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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08화 (108/230)

헤이스트로 한층 빨라진 속도를 살려, 프랭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는 타오르는 불꽃이요, 맹렬한 분노다.”

평소보다 조금 긴 영창. 그와 동시에 스태프 끝자락에서 붉은색 선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암호문에 가까운, 언어인지 그림인지 모를 문양들이 원 안을 가득 채운다.

카를라에게 배운 마법진을 이제야 써보네.

누가 봐도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모양새. 거기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중이기까지 하니 프랭크의 마법 실력으로는 둘다 완벽히 막아내지는 못할 터.

하지만 얌전히 당해줄 리도 없으니, 결국 녀석의 선택은 하나뿐.

진작에 들켜, 비장의 한수로도 써먹기 힘든 악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다.

“큭…윈드 커터!”

조금 전에 무리하게 실드를 사용했을 때처럼 마력을 과하게 뿜어내며 외치는 시동어.

하지만 이번에는 똑같이 윈드 커터를 날리는 대신, 몸을 옆으로 던졌다.

이를 가는 척 하며 무언가 깨무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확인했으니까.

콰직!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저작음.

윈드 커터를 날리는 동시에 혼탁한 합일의 권능인 허공 포식을 숨겨둔 것이리라.

둘다 투명해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들다는 점을 노렸겠지.

“어떻게…?”

주변에 안 들켰을지 몰라도, 내게는 확실히 들켰다는 걸 깨달은 녀석이 멈칫한 사이.

벌떡 일어나며 다음 영창을 이어 나갔다.

“허나, 너는 휘몰아치는 폭풍의 창이기도 하니.”

꽤나 거창한 영창. 하지만 지금의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을 위해서는 필수나 다름없다.

이미 스태프 위에 떠오른 붉은 마법진 옆에 녹색으로 빛나는 선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중 영창?!”

프랭크 뿐만 아니라, 관중석 전체가 웅성인다.

하지만 틀렸다. 마법 2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게 아니다. 이 자체로 하나의 마법인 것이다.

붙들고 있던 기존의 붉은 마법진과, 새로이 완성된 초록색 마법진이 천천히 겹쳐진다.

그 모습에 기겁한 프랭크가 미친 듯이 마법과 권능을 난사해대기 시작했다.

“윈드 커터! 윈드 커터! 윈드 커터어어…!”

하지만 에드메렉의 공세조차 대부분 피해낸 나다.

위력도, 숙련도도 한참은 떨어지는 프랭크에게 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하물며 지금은 그때는 쓰지 못하던 헤이스트도 걸고 있는 상태.

순간 고정되는 시선, 턱을 움찔거리는 타이밍, 나와 프랭크 사이의 거리. 그리고 윈드 커터를 위해 휘둘러지는 원드까지.

그 모든 것을 눈을 보고 피하고, 또 피한다.

아무리 내가 어중간한 고인물이라도, 이 정도는 그리 어렵지도 않으니까.

“어, 어떻게….”

결국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 마법을 저지하기보다, 어떻게든 막아낼 실드를 준비하는 녀석.

그렇게 기어이 두 마법진이 완전히 하나 되는 것과 동시에.

철컥 철컥.

머릿속에서 무언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붉은색이면서, 동시에 초록색으로도 빛나는 기이한 문양들.

복잡하게 얽힌 의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이내 하나의 현상에 다다른다.

화르륵.

소용돌이치는 화염의 창.

원소 조합으로 만들어낸 지금껏 없던 새로운 마법.

이에 이름 붙이기를.

“템페스트 번.”

그리고 시야가 화염에 휩싸였다.

“템페스트 번.”

시동어와 함께 쏘아진 창이 프랭크의 바로 앞에 내리꽂혔다.

그리고는 품고 있던 열기를 단번에 풀어 헤쳤다.

화아아악-!!

오로지 뜨거운 온도에만 집중한 플레어와, 넓게 퍼지는 성질이 있는 윈드 블래스트의 조합.

사실 이건 전에 한번 카를라가 쓴 적 있는 프로미넌스 플레어의 하위 호환에 불과하다.

허나 중급 마법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 하급 마법의 한계는 진즉에 뛰어넘은 위력이라는 것 또한 사실.

이 넓은 대련장 전체를 휘감은 화염이 이를 증명한다.

혹시 죽을까 싶어 일부러 맞추지 않고 바닥에서 터뜨렸는데…썩어도 3학년이라는 걸까.

이걸 막네.

물론, 쉽게 막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여차하면 실드조차 녹여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프랭크가 이를 악물고 마력을 쏟아부었다.

“끄으윽!”

실드가 손상되는 즉시 마력으로 땜빵하는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이긴 해도 퍽 안정적이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놀고 있냐.”

