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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10화 (110/230)

페이는 에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행복해졌지만, 그 행복이 너무나도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일까.

얀델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떠날 때도 말없이 갑자기 떠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다면 페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부르르.

“흐윽….”

잠시 상상했던 페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미 지금 같은 생활을 맛봐버린 이상,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춥고, 배고프고, 폐기물 처리 시설을 뒤져 재료를 수급하고, 반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당하고….

더는 그렇게 궁상맞게 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였으나, 그렇다 하여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쯤 되자 페이의 오랜 트라우마 또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뛰어난 연금술사였던 어머니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후에 페이를 데려간 그녀의 아버지.

로칸 야른샤드.

그도 처음부터 페이에게 냉혹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집안에 적응하지 못하는 페이를 배려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지.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을 무시했을 때의 충격을 페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만약 이를 얀델을 통해 다시 겪는다면?

과연 그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자기도 모르게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떨기 시작한 페이.

요즘은 워낙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 행복했다지만…본래 페이는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이다.

폭주하는 부정 회로 속에서 페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차오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것뿐.

“히끅….”

그렇게 혼자 헤실대다, 발버둥 치더니, 급기야는 울먹이기 시작한 페이.

누가 보면 영락없는 미친년이라는 생각에 자조를 한 줄 더 이어 나가던 페이 뇌리에 벼락처럼 영감이 떠올랐다.

“…으응?”

얀델은 첫날부터 자신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장 며칠 전에도 만져봐도 되냐는 장난을 쳐왔을 정도.

거기에 언제나 노예 둘을 데리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희롱하는 것을 보아, 소문만큼은 아니어도 여자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책임감도 꽤 강해 보였지.

그렇다면 자신이 얀델을 붙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얀델이 자신을 쉬이 떠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기정사실 같은 것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페이가 난데없이 작성하던 리스트를 찢어버렸다.

찌익 찍.

그리고는 새로운 페이지에 가장 필요한 물건을 큼직한 글씨로 적었다.

‘미약’

실로 엉큼한 계획이 페이의 머릿속에서 착착 세워지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이번 결투 이후로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

조사 결과 펠롭은 페이 이외에도 평민이나, 힘없는 가문의 학생을 대상으로 비슷한 짓거리를 여러 번 반복해왔고.

페이를 뒷골목으로 끌고 간 여학생도 그런 희생자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이에 펠롭은 아예 퇴학 처리당했으며 그 여학생은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어쨌든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라 정학 처분을 받았다.

프랭크…그러니까 사교도 쪽은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굴러갔다.

아카데미 내부의 사교도를 전부 걸러낸 것은 물론이요, 외부의 몇몇은 아카데미까지 와서 의심스러운 이를 내게 검증받고 싶다 연락해왔었지.

물론 맨입은 아니고 온갖 보상을 곁들여서 말이다.

나야 몇 번 찌르면 끝나는 일이니 개꿀이지.

다만 골드는 이미 충분하기에 돈 말고, 다른 물건으로 보상받기로 했지만.

이번 기회에 나랑 안면을 틀 생각인지, 영약까지 보내오는 곳도 있더라.

역시 사람이 뭔가 보여줘야 한다니까.

아무튼 그렇게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뒷수습에 힘쓰던 어느 날.

뜬금없이 페이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굳이?”

그냥 말로 하면 되는데?

의아한 마음에 내용을 읽어봤으나…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혼자서만 공방에 와달라니.

“설마 후원금이 부족했던 걸까 카를라? 마법 장비는 재료부터 비싸긴 한데.”

“주인님은 암무거또 몬나…그래서 좋아….”

편지의 내용을 보여주며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조금 모자란 아이를 보는 듯한 자애로운 눈빛뿐이었다.

너무해.

설마 카를라에게 이런 시선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심통한 표정으로 엘리샤 쪽을 바라보았으나.

“얀델 당신 바보예요? 멍청이예요? 거기서 후원금 소리가 왜 나오는 거죠?”

엘리샤에게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이쯤 되면 정말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싶어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던 것도 잠시.

카를라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손에 다시 편지를 쥐여주었다.

“괜찮아요 주인님. 저희 예상대로라면, 슬슬 때가 됐을 뿐이니까요. 저희는 기숙사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주인님은 페이 양에게로 가보세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걸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얀델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 아니니 그냥 빨리 다녀오기나 하세요.”

