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호다닥 편한 자세로 앉는 둘.
나 또한 중간에 앉아 린트블룸 호흡법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남아있던 책이 완전히 타오르자.
후우웅-
잿더미를 중심으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처음에는 작은 산들바람 같았던 마력의 흐름이 점점 격해지더니, 이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법의 여파가 만들어낸 찌꺼기라고는 하나, 그것도 300년이나 쌓이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는 법.
전신을 쓸어내리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한층 더 깊이 집중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을 따라 맥박치는 코어가 주변의 마나를 게걸스레 빨아들인다.
물론 전부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순함이 떨어져 고스란히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되는 마나를 쌓을 기회는 흔치 않으리라.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피부로 와닿는 마나의 격류가 다시 산들바람처럼 약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이제 끝났나 싶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 어두컴컴하고 폐허 같던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괴담 속으로 진입하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도서관 3층이 우리를 맞이한다.
조금 전까지 주변을 휩쓸던 마나의 격류는 현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 건지 여전히 고요한 도서관.
심지어 우리도 다 같이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던 자세 그대로라 전부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확연히 늘어난 코어의 용량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를라와 엘리샤. 그리고.
띠링!
【아카데미 7대 불가사의 격파!】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시야 한구석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내가 겪은 일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알림은 조금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우선은 자리를 좀 옮기기로 했다.
아무리 사람이 드문 3층 구석이라지만, 셋이서 나란히 도서관 계단을 막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카를라와 엘리샤의 손을 살살 잡아당기며 말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자. 어떻게 된 일인지는 가면서 설명해줄게. 이젠 말할 수 있거든.”
“엇, 네 주인님.”
“이젠 말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려줘야 할 거예요 얀델.”
아무렴. 나도 말하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그렇게 푹신한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별로 피곤하지도 않건만 으어어 거리는 좀비 소리를 내고 있던 것도 잠시.
엘리샤가 한숨을 내쉬며 엎드린 내 볼을 검지로 살살 찔렀다.
콕콕.
“얀델? 당신 덕에 마나 샤워를 받은 건 감사하지만, 아직 저희에게 말해줄 게 있지 않나요?”
“응? 아, 그렇지. 카를라? 너도 이리 와 봐.”
“앗! 네 주인님! 잠시만요!”
내가 대충 집어던진 짐을 가지런히 구석에 정리해둔 카를라가 총총총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엉덩이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으나 ,상체는 옆으로 틀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자세.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스윽 엘리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엘리샤? 너는 같이 정리 안 해? 전부 카를라한테 떠미는 거야? 그건 좀…너무하지 않아?”
“에? 네에?! 아, 아니거든요! 이번 주는 카를라 담당이라 보고만 있었던 거거든요?! 애초에 저희는 어지간한 생활 마법은 다 쓸 줄 알아서 두 명이나 허드렛일에 집중할 필요가 없거든요?!”
반쯤 장난으로 해본 말이건만 펄쩍 뛰며 부정하는 엘리샤.
그리고는 척! 하고 카를라에게 검지를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조금 전도 염력 마법으로 손쉽게 정리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직접 치운 거잖아요 카를라!”
“앗! 들켰어? 헤헤….”
“대체 왜 그러는 건가요?!”
“그야 주인님은 내가 주인님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좋아하시니까? 마법으로도 할 수 있지만, 직접 치우면 나중에 수고했다고 꼭 안아주시는걸!”
“…어? 진짜요?”
성난 고양이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엘리샤.
아닌 척 하면서도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제법 솔깃한 듯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엎드린 몸을 재차 뒤집어 정자세로 누운 뒤, 양옆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누워 봐.”
“넹!”
“흠흠. 당신이 그리 말한다면야.”
냉큼 한쪽 품에 안겨드는 카를라와, 멋쩍은 듯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눕는 엘리샤.
둘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자 양쪽에서 서로 다른 촉감이 전해진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쪽이건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좋은 느낌이지만.
