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09화 (109/230)

“맞습니다. 단순히 프랭크 선배가 운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그보다 사교도라는 쪽이 훨씬 그럴듯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저는 결투 중에 악신의 권능으로 의심되는 공격을 받기도 했거든요.”

안 좋은 느낌이 들어 막지 않고 피했더니, 등 뒤에서 저작음이 들렸다는 소리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손에 쥔 머리채를 집어던졌다.

철퍽.

힘없이 쓰러져 연신 꿈틀대는 프랭크.

녀석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짐짓 싸늘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나지막하게.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프랭크 밀러를 사교도 혐의로 고발하겠습니다! 아울러 승자의 권리로 프랭크를 챔피언 삼은 펠롭에 대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무, 뭣?! 아니야! 나는…몰랐어! 정말 몰랐다고!”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멍하니 대련장을 바라보던 펠롭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적의뿐.

이에 엿됐음을 감지한 펠롭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멈춰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텁.

“잠깐 잠깐. 어딜 가려고 그래? 응?”

검붉은 머리카락에 고혹적인 몸매. 하지만 그 모든 인상을 지워버리는 장난스런 언행.

“예쁜 교수님이랑 면담 좀 하고 가 학생!”

이오나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

평소처럼 푼수 같은 미소.

허나 그 안에는 거절을 거절하는 섬뜩함이 담겨 있었다.

이오나의 사교도 혐오는 너도나도 알만큼 유명한 것.

아마 펠롭은 단순히 제 버릇 못 버린 망나니겠지만…그래도 창백하게 질린 모습을 보니 좀 고소하네.

키득키득 웃고 있자니, 심판 역을 맡은 신성학부의 교수가 뒤늦게 선언했다.

“이번 결투의 승자는 마법학부 1학년 얀델이오! 또한 프랭크 밀러에 대한 고발과, 승자의 권리로 요청한 펠롭 브론델의 조사를 결투 위원회의 이름으로 인정하오!”

“감사합니다.”

“무얼. 오히려 눈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쪽이 미안할 따름이지. 다만, 이번 일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자네의 협력이 조금 필요하네만….”

“성물의 힘이 필요하신 거죠? 얼마든지 협조해드릴게요.”

사제답게 사교도가 관련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노교수.

내겐 좋은 일이지.

이번 기회에 들끓는 고요 교단의 위험성을 알릴 수 있을 테니.

잘 부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이오나와 노교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대련장을 내려왔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세 여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물개박수를 치는 카를라.

원소 조합으로 만들어낸 마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뿌듯한 미소를 짓는 엘리샤.

그리고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내 실력도 잘 몰랐던 터라 혼자 멍청한 표정을 짓는 페이.

카를라에게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아직 사람들 앞에서 하는 스킨십이 어색한 엘리샤는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직 상황이 파악이 덜된 페이에게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잘 보셨죠? 앞으로도 누가 페이 선배 괴롭히면 바로 저한테 일러버리세요. 싹 다 혼내줄 테니까.”

그제야 멍하던 페이의 얼굴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응…후배님이 내 편이라는 거. 항상 기억할게.”

입꼬리를 배시시 끌어 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으슥한 골목길에서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표정.

그래. 그거면 됐다.

“어라? 그럼 제가 페이 선배를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가슴 만져봐도 될까요 페이 선배?”

“…되겠어? 내 감동 돌려줘!”

까비아깝송.

얀델의 결투가 끝난 뒤. 아카데미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아카데미 내부에 사교도가 숨어들어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

안 그래도 최근에 1학년이 던전 실습 중에 습격받기까지 했던 터라 충격은 훨씬 더했다.

얀델의 소문이 퍼졌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불안감.

이에 아카데미는 발 빠르게 대응했다.

얀델의 도움을 받아 아카데미 내부의 사람들을 성물로 죄다 찔러본 것이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부터 시작해, 직원, 입점 상인, 심지어 한 명뿐이지만 교수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이 사교도로 판명된 것이다.

단순히 사교도를 잡아낸 것뿐이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

하지만 도망치지도 숨지도 못함을 직감한 일부 사교도는 순교라는 이름 하에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물론 열받은 교수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터라 별다른 추가 피해는 없었으나….

말로만 듣던 사교도의 위협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학생들의 동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그렇게 학생들이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이번에는 사로잡은 사교도들의 심문을 진행하던 교수들이 충격받을 차례였다.

제각각 다른 교단의 스파이가 이렇게나 많이 숨어들었다는 건, 무언가 엄청난 음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강도 높은 심문을 이어 나갔고.

그 결과 생포한 사교도들이 서로 다른 교단 소속이 아니라, 들끓는 고요 교단 소속이라는 게 밝혀진 것.

지금껏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 권능 복사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아카데미에서의 문제는 더 이상 아카데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전 대륙이 혹시 주변에 숨어있을 지 모를 사교도를 잡기 위해서, 혹은 사교도라는 명목으로 정적을 치워버리기 위해 혼란에 빠진 사이.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페이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흐아아…눈부셔….”

주머니 한가득 담겨있는 골드. 그 찬란한 광채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후배님 대단해. 후배님이 최고야.”

