 물속에 사는 고블린이라고 하면 되려나?
전체적으로 만만한 종족이나, 개체수가 워낙 많다 보니 가끔 이상할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 튀어나오긴 하는데.
적어도 이번 던전에 그런 네임드는 등장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니 변수가 생길 걱정도 없고.
내 이야기를 마저 들은 여인들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피셔맨 위주라면…확실히 괜찮겠네요.”
“예에. 스승님이 만드신 아티팩트를 시험해 보기에도 딱이고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더 일찍 말해주게. 깜짝 놀랐잖은가.”
“맞아 맞아. 순간 후배님이 미친 줄 알았잖아!”
이런 데서 인식의 차이를 느낄 줄이야.
내게 있어 던전이란 목숨을 거는 곳이 아니다. 당연히 공략하는 곳이지.
물론 변수에는 조심해야 한다. 이미 실습 던전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맞기도 했잖은가.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교도 간부를 조심하는 것일 뿐, 던전을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H&A에 나온 모든 던전의 구조와 몬스터 그리고 공략법까지 줄줄이 외우고 있기 때문.
이길 걸 뻔히 아는데 무서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 지금이라도 어떻게 공략할 건지 자세히 알려줄게.”
던전의 위치와 간략한 구조, 함정의 종류, 몬스터가 있는 방과 없는 방,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뚫고 던전의 중심부로 향하는 방법까지.
모든 것을 알려준 뒤에야 저택을 나섰다.
***
라힘 시는 아카데미에 사람들이 몰리며 자연스레 생긴 도시다.
즉 아카데미 자체는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라힘 시는 그렇지 않다는 소리.
마구잡이로 확장하다 보니 버려지거나 잊혀진 구역이 몇 있었고, 지금부터 우리가 가려는 곳도 그중 하나다.
한때는 라힘 시의 모든 오수가 오가던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마법으로 정수 처리하며 쓰이지 않게 된 배수로.
그 오래된 입구를 따라 걸어간 끝에 나오는 작고 더러운 연못이 오늘의 목적지다.
“여기 바닥에 던전 입구가 있을 거야.”
“으윽…말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냄새나네요. 당신. 정말로 이 안에 던전이 있는 거 맞죠?”
“일단 내가 알기로는 그래.”
“너무 질색하지 말거라 제자야. 미발견 던전이라는 게 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긴 하지만…심리적인 거부감만큼은 어쩔 수 없네요.”
투덜대는 엘리샤. 하지만 이리스의 말대로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으면 진작에 공략됐거나, 엄중한 경비하에 관리되고 있겠지.
게프 경매장의 지하도 그렇고, 실습 던전이 있던 깊은 숲속도 그렇고.
통상적으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이기에 미발견 던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코를 틀어막은 엘리샤가 안쓰러웠는지 페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회색 물약이 담긴 병 하나를 꺼냈다.
“엘리샤 양. 이거라도 써볼래? 코 밑에 바르면 일시적으로 후각을 마비시키는 약이야.”
“어머? 감사히 받을게요 페이 양.”
활짝 웃으며 포션 병을 열려던 엘리샤를 붙잡았다.
“잠깐만. 페이 선배. 혹시 이거 강한 민트 냄새로 코를 마비시키는 타입인가요?”
“어? 응. 이게 제일 무난하잖아. 만들기도 쉽고.”
“그럼 안 돼요. 페이 선배도 아시잖아요? 피셔맨 계열 몬스터의 특징.”
“그야 기초 정도는 제작학부도 배우니…앗!”
화들짝 놀라 포션 병을 집어넣는 페이.
그도 그럴 게 피셔맨 계열 몬스터의 특징. 그중 하나가 바로 시각과 후각이 예민하다는 점이니까.
물속에서도 보고 맡으려다 보니, 그렇게 진화한 것이겠지.
사람의 코가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향기라면, 피셔맨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를 맡고 찾아올 것이다.
H&A에서도 그랬고, 아카데미에서도 그렇다고 배웠다.
찾아오는 것 자체야 이리스도 있으니 위험하진 않겠지만…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적까지 불러 모을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오늘은 이리스가 만든 로브의 투명화 성능을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는데, 냄새가 그리 심하게 나면 제대로 테스트하지도 못하겠지.
페이야 제작학부라 실전에 나설 일이 없으니 거기까진 생각 못한 걸 테고.
“냄새가 지독하긴 한데 던전 내부는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으니 그냥 참는 게 나을 거예요.”
“으으…마비약의 범위를 코에 한정시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지금 가지고 있는 간이 키트로는 못 만들겠네….”
페이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안 후배님. 이런데 쓰려고 데려온 걸 텐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페이 선배?”
“???”
“???”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좌로 갸웃 우로 갸웃거리는 나와 페이.
“저기…던전에서 필요한 소모품을 그 자리에서 만들 생각으로 데려온 거 아니었어?”
“굳이? 그럴 거였으면 미리 필요한 물건을 말했겠죠.”
아무리 내가 이번 던전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준비물마저 잊을 정도는 아니다.
