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주인과 잠자리를 가진 게 아닌가?”
“맞긴 한데요오…아직 학생이고…그게….”
“그럼 미래의 반려라고 하세.”
“미래의 반려…가족….”
정조를 중요시하는 엘프. 그중에서도 500년이나 산 옛날 엘프인 이리스에게는 당연한 상식.
하지만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페이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발상이었나 보다.
싱숭생숭한 표정을 짓는 페이.
다시금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하길래,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자기소개랑 인사도 끝났으니, 친목을 다지기 위해 다 같이 섹스나 할까?”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주인이여?”
“후배님 그건 좀….”
한마음 한뜻으로 난감해 하더니,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둘.
응. 아까보다는 훨씬 낫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리스가 슬쩍 고개를 젖혀 내 가슴팍에 기대며 속삭였다.
“주인이여. 그런 농담까지 해가며 도와줘서 고맙네.”
“무슨 소리야. 난 진심인데.”
“…….”
어째서인지 불만스럽다는 듯, 다시금 방방 뛰기 시작한 이리스를 꽉 붙잡아 고정하는 것도 잠시.
똑똑똑.
“주인 어른. 다과를 내왔습니다.”
파밀라가 이제야 커다란 트레이와 함께 노크해왔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네.
아까부터 쭉 무릎 위에 앉혀둔 이리스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함께 차나 홀짝이며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엘리샤를 노예로 삼아 데리고 다녔더니 퍼진 과장된 소문들.
거기에 휘말려 위험해질 뻔한 페이.
빡쳐서 결투를 벌인 김에 들끓는 고요의 권능을 폭로한 일.
그리고 도서관에서 겪었던 이상 현상까지.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같이 화내며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리스가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결투와 들끓는 고요의 위험성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 여기서도 얼추 들을 수 있었네. 허나 공간의 틈새에 구현된 괴담이라니. 그건 처음 들어보는 현상이라 꽤 흥미롭구려.”
“그치? 이리스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 그나저나 이리스 너는 어때? 입구에서 보니까 결계는 거의 완성된 것 같던데.”
“우선 주인이 시킨 일은 대부분 처리했네. 본래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시간이 더 생겼으니 넉넉하더군.”
그리 말하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넉넉한 로브와 가면을 꺼내든 이리스.
검은색과 보라색을 기조로 한 심플한 디자인.
하지만 예산을 넉넉히 쥐여줘서 그런지, 수수한 외형임에도 때깔이 심상치 않다.
“로브에는 크기 조절, 자동 수복 마법이 기본으로 걸려있네.”
“그게 끝이야?”
“그럴 리가. 안감에 새겨넣은 마법진이 있으니, 마나를 불어 넣는다면 드레이크의 가죽만큼이나 단단해져 어지간한 도검은 막아낼 수 있을 걸세. 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방호력은 덤이고.”
우웅.
이리스가 시범을 보이듯 마나를 불어넣자 순식간에 딱딱해지는 로브.
여기에 실드까지 두를 테니, 총합하면 상당한 수준의 방호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지금 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능이긴 하지만…내가 들인 골드와 이리스의 실력이라면 여기서 끝이 아닐 터.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우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이리스.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네. 주인이 그럴듯한 비밀 조직 분위기를 내길 원한다 하여 준비해봤네.”
그 말과 동시에 스르륵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진 로브.
“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여전히 이리스의 손이 무언가를 잡고 있다. 이건 사라진 게 아니라….
“투명화?!”
“맞네. 일전에 린델하이트 영애에게 주인은 온갖 스크롤과 물약을 한계치까지 중첩하는 걸 즐겨한다고 들었네.”
“그런 이야기도 했었어 카를라?”
“네. 주인님이 마차에서 주무실 때 저희끼리 잠깐 주인님 이야기를 좀….”
헤헤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카를라.
“뒷담화야?”
“설마요! 그냥 엘리샤랑 이리스 님이 주인님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셔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조금 해드렸을 뿐이에요.”
내가 없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엘리샤가 키득이며 거들었다.
“카를라의 말대로랍니다. 얀델 당신이 배빵빵 플레이에 흥분했다는 이야기밖에 안 했거든요.”
“뭣…?”
엘리샤가 조각 케익을 자르던 포크로 나를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당신. 정말 변태네요.”
“…그래. 엘리샤 너도 한번 해봐야지.”
“엣?”
대충 그런 느낌으로 엘리샤와 투닥이고 있자니, 이리스가 살짝 볼을 부풀리며 내 허벅지에 꾹꾹이를 시작했다.
“주인이여. 엘리샤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게. 그리고 이야기가 자꾸 다른 곳으로 새지 않나.”
