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29화 (129/230)

“후배님…? 대체 이 로브랑 가면이 뭐길래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아, 그건…음….”

생각해 보인 아직 페이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구나.

하지만 이제 페이 또한 우리와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는 관계.

슬슬 내 지식의 원천에 관해 둘러댈 필요가 있다. 앞으로 페이에게 시킬 게 많거든.

“이제 페이 선배에게도 말할 때가 됐네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속으로 말을 고르며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척!

돌연 카를라가 손을 들어 올리며 루비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주인님! 페이 양에게는 제가 설명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응? 나는 상관없는데…뜬금없이?”

“이 기회에 페이 양과 함께 주인님에 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어머?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이야기가 꽤 길어질 테니 이쪽은 저희에게 맡기고, 당신은 스승님이나 달래주시죠.”

“이리스를? …아.”

슬쩍 옆자리를 바라보자 아무래도 방금 건 아웃이었는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쓴 이리스가 보였다.

시킨 거 잘했는데 너무 놀리기만 했나.

얼굴만 빼꼼 내민, 그나마도 잔뜩 삐쳤다는 것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이리스.

그런 이리스의 귀를 부드럽게 감쌌다.

“…힛!”

하지만 움찔하면서도 볼에 넣은 바람은 빼질 않는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것 같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페이 선배에게는 잘 설명해줘.”

“맡겨만 주세요 주인님! 어디 보자…페이 양도 주인님이 어디서 이런 걸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신가요?”

“으응.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죠.”

“다 이유가 있답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주인님은 항상 뒤로 빼면서 제대로 말해주질 않지만 어떻게 된 거나면….”

이러쿵 저러쿵 구리구리오리너구리.

“그렇게 된 거예요!”

“와…후배님이…그래서 저번에 비율은 모르는데 재료만 아는 레시피를 가져왔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

H&A에서는 재료만 있으면 제작 버튼 하나로 물건을 만들었기에 정확한 제작법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재료랑 결과물만 알려주면서 맡긴 의뢰가 몇 개 있는데…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던전 실습 직전의 일이니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지.

“있잖아 후배님. 그럼 후배님의 목적은 사교도를 뿌리 뽑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그 부분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네요.”

언제나 대략적인 방침과 당장 해야 할 일만 말했지, 최종 목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준 적이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같이 갈 생각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 괜찮겠지.

“목적이라…어찌 보면 페이 선배의 말대로 사교도를 뿌리 뽑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했는지, 내게 집중하고 있는 여인들을 한차례 둘러보고서야 말을 이었다.

“모든 악신을 쓰러뜨리는 것. 그게 제 최종 목적이에요.”

“…….”

“…….”

“…….”

“…….”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그런 걸까. 순간 이 자리의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작스런 정적. 이를 가장 먼저 깬 것은 화를 푸는 조건으로 내 몫의 디저트를 우물거리던 이리스였다.

“주인이여. 악신을 쓰러뜨린다 함은 죽음을 말하는 겐가?”

“맞아.”

“으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침음을 흘리던 이리스였으나, 이내 꼴깍 소리를 내며 먹던 타르트를 삼키고서야 입을 열었다.

“약 300년 전. 나는 신들이 벌인 대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다네.”

“그야 그렇겠지.”

이리스의 나이가 500이 넘으니까.

“당시의 나는 중위 마법사밖에 되지 않아 최전선에는 나설 수 없었네. 허나 그럼에도 악신의 흉험함은 잘 알고 있네. 아무렴. 직접 봤으니 당연한 일일세.”

“스승님은…직접 본 적이 있는 건가요? 악신을?”

“그래 제자야. 네 말대로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봤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걸까. 이리스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혼탁한 합일…녀석은 산보다도 거대한 살점 덩어리였네. 무수히 많은 생물을 한데 뭉쳐 만든 몸뚱이는 들짐승인 동시에 물짐승이며 날짐승이었고, 또한 그 무엇도 아니었네.”

아. 하필 혼탁한 합일을 봤나 보네.

지금이야 나한테 된통 당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기만 하는 녀석이지만…전성기의 혼탁한 합일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순수한 전투력이라면 악신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걷는 길 걸음걸음마다 모든 것이 먹혀 사라졌네. 소드마스터의 검격과 대마법사의 마법조차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네. 악신 또한 신이라는 걸 말일세.”

“하, 하지만 지금은 전부 봉인되지 않았나요 스승님?”

“그래. 용사 라힘과 선신의 힘으로 봉인됐지. 허나 그건 용사라는 불세출의 천재와, 직접 강림한 신들 덕에 가능했던 일인 게야.”

엘리샤의 의문에 친절히 답해준 뒤에야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하는 이리스.

“주인이여. 주인의 출신을 짐작하기에 그 뜻 또한 이해하네. 분명 악신은 확실하게 죽여 소멸시켜야 하는 존재겠지.”

그리고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네. 하다못해 지난 대전쟁 때처럼 선신들이 지상에 강림한다면 모를까,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악신일세.”

“뭐…그렇겠지.”

“허면 악신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사교도를 꾸준히 토벌해 봉인을 유지 시키는 쪽이 더 좋지 않겠는가. 대전쟁을 직접 겪어본 자로서는 이쪽이 훨씬 현실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주인이 명령한다면 따르겠지만 말일세.”