“그럼 난 왜 데려온 거야 후배님…?”
“이 던전을 100% 털어먹으려면 뛰어난 연금술사가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클리어 보상으로 얻는 가호도 페이 선배에게 필요한 거고요.”
페이는 분명 최종적으로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연금술사다.
하지만 단순히 가만 놔둔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지.
이건 H&A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20살 좀 넘게 산 학생들이 세상을 구한다?
그럼 지금 일선에서 뛰고 있는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뭐가 되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짧은 시간에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던전의 보상을 잘 활용해야 한다.
어떠한 형태건 던전의 보상은 선신의 권능이 파편화된 것.
이를 모으고 또 모으다 보면 자연스레 격이 상승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무렇게 모으면 안 되니 적절한 빌드를 계획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던전의 보상은 연금술사들에게 필수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찾아내는 비밀 방도 일정 이상의 연금술 스킬이 없으면 못 열겠는가.
여긴 그냥 대놓고 연금술사 데려오라고 만든 던전이나 다름없다.
몬스터들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겠지.
게임일 때야 제작진의 의도라 생각했지만…이젠 안다.
제작진이 아니라 이 던전을 만든 신의 의도였다는 걸.
“아시겠어요? 이번 던전 공략은 사실상 페이 선배를 위한 거예요. 뭐, 저희도 콩고물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겠지만요.”
“후, 후배니임….”
잔뜩 감동받은 것처럼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페이.
“에헤이. 아직 감동하긴 이르죠. 아직 저희 들어가지도 않았거든요? 카를라 에어 포켓 마법 쓸 줄 알지?”
“물론이죠. 지금 준비할게요 주인님.”
잠시 뒤. 우리는 커다란 공기 방울을 타고 연못 밑바닥에 닿았다.
수중 호흡을 위한 마법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범용성 좋은 마법은 에어 포켓이라는 마법이리라.
이름 그대로 공기가 가득 들어찬, 커다란 주머니 같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마법인데.
이런저런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이걸 실제로 물속에서 쓰면 커다란 공기 방울을 타고 수중을 유영하는 모양새가 된다.
지구건 에우렐리아 대륙이건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그런 동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이었어야 했다.
“물이 진짜 더럽긴 하네.”
투명한 장막 너머로 비치는 푸른 물결과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장면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녹조류 때문인지 한 치 앞밖에 보이지 않는 시야. 간간이 내비치는 채 썩지 못한 쓰레기와 정체 모를 벌레들.
물고기는 아마 없을 거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그나마 다행인 건 보기에만 이렇지, 이리스의 말대로 에어 포켓 안쪽으로는 냄새나 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려나.
그렇게 카를라의 조종하에 에어 포켓을 타고 한참을 내려가자 밑바닥에서 푸른 광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로 가면 되는 건가요 주인님?”
“응. 저기야. 생각보다 밝네. 물이 탁해서 조금 헤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이 정도 탁하니까 바깥에선 던전 입구의 빛이 티도 안 난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이제 곧 던전에 들어가니 다들 준비해.”
잠시 뒤. 우리는 커다란 공기 방울을 타고 연못 밑바닥에 닿았다.
화아악-!
푸른 빛무리에 몸이 닿자마자 사방을 둘러싼 녹색 물이 사라지며 감각이 뒤집어졌다.
분명 밑으로 잠수하고 있었을 터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위로 솟구치고 있더라.
투웅-
누군가 우리가 들어있는 공기 방울을 뒤에서 민 것 같은 느낌.
잠시 허공에 떠올랐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씩 바닥에 내팽개쳐졌으나.
“흡!”
반사적으로 염력 마법을 펼친 이리스가 전원을 허공에 붙들어 맸다.
…상공 30cm에서 말이다.
“와. 이걸 잡네?”
“역시 상위 마법사는 다르네요.”
“어머? 이제 아셨나요? 스승님의 대단함을!”
“히에엑…흐에엑….”
재빠르고 정확한 마법에 감탄하는 나와 카를라. 그리고 어째서인지 자기가 으스대는 엘리샤.
페이는 그냥 깜짝 놀라서 히익대고 있었다.
그런 우리 넷의 모습을 본 이리스가 머쓱하게 하나둘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던전에 와서 그런지 과하게 긴장했나 보네. 시작 지점은 안전하다는 것도 깜빡하다니.”
“아냐. 잘했어. 시작 지점이 안전한 건 어디까지나 몬스터로부터 안전하다는 소리거든. 여긴 괜찮았지만 가끔 사교도들이 미리 숨어들어 있거나, 함정을 파둔 경우도 있으니 조금 전의 재빠른 대응은 잘한 거야.”
“흠흠. 주인이 그리 좋게 봐준다면 앞으로도 이리하겠네.”
“응. 그래도 정말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 아니면 먼저 나서지는 말아줘. 이리스 네가 앞장서면 우리가 할 일이 없거든.”
“알겠네. 뒤에서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안심하고 마음껏 날뛰어보게.”
작은 가슴을 통통 두드리는 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