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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07화 (107/230)

“엘리샤 엘리샤. 저것 좀 봐. 주인님이 노예 각인 없는 노예를 만들고 있어!”

“자본의 노예인가요? 아니면 애정의 노예인가요? 어느 쪽이건 멀지 않은 것 같네요.”

“그렇게 태평할 때가 아니라니까? 우리도 위기의식을 갖고, 뭔가 주인님에게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어?”

“…이번만은 동의해요. 솔직히 저 가슴은 반칙이죠.”

아니, 너희들 조금 전까지 투닥대며 싸우지 않았어? 왜 또 갑자기 사이 좋아진 건데?

전부 들렸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어버버하는 페이를 어떻게 해야 고민하는 것도 잠시.

댕- 댕- 댕-

아카데미 전체에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각을 알리는 소리였다.

동시에 오늘의 결투가 시작되는 소리기도 하고.

언제 장난치며 부끄러워 했냐는 듯, 순식간에 경직되는 여인들.

나 또한 늘어졌던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고쳐 잡았다.

“가자.”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러.

***

-와아아아아아!!

대련장에 올라서자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어째 투기장의 검투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네.

가만히 멈춰서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검붉은 머리를 발견했다.

아니, 이오나 교수님은 왜 또 저기 계신담.

헛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꺄르르 웃으며 폴짝폴짝 뛰는 이오나.

저게 300살이 넘는 로드급 뱀파이어의 위엄…?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스태프와 빛나는 사자 단검을 꺼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전투 스타일.

살짝 뻣뻣했던 몸이 유연하게 풀어지며, 머리는 한점 흐림 없이 맑아진다.

그렇게 언제든 싸울 수 있는 자세로 기다리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에서 두 인영이 대련장 위로 올라섰다.

한쪽은 펠롭이고. 다른 한쪽은 녀석의 챔피언인….

“어?”

얘가 여기서 왜 나와?

좋게 말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하면 평범하게 정돈한 갈색 머리.

인상이 흐릿한 이목구비와, 숨소리조차 옅게 느껴지는 낮은 존재감.

내 두 번째 결투 상대이자, 들끓는 고요의 신도인 프랭크 밀러가 펠롭의 대리인으로 출전한 것이다.

“크큭…내가 기사학부에서 천박한 평민 놈이라도 데려올 줄 알았나? 안 됐군. 네 상대는 마법사다! 네놈 손으로 지목한 프랭크 선배 말이다!”

“어….”

펠롭이 저렇게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은 이해된다.

이중 캐스팅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마법사는 기사를 상대로 1:1에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하여, 일정 경지에 오르지 못한 마법사가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고.

실제로 지금의 나는 방어구도, 미리 마신 포션도, 주머니 속의 마도구도.

전부 기사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것들로 두르고 왔으니까.

이를 단번에 헛수고로 만들었으니, 펠롭 입장에서는 내 허를 찔렀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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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사자 단검】

폼멜에 울부짖는 사자 조각이 새겨진 순백의 단검.

금속이라기보다 뼈에 가까운 질감의 검신은 때때로 따스한 빛을 내뿜는다.

성스러운 광휘를 두른 단검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광휘는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리라.

-공격 시 10% 확률로 광 속성 추가 데미지 부여.

-치명타 데미지 30% 증가.

-사교도를 상대할 경우 추가타 확률과 치명타 확률이 100%로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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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왼손에 들린 단검이 작게 울며 간헐적으로 빛을 토해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휘둘러 달라는 것처럼.

사교도의 하드 카운터나 다름없는 단검과, 사교도인 프랭크를 번갈아 바라보자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녀석 딴에는 이번 기회에 실수를 가장해, 나를 죽이려는 것 같은데….

“개꿀.”

오늘 죽는 건 내가 아니리라.

펠롭이 자신의 챔피언으로 프랭크를 데려왔다.

펠롭은 내 허를 찌르고 싶었고, 프랭크는 실수인 척 나를 죽이고 싶었을 테니 좋다고 손을 잡았겠지.

물론, 나도 좋다.

우웅-

보라. 왼손에 들린 단검도 좋다고 울고 있지 않은가.

“개꿀.”

오늘 죽는 건 내가 아니리라.

낄낄대며 다 이긴 것처럼 구는 펠롭을 무시하며 프랭크 밀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범한 체격, 평범한 얼굴, 평범한 스타일.

이렇게 따라 하래도 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이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하하…언젠가 한 번 소문이 자자한 후배를 만나고 싶었는데…이렇게 만나게 돼서 유감이야.”

“…….”

“우리 오늘 처음 만나지 않았나? 대체 왜 내가 소문을 퍼뜨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조용한 성격이긴 해도, 누가 먼저 건드렸을 때마저 가만히 있지는 않거든?”