“앞으로 자주 이러고 있을 테니까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 없어 카를라.”
“헉! 그럼 제가 청소하고 있을 때 슬금슬금 다가오셔서 뒤로 하는 기습 이벤트 같은 것도 없나요?”
“…카를라 네가 좋다면 굳이 그만둘 필요도 없고.”
“그럼 앞으로도 가끔씩 할게요 주인님!”
해맑게 웃으며 내 목덜미에 코를 비벼오는 카를라.
어느 순간부터 역으로 카를라에게 잡아 먹히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묘한 기분으로 어깨를 감싸던 손을 조금 내려, 카를라의 가슴을 쪼물대며 말을 이었다.
“엘리샤 너도 굳이 복잡하게 어떻게 하면 나한테 귀여움받을까 고민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안아 달라고 하면 돼.”
“그, 그건! 그건 좀 부끄럽지 않나요? 여자 쪽에서 직접 안아달라고 하다니…정숙하지 못해 보이잖아요.”
“아.”
노예 교육을 받았던 카를라와 달리, 아직 평범한 감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엘리샤.
확실히 이 시대의 관념은 조금 고리타분하긴 하지. 엘프는 그중에서도 유독 보수적인 종족이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잊었어? 엘리샤 너는 내 노예인걸.”
“맞아 맞아! 엘리샤 네가 잘 보여야 하는 건 주인님 뿐이라구!”
“으읏…!”
옆에서 키득대며 추임새를 넣는 카를라의 모습에 잠시 분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였으나.
이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잡아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몰랑몰랑.
이렇게 양옆에 둘을 끼고 가슴을 만지작대고 있으니 절로 행복함이 차오른다.
만약 여기에 페이까지 있었다면 그대로 행복사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혼자 헤실대고 있자니, 엘리샤가 다시금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샜는데, 빨리 마지막 괴담이 책인 이유나 말해주세요 당신.”
“아, 맞다.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네.”
이게 다 날 유혹하는 괘씸한 가슴 때문이다. 아무튼 내 탓은 아닌 듯!
은근슬쩍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찬찬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디 보자.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우선 마지막 괴담은 알아선 안 되는 괴담이 아니라, 알려서는 안 되는 괴담이야. 그래서 내가 이제야 말하는 거고.”
“아하?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네요. 그런데 정말 알리면 목숨이 위험한 건가요? 그만큼 강력한 저주면 만났던 다른 괴담들도 꽤 강해야 할 텐데.”
갸웃거리는 카를라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야. 죽지는 않아. 다만….”
“다만?”
“우리도 괴담의 일부가 돼서 이면 세계에 붙잡히게 되거든. 아마 교수님들의 다음 안정화 작업 때나 발견되어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별도의 준비 없이 갇히면…굶어 죽긴 하겠네요.”
“아, 죽진 않을 거야. 항상 아공간에 몇 년 치 식량을 쌓아두고 있거든. 그래도 굳이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지.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참고로 아카데미에 부여된 마법의 유지 보수는 3개월 단위로 이루어진다.
운 나쁘면 3개월 뒤에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소리.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현실에서는 어떨지 직접 실험해볼 용기가 나지 않지만, 크게 다를 건 없으리라.
“아무튼 말하지 못했던 건 그래서고. 이제 마지막 괴담의 정체에 대해서 말인데…애초에 고여있던 마력의 찌꺼기가 괴담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게 왜라고 생각해?”
“그야 첫 관측자 때문 아닐런지요? 본래는 형태 없는 단순한 힘의 덩어리였다고 했죠?”
“맞아. 공간 왜곡 마법의 틈새로 쌓인 잔류 마나 같은 거거든.”
“우연한 계기로 틈새 공간에 진입한 애덤스 길버트…아니, 길버트 애덤스라는 선배가 무의식적으로 13번째 계단 괴담을 떠올렸고, 그로 인해 괴담이라는 틀이 씌워진 게 아닐까 싶네요.”
