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25화 (125/230)

거기까지 말한 카를라가 살며시 허공에 손바닥을 뻗었다.

“틴더.”

화륵.

참 친숙한 기초 마법. 틴더가 작은 불꽃이 되어 카를라의 손 위에서 춤을 춘다.

“이게 그냥 사용한 마법이구요.”

주먹 쥐어 불씨를 꺼뜨리고는, 곧바로 더 많은 마나를 끌어모으는 카를라.

“틴더.”

화르르륵!

조금 전의 2배는 될법한 불씨가 피어오른다.

“이게 차지 영창이지?”

“네. 한계치까지 강화한 거예요. 여기서 더 마력을 쏟아 부었다간 그냥 팟! 하고 터지겠죠.”

이번에도 손을 휘휘 저어 불씨를 꺼뜨린 카를라가 다시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겨우 기초 마법 하나 쓰려고 중위 마법사가 이렇게 깊이 집중할 리는 없지.

아니나 다를까.

두근!

내 심장이 멋대로 뛰며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카를라를 중심으로 세상에 파문이 이는 것만 같은 착각.

같은 코어를 가져서인지 지금의 카를라에게서는 신기할 정도의 끌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틴더!”

화아아악-!!

더는 기초 마법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크기의 불꽃이 수련장 내부를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그보다 내 신경을 잡아끄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카를라 주변의 모든 마나가 저 마법을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이었다.

“이게 공명으로 강화한 마법이에요. 어때요? 좀 다르죠?”

“응…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잘 설명하기 힘든데, 단순히 마나를 더 집어넣은 건 아니네. 이건 확실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라가 뿌듯한 기색으로 가슴을 쭉 폈다.

“당연하죠! 이건 마나와 공명하는 동시에, 마법 그 자체와도 공명한 거니까요.”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한 거죠. 주인님도 곧 할 수 있게 되실 거예요.”

“…어떻게?”

“감으로? 이리스 님의 원소 조합때와 달리, 이렇다 할 공식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그리 말하는 카를라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내가 실패할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에, 엘리샤….”

부담스러운 마음에 도움을 청했지만, 엘리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당신? 린델하이트 가문은 그냥 혈통이 사기랍니다.”

“…….”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완벽히 이해했다.

하루 종일 연습했지만 결국 공명을 익히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마법이랑 공명하라고? 대체 어떻게? 난 아직도 마나의 존재 자체가 신기한데? 애초에 마법이 뭐지? 어디랑 어떻게 공명해야 하는 거야?

무엇보다…이 모든 의문을 감으로 해결하라고?

엘리샤의 말마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게 가능했던 린델하이트 가문이 이상한 거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낑낑대도 시간은 지나가는 법.

결국 별다를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 주말이 찾아왔다.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페이를 데리고 저번에 사둔 저택에서 서로를 소개하기로 한 그 주말 말이다.

미리 정한 약속 장소인 아카데미의 대광장.

저 멀리에서도 대단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아니, 페이를 발견하자마자 호다닥 달려갔다.

그리고는 허리춤을 번쩍 들어 올려, 푹신한 가슴골에 얼굴을 묻었다.

“응애. 나 아기 얀델. 암무거또 몬나!”

“후, 후배님?! 갑자기 왜 이래…!”

바동대며 내게서 벗어나려는 페이.

하지만 체구가 작은 페이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에에잇! 여기 길가야! 다른 데서면 모를까 여기서 이러면 부끄럽다구!”

“어? 어어?”

천천히 벌어지는 팔. 중간에 가슴이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 사이로 쏙 빠져나온 페이.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세요 페이 선배?”

“후힛. 잊었어? 내가 드워프 혼혈이라는 거.”

“아.”

그러네. 드워프는 이상할 정도로 힘이 강한 종족이었지.

어쩐지…처음 하면서도 밤새 붙잡고 놔주질 않더라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샐쭉한 눈빛으로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페이.

“후배님. 방금 이상한 생각하지 않았어?”

“이상한 생각이라뇨.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한테 페이 선배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을 뿐이거든요?”

“에이. 여기 있는 둘이랑은 한번 만나본 적 있으니 그냥 인사하면 되는 거 아냐?”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뒤따라오던 카를라와 엘리샤를 바라보는 페이.

하지만 정작 둘과 시선이 마주치자 긴장되는 건지 그대로 덜컥 굳어버렸다.

생각해 보니 페이는 내겐 익숙해졌어도,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건 아직 어색하겠네.

저번에 공방에서 잠깐 만난 거야, 어디까지나 내 덤이라는 느낌으로 얼굴만 봤던 수준이니까.

무엇보다 카를라와 엘리샤는 조금 대하기 어려운 면모가 있다.

우선 카를라는 노예 교육 때문에 겉으로는 그리 티를 내지 않지만, 대귀족으로서의 행실이 짙게 배어 있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카를라의 기품은 좋은 집에서 구박받고 자란 페이에겐 트라우마나 다름없을 터.