어서 가보라는 듯 내 등을 꾹꾹 미는 엘리샤.

억지로 엘리샤의 손길을 버티며 둘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아, 역시 이대로 보내기는 좀 그렇지 엘리샤?”

“음…가능하면 좀 더 꾸미는 게 좋겠죠? 지금은 너무 평소 모습이잖아요.”

“좋아. 아직 시간 남았으니 후딱 해치우자.”

둘은 내 뚱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대로 달라붙어 여기저기 더듬기 시작했다.

별로 더럽지도 않건만 클린 마법을 걸고, 옷매무새를 반듯이 다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만져준다.

무슨 선물이라도 포장하듯 정성스런 손길.

내용물이 나라는 게 참 몬가 몬가지만…카를라와 엘리샤는 결국 끝까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향수를 뿌리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샤방해진 나를 기숙사 바깥으로 내쫒기까지.

솔직히 좀 어이가 없긴 한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카를라와 엘리샤가 내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잖은가.

노예 각인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있고, 둘이 그럴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별거 아니었으면 오늘 밤에 벌을 주면 될 일이지.

…생각해보니 상이나 벌이나 하는 일은 똑같은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벌이다.

굳게 닫힌 기숙사 문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페이의 공방으로 향했다.

***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 페이의 공방.

평범한 수준이지만 장비를 연성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 성과를 내세워 다른 곳으로 옮겨도 될 텐데.

그새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단순히 사람 없는 곳이 마음 편한 걸까.

공방은 그대로 여길 쓰겠다고 하더라.

물론 여기저기 뜯어고친 덕에, 이젠 내용물뿐만 아니라 겉보기에도 반짝반짝하지만.

공방 입구에 설치된 마도구를 가볍게 두드렸다.

초인종이라면 초인종인데, 버튼을 눌러 벨을 울리는 게 아니라 노크 소리를 안쪽으로 전달하는…내게는 다소 기묘한 마도구.

똑똑똑.

“페이 선배? 저 왔어요.”

……

.

“???”

똑똑똑.

“페이 선배? 저 왔다니까요. 계세요?”

다시금 노크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뭐야. 불러놓고 왜 대답이 없어.

설마 본인이 까먹고 외출했을 리는 없겠지.

중요한 실험 중이라거나 화장실이라 반응하지 못하는 건가?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노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인벤토리에서 의자를 꺼내려는 순간.

-흐읏…후, 후배님 왔어?”

뒤늦게 마도구에서 들려오는 페이의 목소리.

숨이 가쁜 것을 보아 호다닥 뛰어오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역시 뭔가 일이 있었나 보네.

“네. 저 왔으니까 문 좀 열어주세요.”

-지금…으응. 지금 열게.

철컥.

잠금이 풀린 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긴 했지만 구조 자체는 그대로라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좁고 긴 통로.

지금이야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이 정해진 레시피대로 연성하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만도 않았다고 한다.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을 새로이 만들어야 했기 때문.

덕분에 연금술사의 공방에서는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는데…그중 가장 치명적인 건 역시 유독성 물질의 유출이었다.

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연금술사의 공방에는 구조적인 규제가 생겼다나.

지금이야 마법과 소재의 발달로 사라진 규제지만…이렇게 오래된 공방 건물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더라.

당장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좁고 긴 통로가 그러하다.

유사시에 가스가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살짝 경사지게 설계된 구조거든.

대부분의 가스는 공기보다 무거워 밑에 고이는 성질을 이용한 것.

뭐, 페이쯤 되는 실력자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설마 대 연금술사가 될 사람이 포션 만드는 중에 잠깐 딴생각 하느라, 기화된 가스를 한참이나 방치하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겠어? 공기 순환 마도구도 있는데.

속으로 피식 웃으며 통로 끝자락의 공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

확 하고 흘러나오는 분홍색 안개.

아니. 잠깐. 진짜?

식겁하며 반사적으로 옷 소매를 들어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마도구 너머로 들려온 페이의 상태가 묘하게 이상했었지.

원래 좀 음침한 사람이라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나.

황급히 공방 안쪽으로 뛰었다.

불도 안 켜놨는지 어두컴컴한 실내. 광원이라고는 몇몇 설비들이 작동하며 발하는 빛뿐.

그래도 어찌어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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