이제 와서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심스레 뒷말을 덧붙이는 이리스.

그 모습에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어. 나도 그러고 싶고.”

정말. 진심으로 나도 그러고 싶다.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게 무슨…?”

당황한 이리스에게, 그리고 카를라와 엘리샤와 페이에게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하나 공유했다.

“봉인. 그거 몇 년 내로 풀릴 거야.”

악신의 봉인이 풀린다는 소리에 급격히 무거워진 분위기.

한번 신들의 전쟁을 경험해본 이리스에 이르러서는 몇번이고 내게 되묻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다들 축 처져있어? 봉인이 풀린다고 했지,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린 안 했잖아.”

“네? 그치만 이번에는 악신을 막을 사람이 없잖아요 주인님. 설마 봉인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선신들도 다시 강림하나요?”

“아니. 하고 싶어도 못 할 거야. 대전쟁 때 얻은 상처도 문제지만, 던전에 몬스터를 봉인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썼거든.”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봉인에 들인 힘의 일부는 공략자에게 흡수되지만, 나머지는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기 때문.

덕분에 정말 빡쎄게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니면 선신 또한 사도 정도는 임명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직접 강림은 무리지만.

참고로 헬레나가 아직 성녀가 아니라 성녀 후보인 것도 그래서다.

괜찮은 후보를 몇몇 뽑았지만, 정작 정의로운 광명이 성녀를 만들 만큼 힘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순간 자기가 뭘 들었나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리던 카를라가 빼액 소리쳤다.

“역시 엄청 위험한 거 맞잖아요! 이렇게 된 거 저희끼리 멀리 떨어진 섬으로 도망칠까요 주인님? 대륙이 어찌 되건 저희끼리 오손도손 지내며 자식도 대여섯쯤 낳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면….”

“카를라. 아카데미에서 배웠잖아. 신들의 전쟁 초반에 도망간 왕족과 귀족이 어떻게 됐는지.”

“아.”

자기들끼리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했을 리가 없잖은가.

다만, 그런 이들은 사교도와 몬스터에게 포위당한 끝에 오히려 더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이다.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주인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말했잖아? 내가 막을 거라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도망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그나마 해볼 만한 방법은 정면 돌파뿐.

다행히 내게는 H&A의 공략 지식과, 긴 플레이 타임 동안 쌓아온 골드가 있다.

세상일이 게임처럼 돌아가지도 않고, 나도 게임 캐릭터처럼 싸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해봐야지. 얌전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묻어나온 탓일까. 예상 이상으로 단호한 어조가 튀어나왔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여인들을 보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나 혼자가 아니라 너희랑 같이하는 거긴 한데…어때? 도와줄 거지?”

“““…….”””

봉인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정적이 흐르는 방안.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카를라가 말문을 여는 걸 시작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니까.

“주인님은 제게 허락을 구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명령해주세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따를 테니까요. 대신…아시죠?”

“어머?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얀델. 당신 말대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발버둥이라도 쳐야죠.”

“끄응…아무리 오래 살아도 악신과 마주할 일이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네만…허나 귀여운 제자와 주인을 위해서라면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지.”

“나, 나는 전투 연금술사가 아니라 같이 싸우지는 못해. 그래도 후배님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줘! 무기, 장신구, 포션, 마도구…정말 뭐든 전부 만들어줄 테니까!”

다행히 싫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3명은 노예고 1명은 각인만 없지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 싫다고 거절하기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껏 숨기고 있던 비밀을 하나 풀어내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느슨해지는 입가를 애써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 이걸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탄 셈이지?”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죠 당신?”

불길함을 감지한 걸까. 엘리샤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한 걸음 물러섰다.

너무하네. 정말 아무 생각 없었는데.

하지만 엘리샤의 경계심 가득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술이 슬금슬금 차오른다.

마침 다과도 다 먹었고 찻 주전자도 비었으니 슬슬 자리를 옮길 때도 됐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별거 아냐. 그냥 친목 좀 다질 겸 오늘은 다 같이 잘까 했거든.”

“진짜 이상한 생각 중이었잖아?!”

“어허. 이상하다니. 카를라랑 너랑 이리스는 한번 같이 한 적 있잖아. 페이 선배도 해봐야지.”

“그게 대체 무슨 논리인가요!”

“왜 이렇게 반대하고 그래? 설마…페이 선배만 따돌리는 거야? 가정 내 괴롭힘은 좀….”

“따돌림이라뇨! 그리고 지금 페이 양을 괴롭히는 건 얀델 당신이거든요?!”

그리 말하고는 척! 하고 손을 뻗어 페이를 가리키는 엘리샤.

갑자기 지목된 페이가 자신을 가리키며 펄쩍 뛰었다.

“어…? 어어?!”

그리고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다른 여인들을 힐끔거리더니, 이내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이게 신고식이라는 거지? 괜찮아 엘리샤 양! 나 힘낼게!”

“아니 그게 아니라…아니이…!”

엘리샤가 외눈박이 세상의 유일한 정상인이 된 것처럼 답답한 표정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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