대련장 전체를 불태우는 위협적인 마법이라지만, 템페스트 번은 어디까지나 내 마법.

내가 시전한 마법에 내가 피해를 입을 리가 없잖은가.

타닷.

강하게 내디딘 발이 땅을 박찼다.

지금의 불길을 유지하느라 다른 마법은 시전하지 못하지만…상관없다.

프랭크 또한 실드에 집중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니까.

아직 남아있는 헤이스트의 효과 덕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우웅.

녀석과 가까워질수록 단검의 울림이 강해진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사교도의 피를 보고 싶다고 외치는 것처럼.

…사실 이거 마검 아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프랭크의 실드를 들이받았다.

쩌적.

약간의 저항.

허나, 안 그래도 불길을 막아내느라 한계에 달해있던 실드다.

헤이스트의 가속과 체중을 온전히 실은 충격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을 터.

검 끝을 시작으로 퍼진 잔금은 어느새 실드 전체로 퍼졌고.

쨍그랑!

이윽고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흩날리는 실드 파편 너머로 뻗어진 단검이 프랭크의 어깨를 찔렀다.

“커헉!”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녀석의 얼굴. 다만, 한편으로는 안심한 것처럼도 보이는 얼굴이다.

자신이 사교도임을 알고 있는 내가 괜한 온정을 베풀진 않을 테니, 빗나간 거라 여긴 건가.

그럴 리가.

반격이라도 하려는 건지 입을 크게 벌려 깨무는 시늉을 하는 녀석.

허나 녀석은 입을 다무는 일도, 지근거리에서 허공 포식이 발동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번쩍.

단검에서 솟구친 섬광이 내부를 헤집었으니까.

“……!!”

빛은 사교도의 천적.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고통에 프랭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턱이 빠져라 벌린 입으로 꺽꺽대는 것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팔을 놀렸다.

푹, 푹, 푹.

“크아아아악!!!”

순식간에 반대쪽 어깨와, 양 허벅지까지 찔린 녀석의 비명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치 못 지른 비명을 한 번에 몰아서 지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

당연히 빛나는 사자 단검의 추가타에 의해 빛으로 지져졌기 때문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프랭크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턱.

어느새 조용해진 주변.

아무리 결투 중이라지만 무도하게도 보이는 내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살짝 찔린 것 같은데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하는 프랭크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좌에서 우로. 찬찬히 관중들을 둘러본 뒤에야 피 묻은 단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정의로운 광명 교단! 여기에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사제가 있습니까!”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외침이건만, 놀랍게도 즉시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앞줄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헬레나가 벌떡 일어선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형제님! 정의로운 광명의 딸을 어찌하여 찾으셨는지요?”

“헬레나 사제님이시군요. 마침 잘됐습니다. 사제님이라면 이 단검이 어떤 물건인지 잘 아시겠죠?”

방금까지 추가타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교도의 피가 묻어있기 때문일까.

빛나는 사자 단검 위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광휘를 본 헬레나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물론입니다 형제님! 정의로운 광명께서 직접 자신의 이빨을 뽑아 만든 본교의 성물 아닙니까! 신들의 전쟁 당시에는 저희 주께서 인정한 영웅들에게만 하사했던 물건이기도 하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당연히 이 단검의 성능에 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죠?”

“예에. 전쟁 중에 대부분 유실되긴 했지만…그래도 저희 주께서 직접 신체를 깎아 만든 것이라 유명하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야 영광이지요!”

잔뜩 신이 난 헬레나가 빛나는 사자 단검의 효과에 대해 줄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사제들이 으레 그러하듯, 약간 장황한데다가, 중간중간마다 과장이 들어가긴 했으나….

내가 상태창으로 봤던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여 평소에도 강하지만, 사교도를 상대할 때 본래의 힘을 되찾는…어?”

스스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헬레나가 태양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를 끔뻑이며 단검과 프랭크를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사교도…?”

예상한 대로의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시범을 보였다.

“네. 정의로운 광명께서 직접 만드신 신물답게 이 단검은 사교도 앞에서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죠. …이렇게요.”

콕.

“흐끄아아악!!”

손등을 살짝 찔렀을 뿐인데, 체내로 파고드는 빛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프랭크.

하지만 증명을 위해서는 한 번으로는 부족하겠지.

콕. 콕. 콕.

반짝 반짝 반짝.

“크악! 끼야아악! 끄르르…!”

찌를 때마다 치솟는 광휘. 과할 정도로 괴로워하며 펄떡이는 프랭크.

그 모습에 헬레나의 표정이 점점 스산하게 일그러졌다.

“사교도…!”

같은 말인데 어쩜 이렇게 어감이 다를 수 있을까.

짙은 분노가 실린 헬레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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