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18화 (118/230)

미로의 약도, 장르 별로 나눠진 구간, 길을 잃었을 때 빠져나가는 법, 마지막으로 초심자를 위한 추천 도서들까지.

세상에…대체 얼마나 야설에 진심인 거냐고.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더라.

나처럼 마음껏 밤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카데미에서 붙여준 시종은 물론이요, 집안에서 데려온 시종이라 해도 함부로 손대기가 힘들다.

보통은 그 가문을 오랜 시간 보필해온 가신 가문의 자제가 시종을 맡으니까.

물론 대귀족이라면 두 명의 시종 중 한 명을 처음부터 성처리용으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세 있는 가문, 그것도 남자에게만 통용되는 일이다.

아무래도 정조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이 세상의 특성상, 여인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 건 상당한 디메리트니까.

뭐, 결혼 이후에는 좀 느슨해진다지만…아카데미에 기혼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학생들 중에서 성욕을 풀고 싶을 때 풀 수 있는 사람은 한 줌의 귀족 남학생뿐.

나머지는 혼자 어떻게든 처리하고 있겠지.

안 그래도 한창때인 나이에 일주일의 대부분을 아카데미에 갇힌 채, 또래 이성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에게 이는 꽤 치명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지구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 야동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남는 방법이라고는 야설뿐.

이상할 정도로 방대한 야설코너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여길 찾는 이유는 그래서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의 내용을 한 번도 확인하고서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좋아. 다 기억했으니까 이제 들어가자.”

“네! 아, 주인님 제가 읽을 책도 빌려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해. 어차피 A반은 대출 한도가 넉넉하니까. 엘리샤 너도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몇 개 빌릴래?”

“흠흠. 얀델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거절하진 않을게요.”

아닌 척하면서도 입꼬리가 움찔대는 것이 꽤 기대되나 보다.

하기야.

카를라도 아카데미에서 쫒겨난 이후로 처음 와보는 도서관이고, 엘리샤도 이제 막 재미 붙여 보려는데 노예로 팔려나간 셈 아닌가.

오늘 하루는 둘에게 맞춰주는 것도 괜찮겠지.

“천천히 둘러보면서 가자고. 저번에 엘리샤가 재밌게 읽은 것 같다는 책 제목이 뭐였지 카를라?”

“100일 뒤에 암캐가 되는 영애요!”

“카, 카를라?! 당신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요!”

“그야 나도 봤으니까? 아, 그거 2권도 있는 거 알아?”

“…진짜요? 어떤 내용인지 살짝만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멜리나는 이미 조교 당해서 더는 쓸만한 내용이 없을 텐데.”

“흐흐…멜리나는 그렇지. 하지만 멜리나의 여동생이라면 어떨까?”

“헛! 초반에 잠깐 서로 이름 부르며 헤어진 그 여동생 말인가요?!”

“맞아 맞아.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히는 말 못하겠는데…대충 어떤 느낌인지 상상은 가지?”

붕 붕 붕.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둘이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그 주제가 야설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뭐 어때.

둘이 좋으면 좋은 거지.

가끔 이렇게 예전의 사이 좋았던 모습이 나오는 게 은근 흐뭇하더라고.

하지만 지켜만 보는 건 아깝다.

둘 사이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양손으로, 카를라와 엘리샤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이게 바로 백합에 남자 난입…!(아님)

“그 책이 그렇게 재밌어? 나도 한번 읽어볼까?”

“으음…아무래도 여주인공 시점이라 주인님은 조금 몰입하시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냥 너희랑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지.”

“헉…갑자기 주인님한테 뽀뽀하고 싶어졌어요.”

대충 그런 느낌으로 가볍게 잡담하기도 하고, 중간에 재밌어 보이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면 꺼내서 조금 읽어보기도 하며 느긋하게 나아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하드한 장르가 배치된 구조상, 슬슬 순애물이 끝나고 조교가 가미된 소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무렵.

유독 눈에 띄는 책 한권이 있었다.

[자칭 천재 마법사를 주웠다]

굳이 줄이자면 자칭천마려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이끌림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

텁.

“어?”

“응? 응응?”

나보다 한발 빠르게 책을 쥔 사람이 있었으니.

하얗다 못해 창백한 손등. 그 위에 겹쳐진 내 손을 뗄 생각도 못 하고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오나 교수님이 왜 여기 계세요?”

“아마 아마! 얀델 학생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어?”

“응? 응응?”

하얗다 못해 창백한 손등. 그 위로 겹쳐진 내 손을 뗄 생각조차 못 하고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오나 교수님이 왜 여기 계세요?”

“아마 아마! 얀델 학생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나만 당황한 건 아닌지,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오나.