애초에 마나란 의지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마나는 첫 관측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관측자가 한명 뿐이라면, 본인의 마나가 아니더라도 그 한명의 인식에 따라 크게 뒤틀리는 법.
게임에서는 안 나오지만, 아카데미 수업 중에 배운 내용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엘리샤도 마찬가지라 지체 없이 대답한 것이겠지만.
“사실 그게 아니란 말이지. 거기에 들어간 건 우리가 처음이야.”
“…네?”
“애초에 너희도 직접 경험해봐서 알잖아? 거긴 좀 기괴하긴 해도 강한 적은 없다는걸. 제작학부만 아니면 고생은 좀 해도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엘리샤가 오리너구리 박제를 처음 본 유럽 본토의 동물학자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얀델 당신이 책장 구석에서 발견한 그 책은 뭔가요. 누가 그런 걸 쓸 수 있다는 소리죠?”
“사실 나도 처음에는 영락없이 서명에 적힌 길버트 애덤스라는 선배가 쓴 줄 알았거든?”
나 뿐만이 아니다. 당시 히든피스를 찾아낸 유저를 비롯해, 많은 초기 유저들이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 사실이 있었으니.
“그런데 그거 알아? 이 아카데미의 어떤 기록에도 길버트 애덤스라는 사람이 존재했던 적은 없어.”
“…네?”
재학생, 졸업생, 직원, 심지어 외부 상인들까지.
30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운영된 아카데미지만, 전 대륙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철저한 계획 하에 굴러갔기에 각종 기록이 완벽히 보관되어있다.
나중에 다른 퀘스트 때문에 기록실에 들어갔을 때, 쓸데없이 세세한 인명록이 구현된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었는데….
누군가는 이를 하나하나 읽어보며 그 안에 길버트 애덤스라는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아내더라고.
물론 이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나는 수상한 비밀 결사의 마지막 후예라는 착각을 받는 상태.
사교도 절멸이 목적인 조직이라면 아카데미에도 당연히 정보원을 심어뒀을 거라 생각한 걸까.
카를라와 엘리샤는 의아해하거나 의심하는 대신 깜짝 놀라며 되물을 뿐이었다.
“그럼 대체 그 책은 누가 쓴 거예요 주인님?!”
“책이 마지막 괴담이라고 했죠? 그럼 설마…?”
어버버한 둘의 모습에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괴담에 관심 있다면 다들 어렴풋이 알 거야.”
느닷없이 수상한 부적을 건네는 노인, 재밌는 소문을 들려주는 친구, 수상쩍지만 시선을 끄는 귀물.
언제나 괴담 속에는 괴담의 존재와 불길한 결말을 예고하는 존재가 있다는걸.
“피해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기어이 괴담 속으로 끌어들이는 존재. 그게 [마법으로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들에 관하여] 라는 책이고, 마지막 괴담의 정체야.”
“그, 그럼 갈 곳을 잃은 마나가 괴담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던 건 어째서인가요?!”
“글쎄. 사람이 아닌 것의 의지가 개입된 게 아닐까? …예를 들면 진짜 괴담 속 귀신들이라던가 말이야.”
“…….”
“…….”
할 말을 잃은 두사람.
하긴. 나도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는 진짜 얼떨떨했지.
도서관의 히든피스는 판타지 세상의 괴담을 비꼬는 그런 내용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건만.
사실은 돌고 돌아 은근 섬뜩한 진짜 괴담이었을 줄이야.
오들오들 떨며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 카를라와 엘리샤의 감촉을 즐기며, 옆으로 치워뒀던 알람을 다시 꺼냈다.
띠링!
오들오들 떨며 내 품속으로 파고드는 카를라와 엘리샤의 감촉을 즐기며, 옆으로 치워뒀던 알람을 다시 꺼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