“…….”

“저기…후배님? 뭐라고 대답 좀 해줄래? 성과 좀 세웠다고 해서 선배가 만만해 보여?”

이제 곧 죽을 놈이랑 대화하기 귀찮아 입 다물고 있었더니, 비릿한 미소로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녀석.

잠시 고민하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냄새가 나네.”

“냄새? 난 모르겠는데…아, 혹시 내 입에서 냄새가 난다며 도발할 생각이라면….”

“더러운 사교도의 냄새가 나.”

“…이번엔 사교도야? 아무래도 후배는 망상벽이 좀 있는 것 같네.”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하는 프랭크. 하지만 녀석의 반응이 조금 늦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랑은 더 말해봤자 이쪽이 손해지. 어차피 결투할 사람이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자신을 콕 짚었는지 알아내려 하던 프랭크가 이제는 스스로 대화를 끝내려 든다.

하기야. 들끓는 고요의 신도들은 지금껏 거의 들킨 적이 없다.

운 나쁘게 걸린 몇몇도 자신이 다른 교단의 신도라는 식으로 속여 넘기기 일수였고.

그렇기에 다들 들끓는 고요 교단이 존재한다는 건 알아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는 약소 악신 교단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전부 놈들의 권능 때문이다.

들끓는 고요의 권능은 크게 세 종류.

우선 첫 번째는 은신이다.

수준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부터, 일시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까지.

여러모로 까다로운 권능이지만, 부자연스러운 능력이기에 탐지하려면 어떻게든 탐지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폴리모프다.

겉모습이 변하는 것 자체로는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지만…이건 인지 저해 능력이 아니라 따로 감지에 걸리지도 않는다.

마지막 세 번 째는 바로 권능 복사.

위력이 몇 단계는 떨어지고, 발동에도 제한이 덕지덕지 달려있지만….

들끓는 고요의 신도는 다른 신의 권능을 흉내 낼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선신의 신성술이라도.

덕분에 놈들은 선신 교단 내부에도 숨어들 수 있고, 운 나쁘게 걸리더라도 다른 악신의 교인인 척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들끓는 고요 교단의 위험성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싶었는데….

조금 전의 도발이 효과가 있길 바라야지.

어느새 펠롭도, 심판도 내려가고, 대련장은 전투의 여파를 막아줄 무형의 결계로 뒤덮였다.

모든 절차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에 맞춰 전신으로 퍼져가는 마력.

언제 어떤 자세로든 마법을 발현하기 위한 운용.

반면 프랭크는 짤막한 원드에 모든 마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최대 마력량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 텐데도,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점.

아마 사전에 펠롭에게 마나 회복 물약이라도 받아 마신 거겠지.

당장 나 또한 이런저런 포션을 빨고 왔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기도 잠시.

데엥-

시작 신호인 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마법을 자아낸다.

“집어삼키고. 폭발하라. 파이어 볼.”

3학년답게 능숙한 마법 운용.

들끓는 고요의 권능은 그 자체로 파괴력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권능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기술을 갈고 닦는 경우가 많다.

저 마법 또한 그런 경우겠지.

날아오는 불덩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준비했던 마법을 입에 담았다.

“가속하라. 헤이스트.”

단검을 쥐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웠던 몸이 더더욱 가벼워진다.

타닷.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훅하고 밀려나는 주변 풍경.

목표를 잃은 화염구가 애꿎은 바닥에서 터져나간다.

“위, 윈드 커터!”

당황한 녀석이 연달아 준비하던 마법을 즉시 쏘아낸다.

조금 급하게 시전한 감이 있는지 조금 형태도 일그러지고, 위력도 담겨있는 마력도 조금 약하다.

하지만 정확히 이쪽을 노리고 있으며 빨라진 몸으로도 피하기 힘든 속도라는 건 사실.

“보이지 않는 칼날이여. 윈드 커터.”

스태프를 휘둘러 무형의 날붙이를 휘두른다.

쐐애액…퍼엉!

공중에서 충돌하는 두 윈드 커터. 하지만 다소 불안정했던 프랭크의 윈드 커터가 터져나가며 내 마법이 마력의 잔향을 휘감고 날아들었다.

“실…드!”

영창조차 생략하고 시전한 방어 마법. 부족한 부분을 마력으로 때운 건지, 녀석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진다.

팡!

내 윈드 커터가 프랭크의 실드 위를 두드렸다.

이미 위력이 약해진 터라 흠집 살짝 내는 것에 그쳤지만…애초에 이 마법의 목적은 따로 있다.

“너…!”

같은 마법을 더욱 빠르고, 정교하고, 강력하게 시전한다.

그렇게 대비되는 서로의 실력.

이를 가는 프랭크와, 경악하는 관중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실력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니,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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