피를 연상케 하는 진한 검붉은 머리카락. 다소 서늘하지만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

마지막으로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드러난 길쭉한 송곳니까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어째서인지 이오나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깜짝 놀란 핏빛 눈동자가 순진함과 교태를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즐겨 입던 헐렁한 옷이 흐트러지며 쇄골이 살짝 드러났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카를라와 엘리샤도 이오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리는 아찔한 마성.

지금껏 이오나가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흡혈귀의 종특인 매료가 살짝 풀린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황급히 손등에서 손을 떨어뜨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량이 워낙 많다 보니, 체내를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상태 이상에 저항할 수 있으니까.

“…앗!”

내 마력의 유동을 느낀 건지 이오나가 아차한 표정으로 기세를 갈무리한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묘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이내 이오나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뭐야? 이런 데서 교수님을 만나니까 막 이상한 생각이 들고 그래? 응?”

“…조금요? 혹시 혼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거든요.”

“아하핫! 얀델 학생도 성인인데, 야한 책 좀 봤다고 혼내진 않아!”

평소처럼 푼수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이오나. 하지만 자기도 실수했다는 걸 아는지 얼굴이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상태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이오나가 나한테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닐 테니, 꽤나 부끄러운가 보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를라와 엘리샤가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되찾았다.

“교수님?”

“이오나 교수님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그게 그게…아까 말했잖아? 아마 너희와 비슷한 이유라고.”

그리고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자칭 천재 마법사를 주웠다]

“재밌어 보이는 책이 있어서 빌려보려고 했지.”

“앗.”

“아.”

이오나의 태연한 대답에 머쓱해 하는 카를라와 엘리샤.

하기야.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겠는가. 우리가 그러하듯 이오나도 야한 책을 빌리려 온 거겠지.

“…어라?”

그런데 이오나가 야한 책이라고?

이오나는 뱀파이어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성교로 번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종족을 변이시켜 번식하는 종족.

따라서 이오나에게 일반적인 야스는 성적 흥분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조금 전의 이오나가 내비친 매료 또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닌, 먹잇감을 유혹하기 위한 발전한 능력이니 말 다했지.

우리가 목덜미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에게 식욕이나 성욕을 느끼지 않듯, 이오나 또한 이런 야설로는 흥분하지 않을 텐데….

뭔가 다른 목적이라도 있나?

아무리 그래도 자면서도 제어하던 매료가 흘러나올 정도라니.

이오나의 나이가 몇인데 겨우 야한 책 보다 들켰다고 그 정도로 놀랄 리가 없잖은가.

역시 뭔가 다른 이유로 놀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터.

내가 이 도서관에 얽힌 몇 가지 비밀을 알고 있긴 해도, 전부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H&A에 나온 내용뿐.

게임에서 언급된 적 없는 이 19금 코너에 관해 아는 게 없는 것도 그래서다.

궁금하네.

내가 모르는 비밀이 아카데미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궁금해.

이오나는 에드메렉에 이어 들끓는 고요의 신도 색출로 사교도들을 연달아 물 먹인 나를 좋게 보고 있을 터.

살짝 물어보면 답해주지 않을까?

“저기…이오나 교수님.”

“응응? 왜 그래 얀델 학생.”

누가 가져갈까 품에 뽑아 든 책을 품에 꼬옥 안고 있는 이오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야한 책을 빌리러 오신 건가요?”

“그, 렇지?”

“왜요?”

“…응?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얀델 학생. 교수님도 어른인데 이런 것 좀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교수님은 뱀파이어시잖아요.”

“…….”

그 말이 스위치였는지, 언제나 헤실거리던 이오나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번 들어보겠다는 듯한 태도.

“이전에 무슨 종족이었건 상관없이 뱀파이어가 되면, 몸과 정신이 그에 맞게 변화한다고 들었어요.”

“맞아 맞아. 기껏 뱀파이어가 됐는데, 피를 빠는 일에 거부감이 들어서 굶어 죽으면 안 되잖아?”

“식욕이 변화하듯 성욕도 변한다죠.”

이오나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뱀파이어가 평범한 야한 일에 흥분할 리도 없으니, 분명 교수님의 목적은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하?”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이오나.

“얀델 학생…정말 알고 싶어?”

“그럼요. 교수님도 알잖아요? 저랑 교수님의 목적은 꽤 많은 부분이 일치해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요.”

“흐응 흐응. 일리가 있네. 좋아! 귀 좀 이리 가져다 대 봐!”

동네 아주머니처럼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이오나.

그에 맞춰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머리를 낚아챈 이오나가 귓가에 속삭였다.

“난…해.”

“네?”

“난 다른 뱀파이어와 달리 평범한 야한 일에 흥분한다구.”

“…….”

“그러니까 대단한 꿍꿍이 같은 건 없어!”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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