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21화 (121/230)

건물 사이를 배회하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고장 난 골렘.

밟으면 저항할 새도 없이 다른 세상으로 끌려가는 13번째 계단.

자신에게 부족한 장기를 채워넣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인체 모형.

원본이 죽을 때까지 거울에 비친 대상의 도플갱어를 뱉어내는 전신 거울.

그리고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마지막 괴담.

묘하게 익숙한 라인업이다.

게임 플레이 당시에는 이거 초등학교 때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학교 7대 불가사의의 오마주라며 좋아했었는데.

에우렐리아 대륙에서 살아가는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야설 코너에서도 느낀 건데,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보더라고.

아무튼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상당히 무시무시해 보이지만…꼭 그렇지만도 않거든.

우선 귀신이건 나발이건 마법을 맞으면 꼼짝도 못 한다.

결국 마법적인 현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거기에 이 공간에서 나오는 괴담들은 진짜 귀신조차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형태를 가지지 못한 무형의 에너지 찌꺼기가 괴담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것뿐이니까.

따라서 그 힘이 대단하지도 않고, 지능조차 없는 현상에 가까운 녀석들이다.

“그래도 평범한 학생들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건 사실인데…우리가 평범한 수준은 아니잖아?”

“하, 하지만 감수성은 평범하답니다! 뭔가요 저 징그러운 놈은!”

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신성학부 건물.

그 안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저 끝에서부터 달려오는 인체 모형의 모습에 엘리샤가 기겁했다.

하기야. 모형의 딱딱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긴 해도, 진짜 사람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부드러운 근육과 장기를 내비치는 모양새니 무섭긴 하겠지.

나 또한 모니터 너머로 볼 때와는 수준이 다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깜짝 놀랐고.

하지만.

“차가운 얼음이여. 날카롭게 이를 갈아라. 너는 단단한 송곳니이니.”

허공에 생성된 큼직한 얼음송곳이 정확히 모형을 조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동어.

“아이스 팽!”

쐐애애액!

빠르게 쏘아진 얼음송곳이 그대로 모형의 가슴을 꿰뚫었다.

퍽!

바위 마법 다음으로 저지력이 좋은 마법답게 순간 주춤한 모형.

물론 애초에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지라 이 한방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었지만…중요한 건 이렇게 마법이 통한다는 사실이다.

저 멀리서부터 질척질척한 핏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잡은 것도.

갑자기 툭 튀어나와 우리를 놀래키듯 달려드는 것도.

마지막으로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견도.

하나같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어찌 됐건 쓰러뜨릴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잔뜩 긴장했다가, 생각보다 만만한 모습에 맥이 풀린 카를라와 엘리샤에게 턱을 까딱였다.

“뭐해? 내가 했던 말 잊었어? 일단 마법부터 날리고 보면 된다니까?”

“넹!”

“아, 알고 있거든요?!”

쐐애애애액….

퍽! 퍼벅!

그날. 인체 모형은 얼음송곳 4개를 더 받았다.

여름이었다.

인체 모형은 얼음송곳에 산산이 부서져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쉽네요?”

“예에. 무섭긴 한데 이렇게 보니까 별거 아니네요? 몬스터로 치자면 오크 정도?”

쓰러진 잔해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와 엘리샤.

참고로 오크는 처음 카를라와 들어간 던전의 몬스터인 빅 마우스보다 약한 녀석들이다.

여럿이서 뭉쳐 다니는 탓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조금 더 높겠지만.

“말했잖아. 이상할 정도로 기괴하게 느껴지긴 해도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이곳의 모든 존재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를 자극하지만…그뿐이다.

갈 곳을 잃은 힘이 괴담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긴 했으나, 애초에 괴담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그리 강력하지 않기 때문.

무서운 귀신? 기운이 담긴 공격을 맞으면 강제로 성불 당한다.

강력한 요괴? 그게 몬스터랑 뭐가 다른가.

에우렐리아 대륙에도 이런저런 무서운 이야기나, 소름끼치는 민담들이 많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의 끝은 퇴치로 이어진다.

“대충 알겠지? 그럼 이제 나머지 괴담을 찾아서 마저 해치우자고.”

“네! 그런데 주인님 말씀만 들어보면 여긴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존재가 드러나지도 않고, 심지어 위험하지도 않은 곳 같은데…굳이 공략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지당한 의문이다.

가만 놔둬도 문제없는 곳이라면 사서 고생할 필요도 없으니까.

“당연히 이득이 되니까 그런 거지. 생각해 봐 카를라. 이 모든 것이 중첩된 공간 마법이 만들어낸 여파잖아? 마력 덩어리란 말이지.”

“그렇…죠?”

“지금이야 괴담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우리가 그 껍데기를 전부 부수면 어떻게 되겠어?”

“으음. 고여있던 마나가 주변으로 퍼져나가겠죠. 다른 현상이 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리됐을 테니까요.”

“맞아. 우리를 중심으로 300년간 쌓인 마나가 확산하는 거야.”

