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한 아카데미 학생들도 많고, 그런 이들을 노리고 요란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가게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로변의 이야기.
조금 더 나아가 외곽으로 빠지자, 확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줄었다.
그렇게 10분가량을 더 나아가자 덩그러니 세워진 큼직한 저택이 하나 시야에 들어온다.
덩굴에 휘감긴 보기 좋은 담장과, 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대문.
그리고 뒤편에 떡 하니 서 있는 하얀색과 파란색을 기조로 한 2층짜리 건물.
원래는 어디 귀족이 자기 자식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4년 동안 주말에 쓰라고 지어준 저택이었다나?
일주일에 많아 봐야 2일밖에 안 머물고, 그나마도 4년 뒤면 졸업해서 쓸 일이 없는데 집까지 지을 필요가 있나 싶긴 한데.
나중에 팔 것까지 생각해 보면 꽤 합리적인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아카데미 주변은 집값이 올랐으면 올랐지 떨어질 일은 없거든.
실제로 내가 살 때도 꽤 비싸게 사기도 했고.
그나저나 겨우 2주 만인데 뭔가 많이 변했네.
원래는 저번 주말에 가기로 했었는데, 결투의 뒤처리로 좀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변했다고는 해도 외형이 변한 건 아니다.
저택 주변을 감싼 마나의 흐름 같은 게 변한 거지.
나만 느낀 건 아닌지 카를라와 페이가 입을 떡 벌렸다.
“전부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굉장히 정교한 결계네요.”
“대단해…누가 이런 걸…?”
그 반응에 엘리샤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흐흥. 역시 스승님! 시간과 재료만 더 주어진다면 실반 마탑과 비슷한 수준의 결계를 두를 수도 있을 거랍니다!”
“집은 안전하면 안전할수록 좋지. 아, 페이 선배. 혹시 페이 선배도 여기에 설치할 만한 거 있나요?”
“나? 으음…결계의 조합을 망칠 수도 있어서 무조건 된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몇 가지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게 있긴 해.”
“그럼 여유 날 때 몇 개 만들어 주세요. 물론 이리스 님과 상의한 뒤에 말이죠.”
“이리스 님…엘리샤 양의 스승님이시지? 그, 전 실반 마탑주셨던.”
나름 거물이었던 이리스를 실제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자 긴장되는지 침을 꼴깍 삼키는 페이.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페이 선배. 어떤 의미로는 귀여운 분이니까요.”
피식 웃으며 대문에 달린 노크용 마도구를 두드리려는데.
끼이익.
그보다 한발 먼저 스스로 열리는 대문.
어떻게 먼저 안 건지, 덤으로 데려온 엘프 가족 중 아들 쪽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어른. 그리고 친구분…인가요?”
“좀 더 친밀한 사이지.”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페이는 얼굴을 붉혔고, 아들 쪽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새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겼지만.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 그만.”
“놀랄 수도 있지.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였더라?”
슬슬 엘프 가족들 이름도 외워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고 아빠 쪽, 엄마 쪽, 아들 쪽 이런 식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까.
“…올란 입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올란의 안내를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공간 왜곡 마법이 적용되어있는 터라, 겉보기보다 꽤 넓은 내부.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가 왔다는 걸 알아챈 다른 엘프 가족 둘이 나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리스는 어딨어?”
“탑주님…아니, 이리스 님은 지하의 공방에 계실 겁니다. 아직 설비가 완성되지 않아 바깥의 상황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주인어른께서 오신 걸 알면 바로 나오실 겁니다.”
“응?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공방 구경이나 할 겸 내려가 보지 뭐.”
살짝 굳은 표정의 올란을 안심시키고 다 같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계단 끝에 있는 두꺼운 문을 열었다.
이리스와는 꽤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절로 솟아오르는 반가움을 가득 담아 외쳤다.
“이리스!”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설마 여기에도 없는 건가 싶어 조금 당황한 순간.
툭.
“엉?”
발에 무언가 말랑한 것이 채였다.
황급히 고개를 내려보자.
“음냐…라떼는….”
그곳에는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묘하게 서글픈 표정으로 잠꼬대 중인 이리스가 있었다.
쓰읍.
이런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음냐…라떼는….”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묘하게 서글픈 표정으로 잠꼬대 중인 이리스.
쓰읍.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아무리 이불을 깔았다지만, 공방 바닥이 차갑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깨우는 게 나으려나? 아니, 푹 자고 있는데 그냥 놔둘까? 재운다면 침실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엘리샤가 왈칵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스승님…어쩌다 이렇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일하다 피곤해서 잠깐 쉬는 거일 수도 있잖아.”
