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라 삿대질을 하자 카를라가 무척이나 귀여운 것을 보았다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주인님 진짜 도서관은 처음 오시나 보네요. 저건 사서들이 쓰는 골렘이에요.”
“골렘…?”
“네. 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서관이 보통 넓은 게 아니잖아요? 책장 자체도 높구요. 아무리 사서들이 숙련된 마법사라지만, 사람의 힘으로 여길 완벽히 관리하기 어려우니 일부는 골렘에게 맡기는 거예요.”
“보통은 그냥 사람을 더 쓰지 않아?”
골렘은 만들기도 어렵고 유지 보수에도 비용이 상당할 텐데.
지당한 의문이었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당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아.”
엘리샤의 말대로 여긴 교수도 학생도 대륙 최고 수준이 모인 아카데미.
골렘이야 교수님이 뚝딱뚝딱 만들어주실 테고, 고장 나도 공방 거리에 가져가면 수리는 금방이다.
오히려 생활 마법을 주로 쓴다지만 어쨌든 숙련된 마법사인 사서를 구하는 게 더 비싸게 먹히겠지.
“신기하네. 아카데미에서만 볼 수 있다는 광경이라는 거잖아.”
“그렇게 신기하시면 한번 써보실래요 주인님?”
“어? 내가 써도 돼? 사서들이 쓰는 거라며.”
“그럼요. 저 골렘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거든요. 책 정리하기, 그리고 책 찾아주기요. 원하시는 책이 있으시면 하나 찾아달라고 해보세요.”
아. 골렘이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했나 보네. 그냥 지구의 도서 검색용 컴퓨터 같은 건가 보다.
뽈뽈뽈 날아다니는 골렘 중 하나에게 손을 흔들자 하던 일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
“어…그냥 제목을 말하면 되나?”
“네. 어지간한 책은 다 있을 테니 그냥 말씀하시면 돼요.”
“뭐가 좋을까…그래. 수인족의 기원이라는 책에 대해 찾아와 볼래?”
끼익끼익.
눈코입도 없는 것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 한 권을 들고 오는 골렘.
[수인족의 기원]
제목을 보니 맞는 것 같네. 혹시나 싶어 안쪽을 조금 훑어보았다.
-인간과 결혼한 짐승이 있다.
-짐승과 결혼한 인간이 있다.
-태초에는 인간과 짐승이 같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맞네 내가 찾으려던 책.
도서관이라 차마 큰 소리를 못 냈지만, 대신 카를라의 소매를 마구 잡아당기며 그리 말했다.
“진짜 신기하네 이거.”
“그러는 주인님은 지금 진짜 귀여우시구요.”
“…….”
아까부터 연상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를라의 시선이 너무 간지럽다.
어쩔 수 없잖아! 진짜 신기한걸! 골렘이 책을 찾아준다니까?!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엘리샤를 바라보았지만….
“이건 확실히 좀 귀엽네요.”
“어디가?!”
“언제나 다 알고 있다는 듯 능글맞은 모습만 보여주던 당신이 평소와 달리,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요.”
구체적이구만! 근데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아!
다시 생각해도 재밌는지 엘리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치 어디 시골에만 살던 사람이 도시에 처음 올라온 것 같은 모습이……아.”
말하다 말고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입을 떡 벌리는 엘리샤.
그리고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세요 얀델. 이젠 저희가 곁에 있잖아요? 앞으로도 많은 걸 같이 보죠.”
“…….”
이거 그거지? 숨어 살던 비밀 결사 출신이, 조직 망해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됐다고 착각하는 그거지?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근데 야설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해? 아까 그 골렘한테 물어보면 되려나?”
“얀델…당신 정말 분위기를 못 읽네요. 여기선 좀 더 감동하란 말이에요!”
그치만…솔직히 엄청 궁금한걸.
판타지 세상의 야설을 어케 참음?
“근데 야설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해? 아까 그 골렘한테 물어보면 되려나?”
“얀델…당신 정말 분위기를 못 읽네요. 여기선 좀 더 감동하란 말이에요!”
어이없어하며 내 손등을 찰싹찰싹 때리는 엘리샤.
그치만…솔직히 엄청 궁금한걸.
생각해보라. 창작물, 특히 성적인 것에는 언제나 판타지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음습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가.
다양한 이종족이 더불어 살아가고, 금기긴 하지만 최면 마법도 실존하는 에우렐리아 대륙이다.
카를라와 엘리샤는 에우렐리아 대륙에서 나고 자랐기에 잘 모르겠지만, 내게 이 세상은 존재 자체가 판타지란 말이다.
판타지 세상의 판타지라니. 이걸 어케 참음?
“알겠어? 이건 어디까지나 호기심에 의한 학술적인 그거라고.”
“네네. 그렇겠죠.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당신.”
“왜?”
“그으…제가 해보니까 책으로 읽는 것보다 얀델 당신이랑 하는 플레이가 훨씬 자극적이더라고요.”
“…….”
얼굴을 붉히며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엘리샤.
뭐지. 나를 유혹하는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빠뜨리고 읽어본 책과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어디가 어떻게 더 좋았는지 보고하게 만들고 싶지만….