이번 달의 후원금과 약속했던 성과금의 합은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했다.

이미 한차례 후원금을 받아본 적 있는 페이지만, 당시에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필요한 설비를 사느라 전부 써버렸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거금을 직접 만져보며 실감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공방에 틀어박힌 페이의 머릿속에는 이번엔 뭘 살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당장 급한 설비야 저번에 전부 사뒀다지만, 마법사인 얀델에게 만들어줄 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전문적인 설비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마력 추출기는 당연히 사야 하고. 마력 고정기는…약물로 대체할 수 있으려나? 다른 거 사고 남으면 사야지. 맞다. 재료도 사야 하는데. 처음이니까 마나다이트는 15%짜리면 되겠지? 응. 일단은 성공하는 게 중요하니까.”

공방 쇼파에 누워 흥얼거리며 리스트를 작성하는 페이.

평소의 쭈뼛거림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 소심함은 온데간데없는 당당한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페이의 영역.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요새요, 왕국이니. 자신의 공방 안에 틀어박힌 페이는 신이고 무적이다…!

“후힛…인챈트 쪽도 기본은 배워야겠네. 어차피 중요한 건 회로 작성이니 공정 과정에서부터 음각을 새겨두고, 그 위에 마력을 흘려 넣으면…흐헤헤….”

몸에 밴 음침함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렇게 희희낙락 구매할 물품을 적다가 슬쩍 골드 주머니를 열어보고, 리스트를 마저 쓰다가 다시 주머니를 열어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등.

만약 누군가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살짝 질렸을 정도로 행복해하는 페이였으나.

“…아.”

어느 순간 일시 정지라도 걸린 것처럼 멈칫하고 말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뜬금없이 얀델을 떠올렸을 뿐이니까.

페이의 표정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점점 몽롱해진다.

떠올리는 것은 으슥한 골목.

경박하게 웃는 펠롭. 홱! 하고 꺾이는 목. 뒤늦게 타오르는 고통. 가시처럼 박힌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익숙한 절망과, 체념이 솟아올라 마음을 까맣게 물들일 무렵.

얀델이 나타났다.

언제나 장난스럽게 웃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며.

씹어 뱉는 목소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허나, 페이의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

언제나 자신을 향한 깊은 신뢰를 담고 있던 눈동자가. 이따금 장난스레 휘어지던 그 보라색 눈이.

마치 자신이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력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살벌하게 빛나던 모습.

그 모습이 페이의 심장에 단단히 각인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으…꺄아아악!”

어쩐지 답답한 마음에 결국 괴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는 페이.

하지만 이 감정이 싫지만은 않아, 자기도 모르게 히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까.

아마 모르니까 한참을 쇼파 위에서 펄떡이는 것이겠지만.

사야 할 물건을 고민하고, 골드를 보며 헤벌쭉 웃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준 얀델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여기까지가 페이의 요즘 일과였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씩 제 할 일을 해나가는 페이였으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어제까지의 페이였다면, 자신을 구하러 온 얀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포화 상태가 되었겠지만….

부끄러움도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오늘의 페이는 그다음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골목길 이후에 벌어진 일들.

그냥 돈 많고 실력 좀 있는 후배인 줄 알았던 얀델이, 사실은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고 실력이 좋은 후배였다니.

“???”

별로 변한 게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갸웃거리는 페이였으나, 이내 결투 내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련장 전체를 불태우던 그 불길, 어지간한 기사학부 수준은 될 것 같은 민첩한 몸놀림은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느닷없이 사교도를 잡아내나 싶더니, 문제가 공론화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카데미와 협력해 세작을 뿌리 뽑지 않았던가.

지금쯤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이번 일의 뒤처리에 여념이 없을 얀델을 떠올리며 페이는 근본적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후배님은 대체 정체가 뭘까?”

얀델의 행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평범한 평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데…정말 소문대로 뒷세계 거물의 후계자라거나 그런 걸까?

사교도를 싫어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가 심한 걸 봐서 어쩌면 고위 성직자의 숨겨진 자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페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고 있던 펜과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팽개치는 페이.

그리고는 비스듬하게 누워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쇼파에 앉았다.

출렁.

겨우 상체를 일으켰을 뿐인데 격하게 흔들리는 가슴을 대충 팔로 잡아 고정한 페이는 진지한 얼굴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나…후배님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페이가 얀델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이름과 잘생긴 얼굴, 두둑한 골드 주머니, 자신에게 보내는 이상할 정도로 깊은 신뢰, 틈만 나면 자신의 가슴을 훔쳐보는 음흉함, 신기하게도 노예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마법 실력뿐이다.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런 건 결국 표면적인 것들.

누구든 얀델과 약간의 시간을 보내면 알 수 있는 것이리라.

페이가 알고 싶은 건 이보다 더욱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얀델이 부자인지, 왜 자신을 아껴주는 건지, 왜 노예와 그리 사이가 좋은지, 왜 사교도를 극도로 혐오하는지 등등.

페이는 얀델의 동기를 알고 싶었다.

얀델이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라, 진실로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얀델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허나, 페이는 얀델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쓰라리게 다가왔다.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심장을 헤집는 것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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