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정말?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이오나를 바라보자 키득이며 끄덕인다.
“진짜야 진짜야. 마지막으로 직접 피를 빤 게 벌써 300년 전이거든! 오랫동안 수혈팩으로만 피를 마셨더니 그렇게 됐어!”
“허어….”
어이없어하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이오나.
“그렇다고 해서 교수님 상대로 엄한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안 했거든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이오나가 귓가에 들이밀었던 고개를 떨어뜨린다.
“맞아 맞아! 방금 건 얀델 학생이랑 교수님 사이의 비밀이다?”
“그런 걸 퍼뜨리고 다닐 정도로 생각 없진 않습니다.”
“응응! 나랑 얀델 학생 사이니까 믿을게!”
“저랑 교수님 사이가 뭔데요?”
“…편애받는 제자와 편애하는 교수 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이오나.
저번에 엘리샤를 사러 갔을 때처럼, 필요하면 언제든 편의를 봐주겠다는 듯한 뉘앙스.
만약 게임이었다면 호감도가 80%는 넘었을 것 같은 대사다.
뭐, 이오나는 공략 불가 캐릭이라 호감도를 아무리 높여봤자 별다른 이벤트도 없었지만.
***
이오나와는 간단한 잡담을 조금 더 나누다가, 오늘 만난 일은 비밀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혹시나 해서 이오나가 빌려 가려던 책의 내용을 슬쩍 훑어봤지만 진짜 별거 없더라.
단순히 분홍 머리의 가슴 큰 히로인을 주우며 일어나는 우당탕탕 대소동 같은 느낌?
이후에는 본래 계획했던 대로 마저 카를라와 엘리샤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러면서 중간중간에 다른 책들을 좀 둘러보기도 했는데, 확실히 흥미롭긴 하더라.
나의 음란한 드래고니안 메이드, 여보로 천하통일, 실수로 합성한 키메라가 너무 야한 건에 관하여 등등.
묘하게 익숙한 느낌의 제목들이 종종 보였는데….
아쉽게도 판타지의 판타지 같은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장르는 없었다.
하기야. 지구도 근대에 들어서서야 판타지스러운 작품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현대에 이르러서야 내가 아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정립됐었다.
아직 이 시기의 에우렐리야 대륙은 거기까지 장르가 발전하지 않았다.
다만, 내겐 똑같은 판타지긴 해도 여기 사람들에겐 현대물 같은 거라 그런지 묘하게 현실감이 넘쳤다.
저번에 경매장에서 느꼈던 엘프에 대한 로망은 사실 다른 종족에도 하나씩 있더라고.
치녀 엘프가 인간 가문 하나를 대대로 따먹는 야설이라던가.
수인족을 진짜 애완동물처럼 기르는 야설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신기하게도 몇몇은 지구에서 봤던 장르나 소재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모든 남자가 정체불명의 병으로 다 죽고, 여자만 남은 세상에서 주인공 혼자 남자인 설정을 봤을 때는 반갑기까지 하더라.
그래…남자 놈들 하는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지만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으니.
대표적으로 드워프들을 위해 쓰인 야설이 그러하다.
대체 전신 희귀 금속으로 이루어진 고대 생물체를 광산에서 캐내, 부족의 공공재로 쓰는 내용의 어디가 야한 거지?
상황 자체가 야한 건 알겠다. 그런데 반짝이는 금속의 광택이나, 단단한 경도 같은 걸 묘사해도 와닿질 않는다고!
카를라 말로는 드워프 야설 중에서도 꽤나 마니악한 부류라는데…페이는 평범하게 살과 뼈로 이루어진 나로 흥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더라.
아무튼 그렇게 한참 동안 도서관 데이트(?)를 즐긴 끝에 각자 책 한 권씩 챙겨서 미로를 빠져나왔다.
“주인님. 오늘은 책에 나온 플레이를 직접 해보는 건 어떨까요?”
“좋지. 근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넹? 아, 여기까지 와서 야설만 빌려 가는 것도 좀 그렇긴 하네요. 따로 필요하신 책이 있나요? 알려주시면 제가 골렘보다 먼저 찾아올게요!”
“골렘 상대로 질투하는 건 좀 귀엽긴 한데 그럴 필요는 없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거든.”
“힝…아까워라. 그나저나 대체 무슨 책이신데 그렇게 기대하는 얼굴이신 건가요 주인님?”
“그러네. 장르부터 말해주자면….”
한차례 운을 떼고서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괴담이려나?”
이제 히든 피스를 챙길 차례다.
요즘도 그럴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어린 시절에는 어느 초등학교를 가나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몇 있었다.
유독 친근한 젊은 선생님, 학교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어둠의 듀얼이라며 카드를 뺏어가는 무서운 형, 그리고 7대 불가사의.
여기서 중요한 건 7대 불가사의다. 7개 전부를 알면 죽는다는 바로 그 괴담 말이다.
초등학교만 서너번이나 전학해 본 덕에 알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놈의 7대 불가사의는 죄다 비슷비슷하더라고.
일단 우리 학교는 원래 공동묘지였다, 혹은 정신병원이었다는 프롤로그를 깔고 시작하며.
마지막은 언제나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마지막 괴담으로 끝난다.
당시에는 오들오들 떨면서 무서워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이야기다.
학교가 다른데 겹치는 괴담이 그렇게 많다고? 귀신이 투잡이라도 뛰나?
심지어 어떤 곳은 무용실이 없는데 무용실에 관한 괴담이 있는가 하면, 7대 불가사의라고 해놓고 괴담이 8개인 곳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나 유행하지 중학교만 가도 학교 괴담을 두려워하는 아이가 없는 것도 이런 허술함이 한몫했을게 분명하다.