“아, 미안. 내가 스크롤이랑 포션을 많이 사용한다는 이야기였지? 맞아. 그게 효율적이잖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볼에서 바람을 빼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효율적이지. 허나 번거롭고 비용도 상당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잠깐의 딜레이가 크게 작용하기도 하네.”
“그건…그래.”
이리스가 하는 말은 에드메렉과 싸우며 실감했던 부분이다.
스크롤이나 포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압박해왔었지.
만약 조금 더 전투 시간이 길어져, 도핑의 효과가 떨어졌다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반면 저 로브만 있다면 전투 중에 갑자기 투명해지는 것도 가능하겠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들은 기감이나 탐지 마법이 있으니 단순한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잔재주라도 쓸 수 있고 없고는 큰 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명 망토는 로망이지.”
“망토가 아니라 로브네만?”
둘 다 거기서 거기지 뭘.
“아무튼 잘했어. 시킨 대로 잘 했네.”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머쓱하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는 이리스.
“내 나이가 결코 적지 않거늘, 주인은 자꾸 나를 아이 취급하는구나.”
“싫어?”
“…싫다고는 안 했네. 그저 조금 부끄러울 뿐이니.”
엣흠.
작게 헛기침을 한 이리스가 주제를 돌리려는 듯 이번에는 가면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가면일세. 사실 이게 있어야 주인이 원하는 컨셉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네.”
“그 정도야? 대체 무슨 기능이 있길래?”
“우선 인식 저해와 탐지 방어, 역추적 예방 마법이 걸려있어 비전투시에 유용할 걸세.”
“응. 그 정도는 해야 비밀 조직 느낌이 살지.”
“이다음이 진짜 중요한 걸세. 무려 이 가면을 쓰고 마력을 불어넣으면….”
거기까지 말한 이리스가 짐짓 으스대는 표정으로 히죽였다.
“위압감을 뿜어낼 수 있네!”
“……?”
“수상한 사람처럼 말일세!”
“……!”
수상한 위압감은 중대사항이지.
이리스에게 가면의 능력을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지하. 사교도의 은밀한 본거지. 납치된 사람들. 끔찍한 제단.
하지만 사악한 의식이 시행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내리친 번개가 제단을 무너뜨린다.
불경한 기도문을 올리던 사교도들도, 공포에 흐느끼던 제물들도.
모두가 입을 다물며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의문이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울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걸음 소리.
터벅. 터벅. 터벅.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분명 아무것도 없을 터인 허공에서 스르륵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인영.
검은색과 보라색을 바탕으로 한 심플한 디자인의 로브와 가면. 그 수상한 외형에 한 사교도가 직감한다.
이 자가 의식을 방해한 장본인이라고.
의문은 분노로 바뀌어 소리의 형상을 입었다.
“누구냐!”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닌 기묘한 압박감뿐.
분노는 빠르게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공포가 자리 잡는다.
가면을 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어느새 주변 일대가 그의 영역이 되었음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헛숨.
“허어어어억…!”
이어서 우쭐해하는 이리스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주, 주인이여? 갑자기 이게 무슨…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겐가?”
“설마! 그냥 궁금해서 그래. 위압감이라는 거 어떻게 쓰는 건지 한번 보여줄 수 있어?”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 가능하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이리스가 자신의 자그마한 얼굴에 가면을 가져다 댔다.
파앗.
별다른 고정 장치도 없건만, 이리스의 얼굴에 딱 달라붙는 가면. 심지어 조금씩 줄어들어 딱 맞는 사이즈가 되기까지 한다.
“원리는 복잡하네만, 사용법은 간단하네. 필요한 술식은 이미 내장되어있으니 마력만 불어 넣으면 된다네.”
그리 말하며 마력을 불어넣자 이리스로부터 정말로 묘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주입하는 마나의 양에 따라 위력을 조절할 수 있네만…주인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지금은 이게 최선일세.”
“풀파워로 쓰면 훨씬 강하다는 거지?”
“바로 그러하네. 어떤가? 이 정도면 마음에 드는겐가?”
평가를 바라는 주제에 어조는 자신만만하기 그지없는 이리스.
하지만 이 가면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최고야! 이대로 4개 만들어 줘!”
“흠흠. 주인이 이렇게나 좋아하니 나도 뿌듯하구먼. 알겠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네.”
역시 연륜의 힘인가? 이리스가 뭘 좀 안다니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들어 올린 이리스를 위아래로 흔들어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와아아!!”
“주인이여!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아이가 아닐세!”
“멋있다아!!!”
“익! 이이익! 제자 앞에서 이 무슨…!”
내게서 벗어나려 격하게 바동거리던 이리스였으나….
꽉 붙잡고 놔주지 않자 결국 체념한 듯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한참은 더 흔들어준 뒤에야 조심스레 의자에 앉히자, 이 모든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페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