“하, 하지만 힘들다고 이렇게 바닥에 엎드려 주무시는 건 본 적이 없어요! 무엇보다 스승님의 표정을 보세요!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눈물까지….”
발을 동동 구르는 엘리샤.
그 진동이 거슬린 걸까. 이리스 또한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휘적였다.
“으읏…개물….”
“제가…괴물?”
엘리샤가 잔뜩 충격받은 표정으로 비틀거린다.
“아니, 단순한 잠꼬대잖아. 뭘 이런 걸로 상처받고 있어. 그보다 이리스를 침실로 옮길 거니까 잠깐 비켜봐.”
역시 그냥 놔두기보다는 제대로 된 곳에서 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이불 채로 이리스를 들어 올렸다.
“읏차.”
워낙에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별로 무겁지도 않네. 품에 쏙 안기기도 하고.
이불에 둘러싸인 상태라 그런지 약간 아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려 했으나.
“무으…우으으….”
너무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들어 올리며 위화감을 느낀 걸까.
이리스가 이불 안에서 꼬물대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후아아암….”
섬세한 속눈썹이 올라가고, 눈꺼풀에 숨겨져 있던 파란 보석 같은 눈동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헤?”
막 깨서 정신이 없는지 초점은 잘 안 잡히는 것 같지만.
“일어났어?”
“주인이여?”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더 잘래? 어차피 내일까진 저택에 있을 예정이니까 괜찮거든.”
“자, 잠깐 기다려다오.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건 다른 이들도….”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이리스.
그렇게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처음 만나는 페이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이리스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처럼, 이불보에 감싸여있는 상태.
“아.”
상황을 파악한 이리스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긴. 자는 모습을 보인 것도 좀 그런데, 하필이면 구도까지 이 모양이니 부끄러울 수도 있지.
무엇보다 이리스는 자신의 덜 자란 몸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이리스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연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흐읍!”
그리고는 거북이가 등껍질 안에 숨듯, 이불 속으로 팔다리와 얼굴을 쏙 집어넣는 이리스.
이제는 그냥 볼록한 덩어리가 된 이불 속에서 희미한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렁…퓨우….”
“…….”
“…….”
“…….”
코가 아닌 입으로 내는 것 같은 어색한 소리.
이 자리의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못 본 걸로 하자.
***
이불 덩어리를 품에 안은 채 향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조금 전의 이리스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이미 멀쩡히 깨어 있는 이리스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건 좀 그렇잖은가.
엘프 가족 중 엄마 쪽인 파밀라에게 간단한 다과를 내오라 시킨 뒤.
무릎 위의 이불 덩어리에 지그시 손을 얹었다.
꿈틀.
앞으로의 일을 직감한 걸까. 이불 안에서 느껴지는 움찔거림이 퍽 애처롭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멈출 생각은 없지만.
파바밧.
빠른 속도로 손을 놀려 돌돌 말린 이불을 걷어냈다.
“익…이익!”
안쪽에서 이리스가 잇소리를 내보며 저항해보지만…무의미한 발버둥이다.
어느덧 내 근력 스탯도 14. 만렙이 30이라는 걸 고려해 봤을 때,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대략 잘 단련된 일반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무튼 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이리스의 가느다란 팔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근력이리라.
실제로 이렇게 이불이 허무하게 벗겨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이불을 반쯤 풀어 헤치자 갑자기 얌전해진 이리스. 포기한 건가 싶어 마저 들추자.
쌔액- 쌔액-
곤히 잠든 사람처럼 축 늘어져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는 이리스.
“아하? 작전을 바꾸시겠다?”
“야, 얀델! 작전이라뇨. 스승님이 설마 잠꼬대까지 해가며 바닥에 엎어져 자던 걸 들키고, 심지어는 최연장자의 위엄마저 사라진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서 자는 척을 한다는 건가요?! 그럴 리 없잖아요! 애도 아니고!”
“…….”
엘리샤가 제자랍시고 스승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것 같긴 한데….
“네가 제일 나빴어.”
“제가요?!”
응. 실드를 쳐주는 게 아니라 실드로 치고 있잖아.
“큿…!”
이거 봐. 이리스가 잠꼬대하는 것도 아닌데 눈을 꾹 감은 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네.
내 무릎 위에서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움찔거리는 이리스.
그런 이리스를 향해 조심스레 검지를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