엘리샤 또한 만만치 않다.

지금은 조금 의미가 바랬다고 하나, 여전히 하이엘프는 엘프들 사이에서 신성시되는 존재.

어린 시절부터 떠받들려 살았던데다가, 실반 마탑에 입적한 이후로도 차기 대마법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심지어 카를라와 달리 노예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지라 평소부터 아가씨 느낌을 팍팍 풍기고.

당장 지금도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한숨을 내쉰다는 전형적인 아가씨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종도 아니고 노예 시종이면서!

뭐, 나야 그런 모습이 오히려 좋지만 페이로서는 어렵게 느껴질 뿐이겠지.

다소곳하게 서 있는 카를라, 여전히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엘리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페이.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니나, 그때와 달라진 관계에 셋 사이로 침묵만이 감도는 것도 잠시.

조금 전까지 한숨을 내쉬던 엘리샤가 부채를 접더니, 그대로 내 머리를 톡 두드린다.

“다 큰 어른이 응애가 뭔가요 응애가. 조금 전에는 많이 놀랐죠 페이 양?”

“앗, 으응. 괜찮아…요?”

“어제 얀델이 무리한 수련을 하느라 제정신이 아니라 그렇답니다. 그리고 굳이 존대는 안 써도 괜찮아요.”

“그…럴까?”

“그래야죠. 제가 페이 양보다 어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저는 노예의 신분이잖아요?”

“하지만 후배님이 단순한 노예는 아니라고 했는걸? 그러니까 나도 막 대할 수는 없어….”

우물쭈물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하는 페이.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엘리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얀델이 그리 말했나요?”

“응…그으. 나랑 똑같은 연인? 같은 거니까 사이좋게 지냈으면 한다고 했거든. …그리고 나이는 내가 많아도 후배님과의 관계로는 내가 후배잖아?”

“어머? 어머 어머?”

누가 봐도 기뻐하는 듯한 모양새.

이내 우쭐한 미소를 지은 엘리샤가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악수를 건넸다.

“잘 말해줬네요 당신. 맞답니다. 저 엘리샤 실반 글렌시엘은 언젠가 얀델의 반려가 될 몸! 페이 양도 마찬가지겠지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편하게 엘리샤라고 불러주시길.”

“응…나도 자, 잘 부탁해 엘리샤 양!”

호의적인 엘리샤의 모습에 이리저리 시선을 방황하면서도 손을 맞잡는 페이.

이제 남은 건 카를라인데.

“으음. 주인님이 공명을 익히시면 뭐부터 알려드릴까요? 역시 공격에 활용하는 방법?”

“저기….”

“아니지. 처음은 방어 마법부터 배우는 게 안전하겠죠.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갑자기 변한 출력에는 적응하기 힘드실 테니.”

“카를라 선배?”

“하지만 시조님과 같은 체질을 타고나신 주인님이라면 바로 적응할 것 같기도 한데.”

“저기, 제 말 좀….”

“끄으응. 어렵네요…그나저나 이러다 하급 마법으로 만족하시고 중급 마법에 도전하는 걸 미루시면 어떻게 하죠?”

“…….”

김칫국 한 사발을 원샷으로 드링킹하기라도 한 건지, 어제부터 내가 공명을 익힌 이후를 고민하는 카를라.

너무 무섭잖아. 어떻게 그렇게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건데!

감으로 하면 된다지만 난 아직 그 감을 못 잡았다고!

내가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는 사이.

꾹꾹.

몇 번이고 말을 걸어봤지만, 전부 실패한 페이가 시무룩한 눈빛으로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맡기세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카를라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흐야아악!”

괴상한 비명과 함께 제자리에서 펄쩍 뛴 카를라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오냐. 주인님이시다. 들뜬 건 알겠는데 이제 정신 좀 차려 카를라.”

“넹…저택으로 가기 전에 페이 양이랑 합류하러 가는 길이었죠?”

“아니. 이미 도착했고 페이 선배는 여기 있는데?”

“헉!”

진짜 눈치채지 못한 건지 화들짝 놀란 카를라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해요 페이 양. 아, 페이 양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네, 네엡. 카를라 선배님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응? 뭐야 페이 선배. 왜 카를라 한테만 존댓말 해요?”

“그야…나한테는 아직도 엄청난 선배님으로 남아있으니까? 거기에 노예가 되긴 하셨지만, 본인이 사교도인 것도 아니잖아.”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페이.

페이의 성격상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훨씬 스무스하게 친해질 것 같네.

서로 대립각을 세우면 정말 피곤했을 텐데, 그럴 것 같진 않아 다행이다.

아직 이리스를 만나진 않았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이리스와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나누며 아카데미를 나섰다.

***

주말의 라힘 시는 북적북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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