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20화 (120/230)

“아, 말해주는 걸 깜빡했네. 별거 아냐. 3층의 13번째 계단을 밟으면 돼.”

“네? 그건 너무 간단한 거 아닌가요?”

“응. 근데 진짜 이거 맞아. 처음에 적혀있던 문구 기억해?”

“절대 자신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마라. 하지만 가능하다면…해결해 달라?”

“바로 그거야. 그래서 이렇게 귀찮게 숨겨뒀지만,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게 안배해둔 거거든.”

“얀델 당신은 처음부터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흠흠…그 부분은 비밀이야.”

“…그렇겠죠. 아마 앞으로도 많은 비밀이 있겠죠. 그저 언젠가는 제게 전부 알려주세요. 그거면 된답니다.”

“…….”

아마 엘리샤는 내가 무슨 비밀 조직의 유일한 후계라 착각해서 하는 말이겠지.

하지만 내가 숨기고 있는 건 그보다 더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조금 씁쓸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것도 잠시. 돌연 카를라가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주인님 주인님.”

“응응. 왜 그래 카를라.”

“분명 3층으로 가는 13번째 계단이라고 하셨죠?”

“맞아. 거기가 입구야.”

“그치만 여기가 3층인데…계단이 12개뿐인 걸요?”

아주 좋은 질문이다. 도서관 히든 피스의 테마가 괜히 괴담이 아니거든.

“카를라. 엘리샤. 이제 슬슬 이거 한번 읽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여기까지 들고 온 괴담 책을 팔락이자 의아한 기색으로 반문하는 둘.

“내용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예에. 대충 본 거긴 하지만 아카데미의 7대 불가사의라는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써놓은 내용 같았습니다만.”

“여기까지 다다르는 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 뿐, 이 너머에서는 꽤 중요하거든. 어디 보자…여기 이 부분 좀 봐봐.”

책장을 펄럭이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멈춰섰다.

“13번째 계단…?”

“응. 그게 이거야.”

본래 12개 밖에 없지만, 계단을 오르며 숫자를 세보면 어째서인지 13번째 계단이 있고.

이를 밟으면 저세상으로 끌려간다는 익숙한 괴담.

“조금 다른 점은 저세상이 아니라 결계? 아공간? 대충 그런 곳으로 끌려간다는 거려나?”

“어, 음…제가 주인님을 믿긴 하지만 공간 마법이라는 게 복잡한 계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거라, 그리 간단히 오류가 나는 게 아니거든요….”

난감해 하는 카를라.

한 손에는 그런 카를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엘리샤의 손을 잡고 계단 앞에 섰다.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그리고는 가로로 이어진 채, 한 칸 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

.

.

.

.

열둘.

그리고 열셋.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반전했다.

하나.

둘.

셋.

넷.

.

.

.

.

.

열둘.

그리고 열셋.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세상이 반전했다.

아직 태양이 떠 있어 밝았던 실내는 한밤중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컴컴하게.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거울 속에 비친 세상을 연상시키듯 좌우가 뒤바뀌었으며.

건물은 수십 년간 방치된 폐허처럼 여기저기가 부서져 그 잔해가 바닥을 나뒹굴고.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보이던 무수히 많은 학생들도 전부 사라졌다.

지금 이 어두컴컴한 도서관에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셋뿐.

겨우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일어난 기괴한 현상에 엘리샤가 펄쩍 뛰었다.

“뭐, 뭔가요 이건?!”

“진정해. 그리고 조용히 해. 우리가 여기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생각이야?”

“…여기에 저희 말고 뭐가 더 있는 건가요?!”

작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는 위업을 달성하며 오들오들 떠는 엘리샤.

하긴. 여기 분위기가 좀 음산하긴 해.

딱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폐건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반면 카를라는.

“주인님.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와 엘리샤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잠깐의 중얼거림 끝에 이어지는 시동어.

“배리어.”

우웅.

반투명한 방어막이 우리 주변을 뒤덮는다.

개인에게 걸리는 실드와는 달리 영역 자체를 커버하는 광범위 방어 마법.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리라.

급변한 환경에 무서워한다기보다는 싸울 준비부터 하는 카를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잘했어. 그래도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는 마. 여기엔 우리가 위험해질 정도로 위험한 놈들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인가요 주인님?”

“말했잖아? 아공간 같은 곳이라고.”

“아공간이요? 그럼 누가 이런 공간을 만들어서 숨겨뒀다는 건가요?”

“으음…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여긴 예상치 못하게 생긴 사고 같은 공간이거든.”