“아! 마나 샤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성을 내지르는 카를라.

마나 샤워.

말 그대로 대량의 마나를 뒤집어쓰는 행위다. 보통은 꽤나 위험한 짓이기도 하고.

적정량의 마나가 천천히 스며들면 이는 대부분 좋은 변화를 일으킨다.

단순한 은이 진은이라 불리는 미스릴이 되고, 인간이 기사나 마법사가 되어 초인의 영역에 다다르는 것처럼.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막대한 마나에 노출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변이가 강제적으로 일어나니까.

대표적인 경우가 몬스터다.

악신에게 귀의하기 전에도 몬스터는 존재했는데, 이들의 기원을 먼 과거에 모종의 이유로 일어난 대규모 마나 샤워라 주장하는 가설도 있을 정도.

처음부터 몬스터가 있었다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전에 멸종했을 거라나 뭐라나.

…어라? 이렇게 말하니 마나가 무슨 방사능 같네.

아무튼 마나 샤워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스스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마법사나 기사에게 마나 샤워는 일종의 경험치 이벤트.

단번에 마나를 왕창 쌓을 수 있는 찬스 아닌가.

보상을 명확히 알게 된 덕인지, 카를라와 엘리샤가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제 하나 쓰러뜨렸으니 남은 건 6개죠 주인님?”

“마지막 하나는 적혀있진 않지만…얀델 당신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요.”

비밀 결사 출신이라는 착각을 바로잡지 않길 잘했네.

좀 미안하긴 해도 이렇게 이야기가 척척 진행되니 엄청 편하잖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단번에 나머지를 처리하러 가자고!”

***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 피눈물을 흘리며 주변에 저주를 흩뿌리는 초상화.

환각, 두통, 예민함, 평형감각 상실 등 온갖 디버프를 거는 저주 종합 세트 같은 녀석이다.

최종적으로는 저주에 노출된 상대를 자살로 몰아간다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별도의 방호 없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저항할 수 있는 출력이다.

그래서 멀리서 파이어 볼로 불태웠다.

다음은 동아리 실로 향하는 길에 만난 골렘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고장 난 골렘.

덩치와 소재로 보아 꽤 강력한 녀석이긴 했는데….

나랑 엘리샤가 발목을 잡는 사이, 카를라가 중급 마법으로 지면의 균열을 일으켜 녀석을 구덩이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셋의 다굴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한 채, 뼈대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다음은 동아리실에 비치된 류트.

스스로 현을 퉁기며 주변에 환각 마법을 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눈 감고 때려 부쉈다.

몸체는 평범한 나무 소재라 강하게 땅에 내려치니 망가지더라고.

다음은 조금 떨어진 로비에 설치된 거대한 전신 거울.

거울에 비친 대상의 도플갱어를 끝없이 뱉어내는 위험한 물건이지만….

사람이 온전히 비쳐야만 도플갱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헬레나에게 받은 수녀복으로 얼굴과 상체를 가린 채 접근해서 스태프로 찍었다.

유사시에 둔기로도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스태프답게 한방에 산산조각 낼 수 있었다.

다음은 13번째 계단.

이미 이면 세계에 진입한 터라, 굳이 시작 지점인 도서관까지 갈 필요는 없다.

아무 곳에서나 12개짜리 계단을 오르며 세보면 13번째 계단이 나타나니까.

그래서 마법으로 흙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다.

갑자기 생겨난 13번째에 발을 내딛기 전에 마법을 해제했다.

13번째 계단도 덩달아 휩쓸려 무너져내렸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라고는 기껏해야 2시간 남짓.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마지막 괴담뿐이다.

“주인님 주인님! 이제 하나 남았네요!”

“대체 마지막 괴담이 뭔가요 당신. 이제 슬슬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는지요?”

“응. 아냐. 이건 말 못해.”

내 단호한 대답에 얼빠진 표정이 된 카를라와 엘리샤.

“그런 눈으로 봐도 안 돼. 진짜로 말 못하거든.”

7개의 불가사의를 전부 알게 되면 죽는다. 그러니 마지막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괴담 책에는 그리 적혀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괴담이 아니다.

절대 알려서는 안 되는 괴담이지.

애초에 알아선 안 되는 괴담이면 난 이 세상에 떨어진 첫날에 급사했겠지.

“뭐…멀리 갈 필요는 없으니까 바로 보여줄게.”

“네? 방금 안 알려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조금 시무룩해진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의 모습에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허리춤에 끼워뒀던 괴담 책을 꺼냈다.

그리고.

“틴더.”

화르륵.

그대로 불을 붙였다.

“어? 어어?”

“얀델? 그건 왜…설마?”

당황한 카를라와 엘리샤.

불이 붙긴 했어도 책이 완전히 불탄 건 아니라 아직 말하지 못한다.

대신 고개를 까딱이며 그다음을 이야기했다.

“다들 준비해. 흡수할 수 있는 만큼은 흡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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