여긴 도서관이니 남들 몰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는 걸로 봐줬다.
“삐얏?!”
물론, 갑작스레 엉덩이를 잡힌 엘리샤는 특유의 괴성과 함께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지만.
정적을 일깨우는 엘리샤의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이에 보여주기라도 하듯 짐짓 엄한 태도로 엘리샤를 꾸짓었다.
“쉿!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지 엘리샤!”
“당신 정말…정마알!”
엘리샤가 엉덩이를 부여잡으며 원망스런 눈길을 보내왔지만….
롤빵 머리의 전직 영애 출신 하이엘프가 그래봤자 위협적이기는커녕, 내 안의 가학심을 자극할 뿐이다.
낄낄 웃으며 엘리샤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음미하듯 여러 각도에서 느긋이 감상하자.
“큿….”
뭐라 쏘아붙이고는 싶지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자 부끄러운지 스윽 시선을 피하는 엘리샤.
“반칙. 반칙이에요 이건….”
“그럼 이제 야설 보러 가는 거지?”
“갈게요! 갈 테니까 이것 좀 놔주세요.”
마지막으로 엘리샤의 볼을 가볍게 꼬집어 주고서야 놔주었다.
자신의 볼을 만지작대며 조금 멍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를 보자 절로 흐뭇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내가 엘리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엘리샤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그렇게 혼자 낄낄대고 있던 것도 잠시.
살짝 볼을 부풀린 카를라가 돌연 팔짱을 껴왔다.
가느다란 팔이 휘감겨 오고, 그 위로 부드러운 가슴이 짓눌린다.
하지만 기분 좋음보다 먼저 올라오는 것은 의아함이었으니.
“카를라? 갑자기 왜 그래?”
“저한테도 관심을 주세요 주인님.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듯 고개를 까딱이자, 까치발을 들어서 속삭이는 카를라.
“네발로 엎드려서 멍멍 하고 울 거예요.”
“…여기서?”
“네. 여기서.”
안 그래도 엘리샤가 한번 시선을 끌었는데, 다음은 카를라가 멍멍 거리며 또 이목을 끈다?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그, 그럼 바로 가볼까? 골렘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지?”
“어…그래도 되긴 하지만, 골렘은 기본적으로 음성 인식이란 말이죠. 직접 말하는 건 좀 부끄럽잖아요? 길은 제가 아니까 주인님은 그냥 따라오기만 하세요!”
“아하? 그럼 부탁할 게 카를라.”
카를라가 내 팔을 이끄는 방향을 따라 책장 안쪽으로 향했다.
***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서야 멈춰선 카를라.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일렬로 가지런히 늘어선 책장들이 요 앞부터는 삐뚤빼뚤 제각각의 모습으로 서 있었으니까.
“…무슨 미로 입구 같네.”
“아핫. 저도 처음에 그 생각했었어요. 실제로 내부도 미로 같구요. 하지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어요.”
“어머? 그런가요? 전 그냥 구석진 곳이라 그런가보다 싶었습니다만.”
흥미롭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는 엘리샤에게 카를라가 물었다.
“엘리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어떤 심정이었어?”
“어떻기는…대체 무슨 오해를 했길래 카를라 당신이 식당 바닥을 네발로 기며 밥 달라고 할 정도로 망가졌는지 궁금하다는 생각뿐이었죠.”
아. 그러고 보니 엘리샤는 원래 여기까지 올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학기 초에 나랑 카를라가 보인 모습에 충격받고 자기 시종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도서관에서 독학했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콧바람을 뿜는 엘리샤.
그런 엘리샤에게 카를라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두 번째는? 이미 궁금한 건 얼추 알았을 텐데 또 찾아왔을 때는 무슨 생각이었어?”
“읏! 그, 그건….”
우물쭈물대는 엘리샤의 모습에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보고는 싶은데 괜히 부끄럽고. 하지만 나도 이제 어른이니 당당하게 보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랬지?”
“…….”
“괜찮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인 코너까지 왔는데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혹은 누가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엘리샤.
하긴. 계속 아카데미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면 한동안 어색하겠지.
어쩌면 불편한 마음에 다시 도서관을 찾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일부러 책장을 꼬아놨다는 거지? 바깥에서도, 안쪽에서도 서로를 잘 찾아볼 수 없게끔 말이야.”
“맞아요 주인님! 은근 사람이 많아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 자체는 흔하지만…그래도 어지간히 취향이 비슷하지 않은 이상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은 드물 거예요!”
“확실히 좋긴 하네. 근데 이거 처음 와보는 사람은 길 찾기 힘든 거 아냐?”
“걱정 마세요. 그런 초심자들을 위해 준비해둔 선배님들의 안배가 있으니까요!”
19금 미로가 시작되는 책장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이내 두꺼운 책 한권을 뽑아내는 카를라.
그러자 뒤편에 숨겨져 있던 작은 책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도서관을 여행하는 신입생을 위한 안내서]
“처음 와보는 사람들을 위해 선배들이 조금씩 작성한 가이드예요.”
“뭘 이런 걸 다 만들었대….”
피식 웃으며 카를라에게 받아든 책자를 펼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