여전히 주변을 경계 중인 카를라와, 이제 좀 진정했는지 슬쩍 완드를 꺼내는 엘리샤.

둘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가 부지 자체도 넓지만…실사용 공간은 그보다 더 넓은 거 알지?”

에우렐리아 대륙은 공간 왜곡 마법이 널리 쓰이고 있다.

물론 보편 됐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앞에 고급이 붙는 것들에나 적용되는 수준이니까.

예를 들면 고급 마차, 고급 여관, 고급 가방, 고오급 레스토랑 등등.

예외가 있다면 아공간 주머니 정도?

이건 수요가 높기 때문인지 성능을 낮추는 대신, 가격도 낮춘 보급형이 꽤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용량의 차이는 있지만 너도나도 아공간 주머니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는 거고.

“사실 공간 마법이 그리 간단한 마법은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공간 왜곡을 여기저기에 쓰는 건….”

“외부 소환 마법이 금지당했기 때문이죠.”

“정답이야.”

카를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흐헤헤….”

딱딱하게 굳어있던 카를라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말을 이었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소환하는 건 소환 대상과의 연결고리만 있음 충분하지만…그 소환 대상을 찾으려면 시공 마법에 조예가 깊어야 하잖아?”

이미 낚싯줄을 걸어놓은 물고기는 망망대해에서도 줄만 잡아당기면 잡아 올릴 수 있지만.

그런 거 없이 바다에서 특정 물고기를 잡으라면 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진다.

주변 생태를 조사하여 목표 물고기의 서식지를 특정하고, 그 안에서도 정확히 물고기를 낚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니까.

이걸 정령에 적용하면 원하는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정령계 자체에 대한 이해와, 원하는 위치에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셈.

자연스레 다른 차원…그러니까 다른 시공간에 간섭하는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를라 말대로 외부 소환 마법은 신들의 전쟁 이후로 금지됐지. 그럼 그 소환사들이 다 어떻게 됐겠어.”

실반 마탑처럼 다른 계통 마법으로 갈아탄 마법사들도 있겠지만….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이들의 대부분은 전공을 살려, 공간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공간 마법이 걸린 마도구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됐으니까.

내 말에 카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여기저기에 공간 왜곡 마법이 쓰이기 시작했고, 아카데미도 예외는 아니라고 들었어요.”

아무리 혹시 모를 악신의 강림을 막기 위한 것이라지만, 수많은 소환사들이 평생의 목표를 빼앗긴 셈이다.

이들을 달래기 위한 보상책이 필요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아카데미 건설에 소환사들을 대거 고용하는 것.

“덕분에 아카데미는 정말 온갖 곳에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있는 거야. …그게 문제가 됐지만.”

처음에는 괜찮았다.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 구조였으니까.

그렇기에 공간 왜곡이 걸린 건물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 300년간 아카데미는 계속해서 발전하며 증축을 반복해왔다.

실력 있는 교수들이 최대한 마법이 엉키지 않도록 노력한 덕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자잘한 문제는 꾸준히 있었다는 소리지. 여긴 그 자잘한 문제들이 모이는 틈새 같은 거고.”

공간과 공간의 틈새. 있을 리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면세계.

괴담 책 저자 서명에 적힌 역순으로 된 성과 이름은 이곳의 특수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내 설명을 전부 들은 엘리샤가 어느새 진지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법 위험한 곳 아닌지요? 물론 다 생각이 있겠지만, 당신 말대로라면 여긴 던전 비슷한 곳이잖아요.”

“괜찮아. 내가 좀 거창하게 말하긴 했는데, 결국은 자잘한 찌꺼기가 모였을 뿐이거든. 무엇보다….”

손에 든 괴담 책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린 선배님이 정리해둔 공략집이 있잖아?”

“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꽁꽁 숨겨져있을뿐, 그다지 위험한 히든피스가 아니다.

위험했으면 진작에 다른 교수님들이 주기적으로 행하는 안정화 작업 때 걸렸겠지.

대신 그만큼 보상이 미묘하긴 한데…그래도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업적으로 인정되어 스탯 성장도 노려볼 수 있고.

“다들 딱 하나만 기억해 둬. 무엇을 보건, 겁먹지 말고 일단 마법부터 갈겨.”

예로부터 화력은 가장 확실한 퇴마 수단이었으니까.

***

괴담 책에 등장하는 괴담은 총 7개다.

피눈물을 흘리며 주변에 저주를 흩뿌리는 초상화.

스스로 현을 퉁기며 헤어 나올 수 없는 환각 마법을 거는 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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