아무튼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도서관에 숨겨진 히든 피스가 괴담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카를라. 아카데미 7대 불가사의라고 들어봤어?”
무슨 책을 찾냐고 물어봤더니, 뜬금없이 괴담이니 7대 불가사의니 하는 대답을 한 탓일까.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귀엽게 깜빡이며 되물었다.
“7대 불가사의라면…설마 제가 아는 그 엉성한 괴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인님?”
“응. 맞아 그 장난 같은 괴담 말이야.”
“으음…도서관에는 선배들이 만들어 기증한 책도 있으니 괴담 모음집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그리고 흥미 위주로만 본다면 꽤 재밌기도 하구요.”
“아냐. 난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파헤쳐볼 생각이야.”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했는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카를라.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줄까 고민하는 어른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으…주인님? 괴담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예요. 애초에 이렇게나 많은 사제님이 상주하는 아카데미에 귀신 같은 게 나올 리 없잖아요?”
“그렇겠지. 설령 나온다고 해도 고스트 형 몬스터는 마법이나 오러로 쓰러뜨릴 수 있으니 걱정할 거 없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아리송해졌는지, 이번에는 엘리샤가 푸른색 롤빵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머? 잘 알고 있네요 얀델. 그럼 괴담을 실제로 파헤쳐본다는 것도 다른 뜻이 있는 거겠지요?”
“아,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 맞아.”
“???”
서로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이내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와 엘리샤.
귀여워라.
“아카데미 7대 불가사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지만…그렇다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건 아니거든. 직접 체험해본 일부 선배들이 남긴 경고지.”
다시 돌아온 도서관의 중앙. 높게 솟은 원형 책장의 가장 아랫 줄에서 얇은 책 하나를 꺼냈다.
“보면 알 거야. 굳이 밤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거든.”
책 제목은 [마법으로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들에 관하여]
검은색 바탕에 하얀 제목하나 덩그러니 쓰여 있는 표지를 넘기자 손글씨로 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디 이 책을 본 후배들은 나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나, 만약 네가 능력 있는 후배라면 내가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주길 바라며.
-내가 지난 4년간 겪은 불가사의한 현상들에 관하여 기록을 남긴다.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책.
이후로는 7개의 괴담이 체험담 형식으로 담담히 나열되어있다.
처음 H&A를 플레이하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는 꽤 설렜다.
척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내용 아닌가.
그래서 한동안 괴담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가 죽치고 기다려 본다거나,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해보는 등 온갖 짓을 다 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게임 내 시간으로 한 달가량을 소모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괴담 책은 수상쩍었다.
게임 속 도서관의 모든 책장을 뒤져봐도 나오는 거라고는 초심자를 위한 팁, 그리고 간단한 세계관 설정 같은 것들 뿐이었다.
오로지 괴담 책만이 게임 플레이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
어쩔 수 없이 1회차는 공략을 보지 않고 플레이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깨고, 공략 카페에 검색해본 결과.
“이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야. 가장 마지막에 있는 저자를 봐.”
“3학년 13반 애덤스 길버트…으응?”
“뭐야 벌써 알아챘어?”
“네 주인님. 아카데미는 반을 숫자로 나누지 않잖아요. 그런데 13반? 수상하네요.”
“이제 보니 이름도 좀 이상하군요. 이름과 성의 순서가 뒤바뀐 것 아닌지요?”
“아! 그러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셨으니 이 저자는 무슨 암호 같은 거 아닐까?”
“키워드만 놓고 보면 3, 13, 그리고 역순이려나요.”
힌트를 주자 척척 알아서 추리해가는 카를라와 엘리샤.
…난 저거 보고도 한동안 뭐가 이상한지 눈치 못 챘는데.
뭐, 지구에서는 숫자로 반을 나누는 게 평범한 일이라 익숙함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내겐 대수롭지 않은 반 표기이나, 아카데미만 다녀본 둘에게는 아니잖은가.
양팔로 이런저런 추측을 교환하는 둘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위아래로는 풍만해도 허리는 가는 탓인지 쏘옥 안기는 둘.
특유의 청량한 체향과, 풀 냄새를 닮은 체향이 뒤섞이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흐헤헤…”
“뭐, 뭔가요 얀델. 여긴 사람 많아서 좀 부끄러운데요.”
마냥 좋다는 듯이 헤실대는 카를라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떨어지진 않는 엘리샤.
상반되지만 비슷한 둘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턱을 까딱였다.
“답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너희 힘이 필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 이다음이니까.”
“헉! 주인님 주인님. 혹시 이거 상 받을 수 있는 찬스인가요?”
“상이라니…뭘 부탁하려고?”
“그건 당연히 비밀이죠!”
“노예가 뭐 이리 주인에게 숨기는 게 많아? 하지만 귀여우니 봐줄게.”
“헤헤.”
“엘리샤 너는 어때?”
아직도 주변의 힐끔거림이 신경 쓰이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엘리샤였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부채를 촤악 펼쳤다.
“카를라가 할 수 있다면 저도 할 수 있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제 활약상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세요 당신.”
그리고는 슬쩍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뭐어…상을 주고 싶으면? 줘도 된답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도 비밀이야?”
“당연하죠.”
“어째 공수표만 남발하는 것 같아 좀 몬가 몬가인데…상관없겠지.”
엘리샤에게도 잘하면 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가보자고.”
괴담 책을 들고 다 같이 도서관 입구 쪽으로 향했다.
***
애초에 도서관 중앙에서 출발한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입구.
당연한 말이지만, 이대로 빌려서 나가려는 건 아니다.
단순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온 거지.
“얀델? 이쯤 되면 슬슬 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대체 조금 전의 그 저자는 무슨 암호였던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